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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4부 4장 4화 - 그때 그녀

by 지구인



저도 비슷한 일, 아니 그보다 더 심한… 정말 선을 넘을 뻔했다고요.


진원이 수치심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상대가 덤벼든 것이지만 바로 뿌리치지 않은 것이 부끄러웠다. 거부하기는커녕 여자의 농염한 손짓과 관능적인 몸매를 짧은 순간이지만 즐겼었다.


그 상대가 누군지 아세요? …이나, 강이나. 바로 그 여자라고요.


정여사는 지난 토요일 서울 남산에 위치한 최고급 호텔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그 이름의 주인을 떠올렸다.


진원의 군 제대 후, 여고 동창생을 통해 집안 좋고 명문대생인 데다 키도 크고 얼굴도 반반한 그 여자애와 아들을 만나게 했었다. 진원의 사진을 보고 여자 쪽이 적극적이었고, 진원도 굳이 거절할 까닭이 없어 사귀었다. 정여사는 아들보다 두 살 연상인 것과 성형수술이 의심되는 지나치게 육감적인 몸매를 빼고는 다 마음에 들어서, 이나를 며느릿감으로 점찍었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둘은 헤어졌다. 그 이유를 집요하게 묻는 모친에게 진원은 여자가 양다리를 걸쳤다고 약간의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정여사는 그 길로 이나에게 따지려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그 모친은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언니라 부르는 상대여서 속으로만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는 청소년기를 보낸 유럽으로 다시 나갔다.


아들의 옛 여자친구가 외국에서 외모까지 잘난 재력의 서양인을 만났고 곧 결혼할 것 같다고 들었던 차에, 뜻밖에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 모친과 함께 다가와 웃으며 인사한 그녀는 최근에 귀국해 결혼소식을 듣고 축하하고 싶어 진원을 몇 번 만났다고 묻지도 않은 말을 흘리더니, 여자가 딴짓하는 것 같던데요. 저한테 당했던 것처럼요. 너무 괴로워해서 보기가 힘들었어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함께 있던 하랑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리는 것을 정여사는 놓치지 않고, 오랜만에 다같이 차 한잔하자는 이나 모친의 제안을 거절하고 딸을 추궁했다. 너 뭐 아는 거지? 폰 내놔 봐. 엄마. 엄마… 빨리 안 내놔? 그러다 정여사는 딸이 요한에게 보낸 최근 메시지들을 발견했었다.


- 오빠, 원이 오빠한테 들었어. 도와달라고 했다며. 나 너무 기뻐. 원이 오빠가 도와주고 오빠만 좋다면 나 엄마 무서워도 참을 수 있어. 근데 무슨 일 있어? 왜 연락이 없어…

- 오빠… 날 동생으로는 생각한다면, 몸 괜찮아지면 꼭 연락해줘.


너… 이게 무슨… 하랑의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나 몰래 연락하고, 아니 걔가 무슨 짓한 거야? 아니야 엄마… 내가 좋아한 거야. 한이 오빤 날 그냥 동생으로만 생각해. 너 똑바로 말해. 걔가 너한테 손댔지? 그 백여시 같은 얼굴에 넘어간 거야? 아니라니까요… 내가, 내가 짝사랑한 것뿐이에요. 오빤 날 피해다녔어요. 너, 내가 그렇게 단속했는데 이게 무슨 짓이야. 내 이놈새끼를 그냥! 아니 그놈 얼굴 보기도 싫다. 이거 보면, 네 오빠도 안다는 거 아니냐? 세상에… 너희 둘이 나한테 어떻게 이런… 정여사는 여러모로 괘씸한 아들에게 씩씩대며 전화했고, 남편과 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예 아들의 집까지 쳐들어왔었다.


진원은 그 전날 시은에게 한밤중에 달려갔다 온 뒤, 독한 술을 못 이길 정도로 마시고 다음날 오후까지 뻗어 있었다. 그러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였다. 시은에게 추행을 저지른 그날보다 훨씬 더한 수치심과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였다.


요한을 유혹했던 지난날을 사과하겠다며 자신도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말에 차마 이나에게서 돌아서지 못한 것을 진원은 뼈아프게 자책했다. 쉬는 날 넘치는 시간을 때울 겸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차를 마시고 와인을 곁들인 근사한 저녁까지 얻어먹고 그녀를 호텔에 데려다준 것, 그 다음날 회사 앞으로 찾아온 그녀에게 이번엔 자신이 저녁을 사고 그녀가 묵는 호텔 바에서 술잔을 기울인 것, 그러다가 그녀의 유도심문에 넘어가 시은과의 일을 흘리고 기다렸다는 듯 자신에게 몸을 밀착하며 은밀한 부위를 더듬어온 그녀를 바로 밀어내지 못한 것, 무엇보다 시은에게 그저 혼술하다 달려간 것처럼 진실을 숨긴 것에 대해 진원은 경험한 바 없는 깊은 죄의식과 지독한 자기혐오를 느꼈다.


아유 술냄새! 꼴을 보아하니… 이나 말이 맞구나!


아들의 집에 들이닥치며 정여사가 소리쳤다.


그야말로 성장한 세 사람은 까치집 머리와 푸석한 얼굴에 구겨진 트레이닝복 차림의 진원과는 한가족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진원은 모친이 말한 이름이 충격이었다. 그 사이 어머니를 쫓아가기라도 했단 건가? 그는 신경질적인 초인종 소리에 옷을 찾아입기도 바빠 전화기를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걔가 오늘 식장에 오는 걸 알고 넌 안 간다 한 거야? 결혼식 앞두고 부지런히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꼴이니.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뭐 둘이 만났다니까 네가 말한 거겠지. 네 댁이, 세상에나 입에 올리기도 남사스럽다만 딴짓하고 있는 거 같다던데?!


무슨…


진원은 거짓말을 만들어내려 애썼다.


하여간 그 계집애도 되바라져가지고는, 실실 웃으면서 또 그래서 어떡하냐고? 하, 내가 당장 쫓아가려는 걸 참고 너한테 왔다. 걔 머리끄댕이 잡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얼른 말해.


그 여자가 잘못 얘기한 겁니다. 그냥 좀… 싸웠을 뿐이에요.


뭐 때문에?


진원이 답을 고심하는 사이 정여사가 자답했다.


걔 때문이지? 너한테 어디까지 말했는지 모르겠다만 그애 얘기를 꼬치꼬치 캐묻더라. 너와의 사이도 그렇고 걔랑 나랑 왜 이렇게 됐는지도 말이야. 호들갑스럽진 않았어도 충격받은 게 분명했는데, 딴짓한 게 아니라면 그 일 때문인 거지? 네가 결혼을 기화로 걔를 다시 가족으로 데려오려 하니 말려달라고 내 부탁했었는데, 네 댁이 내 말대로 하니까 싸운 거 아니야?


정여사의 빗나간 추측에 진원은 안도했다. 그러나 어머니 말대로 요한 때문임은 분명한데, 시은이 정여사의 말대로 하지 않아서,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 일을 저지른 것이 떠오르자 우울해졌다.


…비슷해요. 왜 그러셨어요? 제가 어머니 때문에라도 요한일 놓지 못한다는 거 아시잖아요.


내가 뭘! …그 얘기는 나중에 따로 하자.


정여사가 딸을 의식해 말을 돌리려 했다.


저도 알아요, 엄마.


하랑이 울 것 같은 얼굴에 비해서 꽤 또렷한 발성으로 말했다.


뭘?


엄마가 요한 오빠가 절 어떻게 할까 봐 그래서 더 오빠한테 그렇게 구시는 거 안다고요. 한이 오빤 아무 잘못 없어요. 제가 그냥 혼자 좋아했고, 이젠… 그마저 접을 거니까요. 오빠랑 단 둘이 만난 적, 오빠가 아파서 여기 있었을 때 몇 분도 안 되는 시간이 다예요. 이 소파에 앉아 있었을 때 오빠가 저한테 조금이라도 더 떨어지려고 얼마나 그랬는지 아세요? 그리고 저는 얼마나 비참했는지 아세요? …그러지 마세요, 엄마.


실연하고도 요한을 싸고도는 착하고 가엾은 하랑을 그 부친이 한숨을 내쉬며 다독였으나 그 모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이것도 확인해야지. 사실이야? 걔가 우리 딸한테 손끝 하나 안 댄 거 확실해.


저희 셋도 몇 번 만난 적도 없어요.


진원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모르세요? 요한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이 어머니라는 걸. 어머니에게 책잡힐 짓은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어머닌 정말 모르세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의 약혼녀를 마음에 품고, 고향에서는 그 몸마저 취하려 했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그 일을 안다면… 진원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래서 둘 다 아니라고? 하랑인 티없이 깨끗하고, 네 댁도…?


네. …이나가 다시 저를 원하는 것 같더군요. 그때 일을 사과하면서 자신은 똑같은 일로 파혼까지 했다며… 후회된다고, 저 같은 남자가 없다고 했어요.


진원은 그녀와의 일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으나 어머니의 의심을 죽이기 위해 부끄러움을 참고 말했다.


그 계집앤 이제 와서 무슨! 미국보다 더한 유럽에서 그동안 어떻게 놀았는지 알 게 뭐야. 그래놓고 아무 일도 없는 척 식장에까지 잔뜩 꾸미고 나타난 거야, 괜찮은 남자 있으면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 참 내…


저는 그때도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어요. 걔가 너무 적극적이었고 어머니도 좋아하셔서 그냥 사귀었던 거지. …어쨌거나 제가 거절하니까 화가 났겠죠. 그래서 어머니한테 시은일 모함한 거예요. 걔가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헤어지고 나서도 별로 아쉽지 않았던 거고요.


진원은 차마 당시 이나의 양다리 상대, 아니 그저 하룻밤을 원한 상대가 요한이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래, 시은이가 그럴 애가 아니지. 당신은 괜히 남의 말만 듣고 그래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원부가 점잖게 타일렀다. 진원이 극구부인했고 하랑도 함구했으므로 정여사가 시은을 의심한 것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던 것이다.


더구나 하랑이 감쪽같이 자신을 속이고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고 불편해하는 이를 짝사랑해왔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어서 정여사는 그 일로만 한탄과 저주를 퍼붓기에도 바빴다. 결국 그이는 그날 바로 귀가하지 못하고, 진원이 급히 잡아준 집 근처 레지던스에서 딸을 데리고 하룻밤을 묵은 뒤 주일예배조차 건너뛰고 일요일 오후에야 D시에 내려갈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인 월요일에 미지의 전화번호로 발송된 그 볼썽사나운 동영상을 보았고, 남편의 마지막 예약진료까지 마치길 기다려준 대신 다음날 휴진을 종용한 것도 모자라 혹시 서울 체류가 길어질지 몰라 각종 화장도구와 여분의 옷들까지, 딸에게도 야무지게 챙겨갈 것을 지시하고서 정여사는 또다시 상경했던 것이다. 마치 해외여행이라도 나가는 듯한 여행가방들을 자동차 트렁크에 실으며 김장로는 절로 하느님을 찾았었다.


******


…그러니까 네 말은, 대학 때 사귀었던 옛 여자친구와… 그 영상보다 더 심한 짓을 했다는 거냐.


정여사가 기함하여 아무 말 못하는 사이 김원장이 조용히 물었다.


네.


혹시 그 때문에 제 발 저려 시은일 용서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그럼 못쓴다.


…그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일로, 제가 잘못한 그 일 때문에 깨달았어요. 제가 원하는 여자는, 앞으로 함께 하고 싶고 안고 싶은 여자는 오직, 시은이뿐이라는 걸요. 그래서 바로 시은이한테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제가 비겁해서… 그 얘기는 바로 하지 못하고, 그냥 절 받아달라고밖에 못했어요.


널 받아달라니, 아니 그럼…


네, 어머니. 시은이는 고작 포옹 한 번, 키스 한 번에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제게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래놓고는 매일같이 울고 하루같이 여위어가고 있다고요. 제가 그렇게 한밤중에 달려갔는데도 역시 받아주지 않았어요. 절 위해서, 그리고 그 불쌍한 요한일 위해서요!


지가 뭔데 감히 널 위한단 거냐? 널 위한다는 게 네가 그렇게 끔찍이 여기는 걔랑 눈 맞는 거야? 그리고 뭐, 그놈을 위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그 기둥서방 같은…


여보.


정여사의 악다구니를 김원장이 막았다. 말의 내용도 그렇고 아내의 혈압도 걱정되어서였다. 정여사는 의사 남편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제발 좀 그만하세요, 어머니…


진원이 울먹이며 말했다.


요한이네 어머니, 잘못되셨을지 모른다고요… 그 녀석, 그 불쌍한 녀석은 손목까지 그었다구요…


그가 말문이 막힌 부모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시은이마저 불쌍해 어쩔 줄 모르는 그애를, 한집에서 형제처럼 자란 제가 어떻게 버려요… 지금 당장은 저도 그 녀석 보기 힘들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어요. 어머니 제발… 제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사랑해주시면, 아니 미워하지라도 않으시면 안 되나요? 그 두 사람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을 거 같단 말예요! 어머니 제가 행복하길 바라시잖아요! 제가 잘되길 바라시잖아요!


진원이 울부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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