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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4부 4장 3화 - 두 어머니

by 지구인



모처럼 하루종일 날씨가 맑고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한여사는 늦게 온다는 남편과 딸의 연락을 받고, 더운 날 가스불을 켜지 않아도 되는 것을 반가워하며 찬밥에 물을 말아 대충 저녁을 때운 후 설거지까지 마치고 이부자리를 깔던 참이었다. 문자 오는 소리가 났다.


- 딸자식 참 잘 키우셨습니다~ 나는 이 결혼 절대 못 시키니까 그렇게 알아요!


뜻밖에도 사부인이었다. 문자에는 무슨 사진 같은 것까지 들어 있었다.


한여사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 사진을 누르자 내려받기가 시작되고 사진이 전체화면으로 커지더니 화살표가 생겼다. 흰색의 그것을 터치하니 짧은 동영상이었다. 엄청난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 어떤 건물 벽에 가까이 붙은 두 남녀가 껴안고 입 맞추는 영상이었다. 빗줄기가 너무 세서 인물의 얼굴을 식별키 어려웠으나 한여사는 어렵게 영상 속 여자를 알아차리고 놀라서 전화기를 떨어뜨렸다.


시은모는 두 손으로 전화기를 들어올려 영상을 다시 보았다. 딸과 모르는 남자의 얼굴이 분명했다. 그리고 안사돈을 뵈러 간 날 시은이 입었던 하얀 원피스도 알아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지만 그날 이후의 사태를 그토록 간단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한여사는 바삐 뛰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당장 안사돈에게 전화해 자초지종을 듣고 싶은 충동을 한여사는 간신히 참았다.


흥,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무슨 딸자식을 그따위로 키웠느냐고 다짜고짜 소리치고 싶은 것을, 진원모는 남편과 딸의 눈을 피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시은모에게 영상을 보냈다. 마음 같아서는 문자로라도 온갖 욕을 다해주고 싶었으나 달리는 차 안에서는 멀미가 올지도 모르고, 문자 외의 말은 더할 필요도 없다 싶었다. 혹시라도 전화가 오면 최대한 우아하고 도도하게 굴어줄 참이었다.


무슨 소리예요?


운전하던 진원부가 아내에게 물었으나 정여사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버무렸다. 조수석에는 하랑이 있었다. 그들 세 가족은 동영상의 일로 진원에게 올라가고 있는 중이었다.


당일 아침에 정여사는 전날 자고 있는 사이 모르는 번호로 수신된 동영상을 보고, 이게 뭐야… 하며 한여사처럼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다가 곧 시력 좋은 딸의 존재를 생각해냈다. 2층 제 방에서 안방으로 불려 내려온 하랑이 바로 알아보고 경악하자 정여사는 왜, 누군데. 뭔데? 하다가 역시 옷차림과 건물을 보고 여자의 정체를 확신했다.


거기에 클로즈업된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정여사는 말 그대로 뒷목을 잡고 쓰러졌다. 하랑모는 지병으로 약한 고혈압이 있었다. 엄마! 하랑이 모친을 부축했다. 얘… 얘… 이 남자… 맞지? 하랑은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였다. 정여사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랑은 엄마, 괜찮아요? 다급히 물으며 전화기를 찾아 아버지를 호출했다. 동시에 물을 찾는 모친의 말에 주방으로 달려나갔다. 그 사이 정여사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 발칙한 계집애.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와 나한테 물어본 거야…?


딸이 가져다준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마셔버린 정여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요한이 시은을 좇아 내려왔다는 것까지만 알았던 하랑으로서도 새삼 슬픈 일이었으나 또한 확인사살일 뿐이었다. 하랑은 오빠가 걱정이었다. 당장에 진원에게 알리고 싶었으나 모친은 눈이 송곳이었다.


하랑아! 여보!


김원장이 평소와 달리 우당탕 소리를 내며 헐레벌떡 집안으로 들어왔다.


잘 왔어요. 당신 운전 좀 해요. 난 안 되겠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장 서울로 올라가 이노무 가스나 머리챌 다 뜯어놓고 말 거야, 내가.


…시은이? 허 참, 진원이가 아니라잖아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고 여우 같은 것이 고렇게 조신한 얼굴을 하고서는, 우리 착해빠진 진원일, 그 요망해빠진 그놈이랑 손 잡고 감쪽같이 속인 거야. …하랑아.


딸이 보여주는 영상의 인물들을 하랑부 역시 바로 알아채지 못했다.


여자는 그 계집애고, 남자가, 당신네 부자가 나만 탓하며 그렇게 싸고도는 잘난 걔잖아요!


김원장은 충격으로 입만 턱 벌렸다.


하여간 지 에밀 빼박았어, 그냥. 이래도 내 잘못이에요? 하랑이도 모자라, 아니 뭐 그래 그건 지 혼자 속앓이한 거라고 하니 그렇다치고, 이건 어쩔 거냐고. 보니까 나랑 만나려고 내려온 그날인데, 호텔 앞인데, 이걸로 끝났겠어요? 내 이 연놈들… 뼈 하나 못 추리게 할 거야. 감히 내 천금 같은 아들 경사에 제깟것들이 재를 뿌려? 더러운 것들! 은혜도 모르는 것들! 이래서 내가 그렇게 찜찜했던 거야. 내가 그렇게 반대한 거야. 당장 출발해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던 정여사는 그러나 어지러움으로 비틀거렸다. 그녀의 의사 남편이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리고는, 오빠에게 연락해 이 상황을 알리고 되는 대로 내려오라 전하라고 딸에게 지시했다. 그러나 정여사는 일하는데 왜 방해하냐며, 어차피 그 모녀도 만나야 할 테니 올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숨을 쉬며 예약환자들을 말하는 남편에게 아내가 딸과 둘이 기차를 타면 그만이라고 하자, 자신이 함께 가지 않으면 그야말로 폭주할 것이 자명한 아내의 불 같은 성정에 결국 남편은 투항하고 만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고급 대형 세단의 널찍한 뒷좌석에 몸을 실은 진원모는 안사돈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 곧 경쾌한 멜로디의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앞자리에 앉은 부녀가 서로 눈을 마주치고 뒷자리를 흘깃거렸으나 정여사는 날씨도 참 좋다~ 어두워져 가는 창밖을 보며 실실 웃기까지 했다.


원래부터 탐탁지 않았던 며느릿감이요 사돈감이었다. 처음에 영상을 보았을 때 정여사는 그야말로 피가 거꾸로 솟았고 눈앞이 아찔했으며 둘도 없는 아들이 안타까워 죽을 지경이었으나,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니 전화위복이 될 만한 일이었다. 잘난 아들이 아까워 뼈가 시렸던 마당에 알아서 제 무덤을 파는 시은이나 그 미모의 얼굴마저 불길한 요한까지 한꺼번에 내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 않은가!


그 둘에게 앗긴 진원을 다시 품안에 데려올 수 있도록 해주신, 절실한 기도에 마침내 화답해주신 ‘하나님’께, 그동안에는 약간의 원망을 했던 것을 반성하며 정권사는 모처럼 마음으로부터 감사기도를 올렸다. 오오, 은혜의 하나님, 오오.


반면 서울 변두리 오래된 국민주택 평형 아파트의 넓지 않은 안방 바닥에 앉은 한여사는 곡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참담한 초상을 치르는 상주와도 같았다. 너무도 기가 막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잘난 것도 없는 외아들밖에 모르던 친정부모의 장례 때는 물론이고, ‘살림밑천’ 노릇을 한 끝에 결혼생활마저 불행하여 환갑도 채우지 못하고 죽은 가엾은 큰언니의 초상 때도 이렇지는 않았었다.


몸에서 빠져나간 시은모의 혼령을 되돌린 것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한여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거실로 나갔다.


더운데 또 에어컨 안 켜고… 내가 돈 준다니까, 엄마.


…하루이틀이냐.


모처럼 부녀가 함께 귀가하는 모습을 시은모는 멍하니 보았다. 시은부가 양말을 벗어들고 긴 바지를 걷으며 천천히 안방으로 향하는 사이 그 딸은 재빠르게 에어컨을 켰다.


씻고 나오면 시원할 거예요, 아빠.


시은이 모처럼 명랑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 아버지가 싱긋 웃으며 그래 고맙다, 하고 방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 어머니가 딸에게 달려들어 머리통을 세게 후려쳤다.


시은이 놀랄 새도 없이 한여사는 이를 악물고 딸을 마구잡이로 후드려 패기 시작했다. 이, 이 사람이 미쳤나! 시은부 안사장의 사람 좋아 보이는 반달눈이 당혹감으로 가득찼다. 뱃살도 별로 없이 날씬한 몸에 키도 크지 않은 그는 엇비슷한 키에 보기 좋게 살집도 있는 아내가 온힘을 다해 휘두르는 주먹을 쉽게 제압하지 못했다. 부친의 체형을 닮은 데다 최근에는 더 마른 그 딸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엄마…


시은이 놀라움과 불길함으로써 어머니를 보았다. 한여사는 남편의 두 팔에 몸통과 팔을 제압당한 채로 씩씩댔다.


내가 널 그렇게 키웠냐? 어디서 배워먹은 화냥질이야악!!


한여사가 악을 쓰고는 바닥에 주저앉았고, 곧이어 집이 떠나가라 통곡했다. 시은 부녀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그런 그이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시각, D시에서 올라온 세 식구도 기어이 진원의 아파트에 도착했다.


정여사가 그랬듯 하랑도 차 안에서 몰래 메시지를 보냈으므로, 마음의 준비를 한 진원은 크게 숨을 내쉰 후 월패드의 공동현관 문열림 버튼을 누르고 복도로 나가 가족들을 기다렸다.


무슨 걱정예요, 이럴 때 의사 남편 덕 좀 봐야지. 정여사의 목소리가 진원을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 승강기 문이 열리자 진원은 어서 오세요, 공손히 인사했으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정여사는 말도 없이 집안으로 앞장섰고 김원장이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그 뒤를 따랐으며, 하랑은 어떡해 오빠…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듯한 얼굴로 오라비를 보았다. 진원은 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아,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전화해도 받질 않더라. 영상 보낸 사람 말이야. 뭐 어쨌든 빼도박도못할 증거자료인 거지? 누군지 몰라도 눈물나게 고맙지 뭐니.


정여사가 소파에 앉아 홀가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원은 고개를 떨군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하랑이 서재에서 의자를 가져와 오빠에게 가져다주고는 자신은 아일랜드 식탁으로 가 앉았다. 경외하는 어머니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어서였다.


보아하니… 알고 있었지, 너? 지난번에야 하랑이 일로 경황이 없었다만, 내가 가만히 있었을 거 같았니? 얌전한 괭이가 따로 없는 그 계집애랑, 지 에미 얼굴만 닮은 게 아닌 그놈의 새끼를 내가 그냥 내버려뒀을 거 같냐고!


여보…


옆에 앉은 남편의 만류에 정여사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엄마 말씀이 맞냐.


김원장이 차분히 물었다.


너도 알고 있었다는 거. 상대가… 그 상대도 알고 있었어?


…예.


이게 대체 어찌된 일이냐. 어떻게 그 둘이… 믿을 수가 없구나.


뭘 믿을 수가 없어요. 그 더런 피가 어디 가겠어. 여자애야 그놈의 잘나빠진 얼굴이랑 묘한 색기에 홀렸겠지 뭐. 아 우리 그 순진한 하랑이마저,


여보!


그제야 늦둥이 딸이 고개를 떨구는 것이 눈에 들어온 정여사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넌 어쩔 생각이냐. 알고도 극구 아니라고 했던 걸 보면… 용서했니?


예. 헤어지지 않을 겁니다.


저저저… 그 앙큼발칙한 것이! 그런 짓을 저지르고, 너한테도 들킨 주제로, 기어코 식장에 들어가겠대? 내 이년을…


어머니!


의자에 앉지 않은 진원이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너… 너 뭐야. 이 와중에 그 계집애 역성드는 거야?! 이거 봐요, 걔가 겉보기만 음전하지 아주 구미호가 따로 없다니까. 음흉하기 짝이 없어! 누가 그짝 핏줄 아니랄까 봐.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케케묵은 지역감정까지 들고 나오자 나머지 세 사람은 여보와 엄마/어머니를 동시에 외치며 화를 냈다. ‘그짝’이라면 치를 떠는, ‘수구꼴통’ 또는 ‘보수의 본산’으로 유명한 또다른 D시를 본적으로 하는 정여사는 내가 뭘! 지지 않고 응수했다.


대체 그 불여시가 어떻게 구워삶았길래 그런 얼빠진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당장 이년을…


제발 좀, 어머니!


진원이 다시 소리쳤다.


이 등신!


남편이 말릴 새도 없이 정여사는 벌떡 일어나 손 한 번 대지 않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아들의 뺨을 쳤다.


등신! 머저리! 불효자놈!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정여사가 아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울부짖었다. 하랑이 뛰어오다 고개를 젓는 부친을 보고 멈춰 섰다.


저도 똑같아요…


진원이 어머니한테 흔들리며 중얼거렸다.


시은이 욕할 자격… 저한테 없다고요, 어머니. 저도 똑같은 놈이에요. 아니, 더 최악이에요.


소리를 키워 또렷이 들린 진원의 말에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어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실 자격 없으세요. 어머니가 일조하신 거니까.


진원이 정여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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