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시절 요한이 처음으로 가출사건을 일으켰던 때 이후 처음으로, 본인이 기억하는 한 태어나 두 번째로, 진원은 퍽 아팠다.
그러나 고학력 전문직에 종사하는 1인가구로서 자기관리에도 충실한 그는 바로 병원을 찾아가 수액치료까지 받았기에, 그때처럼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가 자신의 몸상태를 알린 가까운 이는, 요한과의 일로 또다시 연락해온 여동생 하랑뿐이었다.
통화상으로도 병색이 완연한, 하나뿐인 친동기의 목소리에 하랑은 손위 오라비를 다그쳤고 곧바로 달려왔다. 진원은 시은도 몸살이 난 터라 알리지 않았다고 둘러댔다.
진원은 시은이나 요한과의 일에 대한 최종결정을 보류하고 있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충격으로 몸까지 고장난 상태에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기는 불가능하므로, 일단 육신의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명분을 앞세워서.
터울이 많이 지는 남매는 오빠의 신혼집에서 그렇게 두 번째로 만났다. 이번에는 거실이 아니라 신혼부부의 침실이 될 장소에서였고 환자가 요한이 아니라 진원이라는 점이 달랐다.
오빠 결혼식 앞두고 무리하는 것 같다고 엄마가 걱정하시더니 결국 이렇게 됐네. 거기다 시은 언니도 아프다니 이게 무슨 일이야…
…너만 알고 있어야 하는 거 말 안 해도 알지?
응. 근데 요한 오빤 알지? 혹시 모르니 같이 있지 오빠.
…새벽에야 퇴근하는데 뭐하러.
왜, 한이 오빠 아플 때도 여기서 같이 지냈잖아. 이번엔 오빠가 아프니까…
됐다니까.
진원이 그답지 않게 언성을 높이자 하랑은 당황했다. 혹시 자신의 요한에 대한 연정 때문에 요한에게 화가 난 건가 싶어 하랑은 주눅이 들었다.
…오빠도 반대하는 거야?
어느새 눈가를 붉히며 하랑이 묻자 진원은 불쑥 부아가 치밀었다.
너야말로, 내 핑계로 그 자식 보려는 건 아니고?
하랑이 부정도 못하고 얼굴만 붉히자 진원은 아무것도 모르는 누이가 안타까웠다. 그렇게 순진한 여동생의 마음마저 가져가버린 요한에게 화가 났다가 병원에서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겨우 화를 누그러뜨렸다. 그러면서 요한의 사고 소식에 마침내 그를 포기했다는 연주처럼 하랑도 그러지 않을까 진원은 잠시 기대했다가 또다시 성급한 오류를 저지를까 봐 그만두었다.
언제부터였는데.
진원이 나지막이 물었다.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그 녀석.
…오빠들 군대 처음 면회 갔을 때…
진원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면 하랑이 짝사랑해온 시간은 무려 10년이었다.
하지만 너, 최근엔 소개팅 열심히 한다고 했잖아. 거짓말이었어?
…아니야. 한이 오빠 만나러 왔던 날도 소개팅하고 온 거 맞아.
그럼 마음 접으려고 했던 거네. 그치?
그거야 한이 오빠가 자꾸 날 피하고…
그래, 그게 맞다.
진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하랑을 포기시켜야 하는 점은 변함없었고 이렇게 따로 둘이 만나기도 쉽지 않으니 쇠뿔도 단 김에 뺄 셈이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던 거는… 도와달란 말이 아니라 나를, 녀석을 친형제처럼 여긴다는 내 마음을 떠보려고 그런 거였어. 다른 일로 좀… 심하게 싸웠거든. 그러면서 한 말이었어. 좋아하는 여자… 따로 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진원은 시은이 떠올라 괴로웠지만 가까스로 떨쳐버리고 여동생의 반응에 집중했다.
…정말이야?
그래. 진지하게.
대답하면서 진원은 고통스러워 주먹을 꽉 쥐었다.
솔직히 말해 나도 쌍수들고 환영은 못하겠다. 근데 너도 인정했잖아. 시은이가… 네가 아깝다고, 나나 부모님은 더할 거라고 한 거. 더구나 쌍방통행도 아닌 다음에야 네가 스톱하는 게 맞지. 어차피 너도 포기할 생각이었던 거 같으니 이참에 확실히 정리했으면 좋겠다. 혹시라도 어머니 아시기 전에.
아마도 하랑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워할 사람을 방패막이로 삼는 것은 비겁한 일이었으나 진원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피붙이의 앞날이 양심의 작은 조각보다 훨씬 더 중요했다.
…확인해볼래.
하랑이 울지도 않고 말했다.
연락도 안 되는데 어떻게.
진원이 차분히 지적했다.
병원을 떠나온 뒤로는 태수와도 이틀째 연락하지 않았지만 요한이 아직은 퇴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퇴원했더라도 아마도 태수나 연주모의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옴짝달싹못하리라. 그래서 시은에게 연락하거나 갈 수도 없을 테고 시은 역시, 태수에게라면 몰라도 요한에게는 접촉하지 않을 것이라고 진원은 생각했다. 그런 까닭에 시은의 이별통고에도 불구하고 진원은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바에 갈 거야.
…오늘까지 여름휴가야. 그리고 직접 확인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마음만 더 아프지. 자존심도 안 상해?
진원이 한숨을 쉬었다.
너랑 동갑인 어느 부잣집 여자애가, 부모님까지 동원해서 요한이랑 결혼하겠다고 엄청 쫓아다니고 괴롭혔나 보더라. 그래서 녀석도 지금 상태가 말이 아니야. 너까지 안 그랬으면 좋겠다. 나도 일단은 가게 사장님께 맡기고 물러나 있기로 했어.
상태가 말이 아니라니… 한이 오빠 또 아파?
…스트레스가 심했겠지. 그냥 조용히 쉬게 해주는 게 좋겠대서 나도 그러고 있다고.
당장에라도 나갈 듯 일어섰던 하랑이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 여자애뿐이 아니라 그런, 여자들과 얽힌 일들이 꽤 있었다. 내가 환영 못하는 이유는 그런 탓도 커.
…시은 언니도 알아?
또다시 나온 약혼녀의 이름에 진원은 움찔했다.
뭘.
오빠 여자 문제… 언니도 아냐고.
…대충은. 왜.
오빠가… 엄마가 언니한테 자기 안 좋은 얘기 할까 봐 걱정된다고 자기가 먼저 엄마 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면서 나한테 엄마랑 언니 만나는 시간과 장소 알려달라고 했었어. 언니가 그런 거 때문에 한이 오빠 불편해서 그런 거였구나.
…네가, 어머니와 시은이 만나는 일정과 장소를, 그 자식한테 알려줬단 소리야?
응. 오빠가 나한테 전화한 건 그게 처음이었어.
……
진원은 다시금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약혼녀를 쫓아가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을 이용한 요한에게 또다시 분노가 솟았기 때문이었다. 요한에 대한 애증으로 진원은 미칠 지경이었다.
감정의 동요 탓인지 진원은 심한 두통을 느꼈다. 눈치챈 하랑이 가져다준 진통제를 먹고 진원은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언닌 얼마나 아픈데. 오빠보다 심해?
왜.
한이 오빠 아플 때도 있던 사람이 막상 오빠가 아픈데 없으니까 이상해서.
…말 안 했다니까. 괜히 연락하지 마라. 하면 너 시누이 노릇하는 거다. 너 그런 애 아니잖아.
오빠가 그러니까 엄마가 서운해하시는 거야. 난 괜찮지만 엄마한텐 그러지 마.
혹시라도 정말 시은과 끝이 나고 그 이유를 어머니가 알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진원은 차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상상을 하지 않았을 리 없는 시은이 결별을 말했을 때는 보통 결심이 아님도 알겠기에 진원은 머리가 더욱 아파왔다.
…이제 그만 가라. 그리고 얼른 내려가. 본가에 있는 게 마음 다스리는 데 낫잖아. 딸바보 우리 아버지어머니 목빠지시겠다.
오빠야말로 좀 내려가지. 시은 언니 만나면서 더 안 내려온다고 엄마 엄청 서운해하셨어.
아이고 우리 순둥이 김하랑 양이 오늘따라 왜 이리 잔소리가 심하신가. 나야 중2 때부터 이미 불효자였는데 이제 와서…
진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이 어머니께 불효자가 되게 만든 요한 때문에 자신은 파혼자가 될지도 모르게 된 상황이 기막혀서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진원은 어머니가 내 그럴 줄 알았다고 큰소리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편견에 사로잡힌 어머니가 또다른 근거를 얻게 되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우연의 일치로 치부하기에 요한의 행적은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는 그 부모를 섬뜩하리만치 닮지 않았는가. 아니, 적어도 그 부친이 임자 있는 여자와 일을 저질렀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었다. 그 모친 역시 눈맞은 상대가 그렇다는 말 역시 듣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면 정여사가 흉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나마 어머니가 근심했던 하랑의 일만이 요한은 무죄였다.
잔뜩 풀이 죽어 돌아가는 하랑을 엘리베이터까지 배웅하고 돌아온 진원은 진통제의 효과로 두통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서둘러 병원을 찾은 덕인지 무거웠던 몸도 약간은 가뿐해진 것 같아서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진원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면서도 끝끝내 헤어짐을 고집하던 시은을 생각했다.
시은은 신중하다 못해 답답한 구석이 있는 성격이었다. 빈말도 할 줄 몰랐다. 진원은 그 어떤 때보다도 그 어떤 여자에게보다도 적극적으로 구애했음에도 가장 소극적으로 반응했었던 시은을 떠올렸다. 이른바 ‘밀당’이라기보다는 실제로 경계하던, 평범한 나한테 댁 같은 잘난 남자가 대체 왜요? 대놓고 묻던 그녀를, 그래서 당황해하면서도 그런 그녀가 신선하고 귀엽다고 생각했던 자신을 기억했다.
그런 시은과 교제하는 것은 물론이고 육체관계를 맺는 것도 녹록지 않았으나 오히려 진원은 그게 더 마음에 들었었다. 다른 남자들에게도 그랬겠다 싶어서였다. 최대 2년 정도만 사귀었다는 전의 남자친구들 몇 명과 많지도 않게 관계하고, 내게 그러듯 위생과 콘돔을 강조했겠지. 남편과만 도구 없이 사랑하겠지. 물론 좀스러운 것 같아 진원은 구태여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반면 진원은 상대와의 합의 하이긴 했지만 피임도구를 사용하지 않은 적이 더러 있었고 그래서 여자가 임신했을까 봐 마음 졸인 적도 있었다. 호기심에 원나이트스탠드를 한 적도 있었다. 시은은 성매매나 성폭행만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아이를 지우게 했거나 어딘가 아이가 자라고 있는 것만 아니라면, 그리고 지저분한 병만 없다면 지난날이야 상관없다고 무심히 대답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은이 마음을 여는 것이 진원의 눈에 확실하게 보였다. 애정표현은 여전히 수동적이었으나 그녀의 눈빛에는 분명 사랑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그러더니 결혼을 약속하고 나서는 취한 자신에게 한밤중에 한걸음에 달려와주었고, 그 다음날에는 전에 없던 깜짝방문까지 하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잠자리에 임하지 않았던가. 너무도 격렬했던 나머지 진원은 피임에 문제가 생겼을까 잠깐 걱정했었고, 이러다 둘만의 달콤한 신혼은 물 건너가는 것은 아닌가 행복에 겨운 염려까지 했더랬다.
진원은 쓰게 웃었다. 그 모든 것들이 무위로 돌아갈 위험에 처해 있는 현재가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토록 느릿느릿 자신에게 열었던 마음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요한에게 줘버렸다는 시은의 말이 진원의 심장을 아프게 헤집었다.
마침내 시은의 마음을 얻었지만 여전히 자신만큼 사랑하지 않는다고는 진원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결혼하여 함께 살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언젠가는 그 사랑의 크기가 비슷해질 것이라 기대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진원은 감내할 것을 다짐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크기는 몰라도 그 지속력은 오히려 시은이 더 강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시은이 지나가듯 자신에 대한 염려나 신뢰의 말을 할 때나 정여사의 서운함을 이해하는 말을 할 때 같은 때 종종 했기 때문이었다.
요한이 하듯 잔소리를 하면서도 정성껏 밥을 해주고 청소를 해주지는 않았지만, 대신 시은은 등을 토닥여주고 머리칼을 쓰다듬어주고 지친 머리를 기대게 해주었다. 우습게도 두 사람에게서 진원은 스스로 거부한 면도 있었으나 어쨌든 부족했던 모정을 보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욱 강해지고 따뜻해졌다. 그는 그 두 사람을 가진 자신을 세상에 둘도 없는 행운아라 여기고 그들을 더욱 사랑하고 잘하겠다고 툭하면 다짐했었다. 그 둘이 있어서 세상에 부러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었다.
진원은 자신이 그 두 사람으로 인해 강해졌지만 그들로 인해 약해질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그 둘을 사랑하여 행복했으나 그 사랑으로 인해 불행해질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둘을, 그 둘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사랑했음을 새삼 확인했다.
그리하여 진원은 홀로이 서럽게 울었다.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을 실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