양가 어머니들은 둘 다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웠다.
시은의 어머니 한여사는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고도 남을 짓을 저지르고도 감쪽같이 부모를 속인 채 예비 신랑에게 파혼까지 말했다는 딸에게 그토록 손질을 하고도 좀처럼 삭여지지 않는 화 때문에, 그리고 그 원수 같은 딸내미를 싸고만 도는 남편 때문에 언니들에게조차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끙끙 앓았다. 남편 안사장은 그저 말없이 아내가 좋아하는 전복죽과 팥이 든 아이스바를 사다 바치고 조용조용 빗자루를 쓸고 걸레질을 했다. 아내가 딸에게 또 주먹을 휘두를까 봐 그는 시은이 안방에 들지 못하게 했다. 시은은 묵묵히 밥상을 차려 아버지와 함께 억지로 수저를 들고, 여기저기 멍이 들고 욱신거리는 몸으로 설거지와 빨래를 했다.
진원의 어머니 정여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약혼녀와 둘도 없는 절친에게 보기 좋게 배신당한 주제에 그 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무릎까지 꿇고 앉아 눈물 흘리는 팔불출 못난이 아들에게 분통이 터져서 미칠 지경이었고, 그런 아들을 이해하고 편드는 남편과 딸에게도 분노가 솟았다.
정여사는 요한과의 일로 반쯤은 포기하고 시은과의 결혼으로 다시 그 남은 반을 체념했던 진원에게보다, 그리고 그 두 가지 일에서는 늘 아들 편이었던 샌님 남편에게보다, 첫째보다 더욱 어화둥둥 키워 미주알고주알 마음을 다 털어놓는 유일한 사람이자 자신을 배신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한 하랑에게 훨씬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 착하고 순하기만 했던 딸내미가 대학에 진학해 따로 살게 되면서부터 알게 모르게 느꼈던 거리감이 그 요망한 요한에 대한 말 못할 마음 때문이라는 점이 정여사는 너무도 괘씸해서, 그이는 하마터면 딸마저 병실에서 내쫓을 뻔했다.
그러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딸에게 계속 토라져 있을 정도로 정여사는 모질지 못했고, 기운도 없었다.
…그냥 내버려둘 걸 그랬나.
따뜻한 물수건으로 정성스레 손발을 닦아주는 딸에게 정여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랑이 무슨 소린가 싶어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정여사는 환자임에도 딸의 손을 빌려 평소처럼 화장을 했고 정수리도 잔뜩 부풀린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그이의 낯빛은 평소와 달리 좋지 않았다.
하지 말라고 하면 괜히 더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인데, 그냥 계속 너 아기 때처럼 지냈으면 그냥 친오빠 같아서 그런 마음 안 들었을 수도 있잖아.
정여사는 이제는 은퇴한 지 오래인 가사도우미를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그이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진원이와 그때부터 멀어지지도 않았을 테고 애들 아버지의 실망한 얼굴을 안 봐도 되었을 테고 내 예쁜 딸이 가슴 아파할 일도 아마도 없었을 테지. 어쩌면 그애도 차마 그런 짓을 저지르진 못했을 게다. 설령 친구의 여자에게 마음이 동했더라도 죽을힘을 다해 참았겠지. 정여사는 화면을 가득 채웠던 그 남자애의 표정이 더없이 애처로웠던 것을, 그저 색정에 불타오른 사내의 얼굴이 아니었음을 기억했다. 여전히 예쁘장한 그 얼굴은 그 생모의 서글픔마저 빼닮아서, 정여사는 충격받고 분노하는 와중에도 가슴 한쪽이 저릿했었다.
요한을 말하면서 목에 핏대를 세우지 않는 어머니가 낯설어서 하랑은 멈칫거렸다.
정여사는 며칠 만에 십 년은 늙어버린 기분이었다. 몸의 주름은 각종 시술과 화장으로 눈속임할 수 있어도 마음의 주름일랑 아무 소용없으니 독을 품지 말고 그저 편안하고 고요하게, 흘러가는 대로 하라고 조곤조곤 타이르던 돌아가신 계모가 정여사는 그 순간 너무도 그리웠다. 어머니… 엄마. 정여사는 주님 대신 모친을 입안 가득히 채웠다.
아내에게 쫓겨난 김원장은 마침내 요한을 만났다.
드문드문 김원장이 용기를 내 문자를 보내면 꼬박꼬박 예의바른 답을 해오긴 했어도,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면 결코 먼저 연락하지 않는 요한의 얼굴을 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나마 진원을 사이에 두고서야 김원장도 조금은 마음 편하게 요한을 대할 수 있건만, 김원장은 아내와는 달리 병원에 묶인 몸인 데다 서울나들이가 흔치 않았고 요한은 귀성하는 일이 없었으므로 둘의 만남은 일 년에 한 번도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세월이 갈수록 그 둘 사이도 서먹서먹해졌을 뿐이었다.
아내가 입원한 병원 근처 카페에서 요한을 기다리며 김원장은 물잔을 몇 번이나 비웠다.
진원이한테서 들었다. 몸은… 괜찮니? 정말 괜찮아? 김원장이 물었으나 전화기 저편 요한은 말이 없었다. 내가 봐야겠다. 내가 보고 확인해야겠어. 너 어디니. 나 서울이다. 요한은 잠시 후에 제가 갈게요, 아버지. 어디세요? 낮은 목소리를 더욱 낮추어 물어왔었다. 오랜만에 듣는 요한의 전화 목소리는 그 생부가 건강을 잃기 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해서 김원장은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카페에 들어선 요한의 모습은 그가 다가올수록 그 아름답고 불행한 생모를 떠올리게 했으므로 김원장은 또다시 비감에 젖었다. 그 탓에 김원장은 진원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너만 원한다면 시은이와 어디 멀리라도 보내주마, 말할 뻔했다.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김원장은 한 손을 들어 요한과 눈을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근데 저 괜찮습니다. 그냥… 실수였어요.
요한이 공손히 인사한 뒤 객쩍게 웃으며 말했다. 김원장은 말없이 그의 양손을 붙잡고 그의 긴 소매를 걷어올려 반창고가 붙어 있는 왼쪽 손목과 크고작은 자상들이 붉게 남은 그의 양팔을 깊은 한숨을 쉬어가며 살펴보았다. 그러고 나선 도수 높은 안경 탓에 실제보다 작아 보이는 눈동자에 힘을 주어가며 살이 빠져 더욱 또렷해진 요한의 이목구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요한은 가출 직후가 떠올라 그때처럼 얼굴을 붉힌 채 그의 진찰이 끝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때처럼 옷을 벗겨 샅샅이 훑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많이 말랐구나. 식사량을 좀 늘리렴. 고기도 챙겨먹고.
…예, 아버지.
요한은 끼니마다 고기를 집어 밥에 올려주던 김원장의 손길이 떠올라 뭉클했다.
화실에서 있었던 그 일의 이유를 진원은 뭐라 전달했을까. 설마 삼각관계를 말하진 않았겠지. 말했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혼을 내셔도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오는 길에 요한은 그런 생각들로 괴로웠다. 그러나 오랜만에 양아버지를 뵐 생각에 요한은 또한 마음이 들뜨고 설렜다. 저분이 진짜 내 아버지였으면, 요한은 어린 시절 수없이 많이 했던 생각을 다시금 하다가, 그의 진짜 아들에게 저지른 자신의 죄를 인식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제가…
요한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진원이가 괜찮다는데 내가 뭘. 신경쓰지 마라. 너야말로 괜찮은 거냐. 얼마나 괴로웠니. 그래서 그런겨? 그래도 그럼 못쓴다, 요한아.
실수한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 다정한 말투여서 어른아이 요한은 눈물이 핑 돌았다.
네가 나쁜 마음으로 그러지 않았단 걸 내가 안다. 진원이도 그걸 아니까 용서했겠지. 다만 당장은 널 못 보겠다고 하더라. 시간을 좀… 두자. 다만 한 가지…
김원장은 잠시 뜸을 들였다.
진원인 그대로 결혼할 생각이던데, 넌 확실히 정리가 된 건지 알고 싶구나. 진원이 말론 영상 속에서, 그날 호텔 앞에서 딱 한 번 그런 게 다라고… 맞니.
…영상… 이요?
요한이 고개를 들어 김원장을 보았다. 눈물이 어느새 쏙 들어가버렸다.
그래, 뭐 짚이는 게 있니?
영상… 아버지가 어떻게… 진원이가 그러던가요.
…네 어머니가 모르는 번호로 그 호텔 앞에서의 동영상을 받고 난리가 났었다. 그래서 입원해 있고.
김원장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자 요한이 벌떡 일어섰다. 아버지, 죄송해요.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요한은 꾸벅 인사한 후 그대로 카페를 뛰쳐나가버렸다. 김원장은 영문을 몰라 한동안 멍멍히 서 있었다.
한편 진원은 시은에게 연락하여 현재 상황을 전달하면서 영상에 대해 물었다. 예상했던 바였으므로 시은은 차분히 영상의 출처와 진원의 모친이 자신의 모친에게도 그 영상을 전달하는 바람에 일어난 사태를 공유했다. 연주가 D시까지 몰래 뒤를 밟은 것도 모자라 사람을 시켜 그렇게 증거물을 수집했다는 것까지 미처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시은은 진원에게 사과했다.
영상… 봤어? 시은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 왜…? 뭐하러. 다 아는 내용인데. …그래도 봐야지. 보면… 자기 마음 달라질지 모르잖아. 진원은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이 시은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진원이 그걸 봤으면. 보고도 날 놓지 않았으면. 아니 보지 말았으면. 아니 보고 날 포기했으면. 시은은 또다시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징글징글했다. …만나서 얘기하자. 나도 할 얘기 있어. 진원은 시은의 일터 앞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시은이 직장 근처에서 만난 사람은 진원 이전에 그의 옛 여자친구인 강이나였다.
이나는 지난 공휴일에 진원을 불러냈을 때처럼 그의 학부와 로스쿨 동창이자 입사동기여서 진원과는 꽤 친한 편인 그의 한 친구의, 자신에 대한 오랜 호감을 이용해 시은을 만나는 데 성공했다. 미안해요, 시은 씨. 우정보다 애정을 택한 그의 얼굴은 심한 우거지상이었다. 그는 잠시 주뼛거리더니 그대로 도망치듯 카페를 떠나버렸다.
누구세요?
강이나. 뭐 이름은 상관없을 테고, 김진원 여자친구였어요.
…그런데요?
시은은 키도 크고 가슴도 크고 눈도 크고 코도 무지 높아 일순 무서워 보이기까지 하는, 나이가 들면 꼭 예비 시모와 비슷해질 것 같이 생긴 여자의 정체에 대한 불길한 직감을 떨쳐버리려 애썼다.
머리가 나쁘군.
여자가 콧방귀를 뀌며 시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시은은 여전히 서 있는 채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니 뭐 여자의 직감이란 것도 없나? 몇 살 어린 거 빼곤 볼 것도 없잖아?
시은은 처음 보는 여자의 모욕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자신이 잘못하여 진원에게 이별을 고했고 결국 그와 파혼하더라도, 시은은 이 일을 진원에게 따져 물을 것을 다짐했다.
그러는 그쪽은 예의가 없네요.
시은이 신경질적으로 앉으며 내뱉었다. 이나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 정돈 해야지. 나, 최근에 진원이와 둘이서만 술 마셨어요. 한때 무척 뜨거웠던 남녀가 다시 만나 어둡고 한적한 호텔 바에서. 뭐 더 얘기해야 하나?
시은은 한밤중에 술냄새를 풍기며 자신에게 달려왔던 진원을 떠올렸다. 그냥 술 마시다가… 혼자 마시다가 그런 게 아니었구나. 그러나 시은은 그 일로 진원에게 화가 날 정도로 양심이 없진 않았다.
진원이 3학년 땐가 사귀었어요. 그애 어머니가 날 엄청 좋아했죠. 뭐 나보다야 우리집 재산하고 명성을 좋아한 거겠지만. 이젠 딸을 그런 집에 보내려고 열심이신 거 같던데.
…왜 헤어졌는데요?
시은은 앞에 앉은 이가 요한에게 불미스러운 제안을 했던 그 여자친구일 것 같은 직감으로 물었다.
그때 난 결혼 생각이 없어서. 지금은 있고.
진원 씨랑 다시 사귀고 싶단 건가요?
그렇다면? 그쪽이 치팅했다던데. 그애 어머니가 두고보실까?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맞지 않아요?
이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결혼하든 안 하든 그건 우리 둘 사이 문제예요. 그쪽은 빠져요.
시은은 오기로써 쏘아붙이고 자리를 뜨려 했다.
멍청하긴! 넌 저당 잡힌 거야!
시은의 뒤통수에 대고 이나가 소리쳤다. 시은이 돌아보았다. 이나가 시은에게 바짝 다가와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진원이가 무슨 짓을 해도 넌 감히 뭐라 할 수가 없게 됐다고! 그렇게 살고 싶어?
…진원 씬 그런 사람 아니에요.
시은이 주먹을 그러쥐며 말했다.
차라리 그런 사람이면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냥 살면 돼요. 그렇지 않아서 더 괴롭고 미안한 거예요. 그런 사람이면 그쪽은 왜 포기 못하죠? 왜 돌아왔어요? …앞으로는 그 사람만큼 좋은 남자 만날 자신이 없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닥쳐.
설령 이런 식으로 그 사람 얻는다고 쳐요. 그게 제대로 된 거겠어요? 나더러 멍청하단 사람이 그런 건 왜 몰라?
시은이 큰 키에 높은 힐까지 신은 이나에게 기죽지 않고 대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