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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4부 4장 2화 - 술과 눈물

by 지구인




안 되겠어. 너 아니면 안 된다고.


혀가 꼬이지는 않았으나 술냄새가 풍겨왔으므로 시은의 기쁨은 짧았다.


술 취했잖아.


현관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자신을 와락 끌어안은 진원을 밀어내고 승강기의 하강 버튼을 누르며, 시은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자신이 싫었다.


그래, 마셨어. 취했고. 하지만 이 일 잊지 않을 거고 이불킥하지도 않을 거야.


진원이 충혈된 흰자위를 부릅뜨며 말했다. 시은이 묵묵히 엘리베이터에 타자 진원은 약간 비틀거리며 그녀를 따랐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그냥…


그저 어서 빨리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버텨온 것은 피차일반이었을 것이기에 시은은 되묻지도 않았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나만 그런 건가.


이렇게 술기운에 한밤중에 달려올 수 있는 게 부럽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시은은 꾹 눌러 참았다.


진원은 술에 기대어 마음을 달랠 수 있었을 것이나 술이 약한 데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시은은 몰래 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새어나갈까 봐, 시은은 평소보다 볼륨을 높여 영상을 틀어놓고 꺼짐예약을 설정한 뒤에야 이불을 뒤집어쓰곤 했다. 그러나 시간은 나무늘보보다도 굼벵이보다도 느려터져서, 전과는 반대로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 지옥과 같았고 월요일이 천국 같았다. 그토록 중독되다시피 했던 영상물들도 그저 유유한 강물처럼 머릿속에 담기지 않고 흘러가버렸다.


시은이 대답은커녕 눈마저 마주치지 않자 진원은 더는 묻지 않았다. 어렵게 결별을 고해놓고 쉽게 대답할 성격이 아님을 잘 알아서였다. 그래도 서운했다.


그래 이건 좀 확인해야겠다.


1층에 다다랐을 때 진원이 말했다.


설마 연락하고 만나고 그런 건 아니겠지. …그 녀석 말이야.


하랑의 요한에 대한 마음을 알고도 시은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 때문에라도 진원은 그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말에 오히려 시은은 냉정을 되찾았다. 자신과 요한 사이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 없는 진원을 다시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말에 자기연민에 매몰된 탓에 잊고 있던 그 아름답고 불쌍한 남자가 궁금해졌다.


몸에 흉터는 남지 않았는지, 정신과 치료는 받았는지, 혹시라도 그 아들보다도 박복한 모친의 소식은 들었는지… 그러나 시은이 그에게도 해줄 수 있는 것은 역시 독하게 마음을 먹고 거리를 두는 것뿐이었다. 태수의 충고를 시은은 잊지 않았다.


차 가져왔어? 아니면…


공동현관을 나온 시은이 두리번거리며 묻자 진원은 차량 쪽으로 천천히 앞장섰다. 그를 따라가던 시은이 잠깐 있어, 마실 것 좀 사올게. 라고 말하며 진원이 말릴 새도 없이 잰걸음으로 그를 벗어났다.


진원은 차에 올라타 에어컨을 켜고 호흡을 깊이 했다.


시은이 전화를 받지도 않고 메시지를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정 안 되면 실례를 무릅쓰고 초인종이라도 눌러야겠다는 결심으로 진원은 무작정 대리기사를 호출했었다. 이번에도 받지 않으면 한여사에게 전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마침내 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는 나 10분이면 도착해, 집 앞으로 나와줘, 숨도 안 쉬고 말하고는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전화기의 메모장에서 찾아내 누르고는 시은네 문 앞에서 기다렸던 것이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까. 차 안에서 진원은 고심했다. 시은이 너무도 그립고 이대로 보낼 수 없다는 것만이 절대명령처럼 느껴져서 앞뒤 생각도 않고 달려왔고 그에 대해 후회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담담한 시은의 태도에 그는 실망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도 해쓱한 얼굴에 감춰지지 않는 눈물흔적에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을 뿐이었다. 나를 위해, 그리고 그 자식을 위해, 그게 옳다고 생각해 참고 있을 뿐인 거다… 그러니 내가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진원은 창문을 내렸다. 시은이 빨대를 꽂은 딸기우유 팩을 말없이 건네주자 진원은 울컥했다. 현재는 흩어진 세 사람이 처음으로 다같이 만난 그 밤, 바람이 기분 좋게 불던 그 공기 쾌적했던 그날밤에, 투덜거리면서도 늘 취한 자신을 살뜰하게 챙겨주던 친구 놈이 떠올라서, 그에게서 알았을 시은의 배려가 고마워서.


왜 안 마셔?


옆자리에 앉은 시은의 물음에 진원은 반사적으로 음료를 들이켰다. 용량의 반을 넘게 비워낸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대답 안 해. 녀석하고는 연락했냐고. 만났냐고.


…그런 일까지 저지른 사람한테 어떻게 그래. 겨우 진정해가고 있을 텐데 책임지지 못할 짓을 왜 해.


책임지지 못할 짓… 그 말은 정말 나와 녀석을 위해서만 그랬단 뜻이군. 아니 나보단 녀석을 위해서겠지. 불쌍해서.


……


내가 그 자식보다 못하다는 거야, 자기한테?


진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난 안 불쌍해? 3년이나 사귄 자기한테 만난 지 3개월밖에 안 된 그 새… 자식 때문에 파혼당하게 생겼는데. 그것도 내 반쪽 같은 놈 때문에.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렇더라도 안 되겠는 걸 어떡해. 아니 조금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안 되겠더라고. 말해야겠더라고. 자길 포기할 수 없다는 거 알았어, 술 마시다가… 갑자기. 내게 여자는 자기뿐이라는 걸, 다른 여잔 안고 싶지 않다는 걸, 내가 함께 하고픈 여자는 자기뿐이라는 걸 다시 확인했다고.


부끄러웠는지 앞유리만 바라보며 말하는 진원의 옆얼굴을 보며, 시은은 흔들리지 않으려 애썼다.


그러니 내 곁에 있어줘. 내게 미안하다면 그렇게 해줘.


진원이 반지가 끼워진 시은의 왼손 위에 역시 같은 모양의 반지가 반짝이는 양손을 얹으며, 고요히 애원했다. 온힘을 다해 눈물을 삼킨 시은이 오른손으로 진원의 손을 떼어놓았다.


내가 물러나는 게 맞다는 생각은 변함없어. 그래도 나도 마음이 편하진 않았어. 솔직히 후회도 했어. 어쩌면 그래놓곤 자기가 붙잡아주길 바랐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래주길 바랐어. 그래서 지금 자길 위해서는 내가 독하게 마음먹고 뿌리쳐야 하는데, 아무리 술기운 때문이더라도 이렇게 쫓아와줘서, 자기가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염치없이 기뻐.


시은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도 나는 맨정신이니까 내가, 나까지 자기처럼 그러면 안 되겠지. 어쨌거나 자기 취했잖아. 술에 취하면 그럴 수도 있는 거야. 내가 냉큼 받아주면 자기 후회할지 몰라.


아니라니까.


그만 돌아가. 돌아가서 맨정신으로 다시 생각해봐.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야.


시은이 차문을 열려 하자 진원이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녀석을, 그래… 사랑하는 건지도 모르지. 이젠 나만 사랑하는 건 아니라고 했지.


진원이 비참한 심정을 다스리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이 마음 아파 시은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진원은 날 봐, 라고 강한 어조로 말했다. 시은이 그 말에 따랐다. 진원의 준수한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어느새 취기가 가신 또렷한 발음으로, 중간중간 힘들어하기는 했으나 꽤 차분히 말했다.


혹시라도 자기가 놈한테 갈 생각이라면, 그 녀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거라면, 자기가 아니라 내가 물러나야겠지. 차라리 둘이 야반도주라도 한다면 축하는 못해도 포기는 하겠지. 깨끗이 승복하겠… 해야겠지. 근데 그게 아니잖아. 그렇다면 자기 말대로 어머님 생각해서라도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자기야말로 충동적으로 성급하게 결정해버린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아직 말도 못하고 반지도 그대로 끼고 있는 거잖아.


…말했잖아. 난 비겁하다고. 할 수만 있다면 어디 무인도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어. 아니 그냥 이대로, 사라져버리고 싶어. 근데 그럴 수 없잖아. 시간에 기대는 것 외에, 그저 버티는 것 외에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어. 자길 포기하는 게 나한테 쉬운 일 같아? 자기보다 나한테 더 큰 상처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 조건만 말하는 게 아니야… 내가 가장 많이, 오랫동안 사랑한 남자가 자기라고!


시은이 목소리를 높였으나 진원은 싱긋 웃었다. 그는 다시금 그녀의 왼손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그래, 나도 그래. 그래서 이렇게 내가 왔잖아. 자기 없이 살 수 없어서, 살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왔잖아.


그러나 시은은 그새 냉정함을 되찾았다.


…안 돼. 어쨌든 지금 당장은 안 돼. 술에 기대지 말고,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잘 생각해봐. 대리 불러.


시은아…


자기 가는 거 보고 들어갈 거니까 얼른. …내가 해?


진원은 결국 한숨을 쉬며 시은의 말대로 했다. 자동차가 떠나기 무섭게 집으로 향하는 시은의 모습을 사이드미러로 본 진원은 눈가에 팔을 얹었다.


혹시라도 그가 볼까 봐 등을 세워 걸어가는 시은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건물 안에 들어갈 때까지 시은은 얼굴에 손도 대지 않았다.


아직도 화해 안 했냐?


시은이 집에 돌아왔을 땐 어머니 한여사가 식탁에 앉아 딸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아버지처럼 입에 자물쇠를 걸면 좀처럼 열리지 않아 세상 답답한 딸자식보다는 사근사근한 진원을 다그치면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아무리 사위도 자식이라 해도 아직은 식전이라 한여사는 차마 친자식을 닦달하듯 할 수도 없어 속만 끓이고 있던 중이었다. 그래도 사윗감이 한밤중에 또 달려온 것을 보면, 그가 딸에게 사과하고 달래었을 것 같아 한여사는 그나마 안도했다. 그런데 나갔다 돌아온 시은의 얼굴은 집 밖에 나갔다 돌아온 그날밤처럼 엉망이어서 한여사는 다시 속을 태워야 했다.


혹시 안사둔이 뭐라 하셨냐? 혼수나 예단, 성에 안 찬대? 뭘 좀 더 해오래냐?


사람들에게 딸의 결혼을 자랑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자랑이 도가 지나쳤던지 몇몇은 너무 기우는 혼사 아니냐며, 하다못해 사윗감 아니면 사돈댁 차라도 바꿔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걱정 또는 시샘 섞인 지적을 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짐짓 콧방귀를 뀌었지만 마음 한구석 찜찜했던 한여사는 쌈짓돈으로 갖고 있으라고 한 딸내미 돈까지 박박 긁어모아 사돈댁에 운이라도 띄워야 하는 게 아닐까 언니들의 조언을 구했다.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나무라는 남편과는 달리 뜨뜻미지근한 반응이 나오자 한여사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시은은 뜬금없이 시가까지 혼자 다녀왔고, 진원은 답지 않게 무려 처가에서 시은에게 고함치며 화를 냈고, 그에게 울며 쫓아갔던 딸은 괜찮아지는 듯하더니 나날이 여위어만 가고 있었다. 진원이 전화로 시은의 안부를 물어오긴 했으나 목소리가 가라앉은 것이 둘이 싸워도 보통 크게 싸운 게 아니었다. 예식을 불과 두 달 남짓 앞둔 혼주의 속은 타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혹시 인사 한 번으로는 안 된다고 가끔씩이라도 교회에 나오래?


며칠 동안 머리를 싸매고 궁리했을 것이 분명한 어머니의 물음에 그 딸은 아무 말도 못했다.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효자 노릇을 하려는 아들놈들이야 예나 지금이나 종종 있으니 김서방이 그 중 하나라고 해도 아쉬울지언정 그렇게 심하게 다툴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었다. 돈이야 어떻게든 마련하면 되고 교회도 몇 번 나가다가 아이가 생기면 그를 핑계로 그만두면 될 일이었다. 한여사는 그게 뭐 그리 큰일이냐고 속 좁은 딸을 나무랄 요량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딸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기만 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라거나 별일 아니야, 따위의 불퉁한 대답을 예상하고 혼낼 준비를 하고 있던 한여사는 적잖이 당황했다.


…조금… 조금만 더… 있다가 얘기할게. 미안해, 엄마…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얼굴을 한 딸을 차마 다그칠 수 없었던 한여사는 그대로 서 있다가 이윽고 잠깐 비치적거리며 안방으로 돌아갔다.


우리가 알아야 할 일이면 말하고, 아니면 말겠지. 왜 사서 맘고생이야.


등을 돌린 채 누운 채로 남편이 소곤대자 한여사는 나도 그렇게 태평할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고만, 중얼거리며 이불 위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녀의 걱정은 불과 며칠 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최악의 형태로써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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