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병원에서 이틀밤을 보내고 퇴원했다. 연주모는 그곳에서 가까운 호텔 한 곳의 트윈룸에서 수행원 두 명이 번갈아가며 보호를 가장한 24시간 감시를 하게 했다. 덕분에 태수는 한시름 놓고 영업에 집중할 수 있었으나 요한은 흡연 때를 제외하면 바깥공기를 쐬기조차 힘든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요한은 끽소리 한 번을 못했다. 너 잘못되면 나도 죽을 거다, 두 번이나 그 꼴은 못 본다, 차라리 날 죽여라, 아이처럼 드러누워 발버둥치는 태수를 달래다가 요한은 숨이 막히도록 그에게 끌어안겼었던 것이다. 잘못했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요한은 맹세했다. 물론 작업을 시작하기 직전에야 조각도구의 날카로움을 세상 여유롭게 되살리던 민선생의 느긋함을 망각한 자신을 속으로 탓하기야 했지만.
와, 나한테 두 번이나 빚졌어요. 아니 빚진 정도가 아니라 내가 생명의 은인인 거 아니에요? 나 이제 정말 요한 씨 누드 그려야겠는데요.
무채색의 후드티에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는 질끈 묶은 위에 야구모자를 눌러쓰고 다니던 민선생은 세팅한 머리칼에 깔끔한 블라우스를 차려입고 제법 큰 꽃다발까지 사들고서는 병문안을 왔다. 태수는 그녀와 동반자 1인에게 유효기한 없는 무료 칵테일 제공을 그녀의 두 손을 붙들고 약속했으나 민선생은 웃으며 그보다는 요한을 모델로 삼는 게 더 좋다고 했다.
태수는 요한을 기절시켜서라도 반드시 그렇게 하겠다고, 정히 안 되면 나라도 벗어제끼겠다고 큰소리쳤다. 민선생이 민망해하자 그는 왜요, 이래 봬도 고등학교 때 여장대회에서 1등도 한 몸이고만!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포즈까지 취하여 마침 병실에 함께 있던 지수까지 배꼽을 잡게 만들었다.
요한은 큭큭대면서도 눈물이 났다. 삶의 종결에 실패한 대가로 얻은 웃음 한 조각이 서럽고, 서러운 만큼 소중하고, 소중한 만큼 또 구차했다. 그렇게 모순적이고 복잡미묘한 감정에는 연주모가 딸과 자신의 지난날을 사과하며 대신 친모를 꼭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것과 자신의 다짐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시은과 맺어지게 도와주겠다는 연주의 말도 영향을 끼쳤다.
엄마 말이 맞아. 오빠가 한 여자한테 정착해야 내가 포기할 수 있을 거야, 완전히.
연주가 퉁퉁 부은 얼굴로 애써 웃으며 말하자 요한은 마음이 아팠다. 분명 연주모녀의 협박이 그를 극단으로 모는 데 일조했지만 절대적이지는 않았다. 요한이 가장 혐오하는 존재는 자기자신이었으므로.
미안하다… 나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었으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했어. 하지만 역시 안 되겠더라.
괜한 위로하지 마. 내가 또 매달리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고맙다. 근데 시은 씨 일은… 나서지 마. 네가 나설 일 아니야. 나랑 오빠동생이라도 하고 싶으면, 말 들어.
연주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갈등하고 있다는 것을 요한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진원마저 앞으로 보지 못할 것까지도 각오했으나 연주는 아직 그런 다짐까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은 그저 연주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 아이는 이제 겨우 스물이었다. 하늘의 별도 따다줄 것 같은 재력과 기세의 모친도 있었다.
요한은 자신의 사고를 전해들었다는 시은의 동정심에 또다시 기대볼까 하다가, 이내 그녀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비겁하고 유약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들었다. 더구나 진원마저 병원에 찾아왔었다는 말을 전해듣자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 착한 녀석은 더 나를 놓지 못하겠구나. 그렇다면 나는 시은을 포기할 수밖에 없겠구나. 앞으로 그녀를 보지 못하겠구나… 마음의 준비를 해온 일이었으므로 요한은 담배연기만으로도 슬픔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었다.
이제 요한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것은 오랫동안 실종상태나 다름없는 친모였다. 요한은 당장이라도 전국 곳곳을 뒤지고 싶었다.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들은 기억이 없는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작은 집을 얻어 단 둘이 살고 싶었다. 그동안 받지 못한 모정을 넘치게 받고, 그동안 하지 못한 효도를 몰아서 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시은은 물론이고 진원조차 더는 필요 없을지도 몰랐다.
요한은 호텔에서 지낸 지 사흘 만에 바에 복귀했다. 그곳에서는 연주와 지수가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겠다는 전제 하에서였다. 지수는 자신에게 따귀까지 맞은 연주가 오히려 사과하며 복귀를 간청하자 그를 수락했던 것이다. 요한은 그 둘에게 잘 기억나지도 않는 엄마 얘기를 하며 초조함을 달랬다.
한편 건강을 회복한 진원은 태수에게서 요한의 그런 상태를, 시은모에게서는 그 딸 역시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으며 마음을 추스르려 애썼다. 요한과 시은, 두 사람 또한 제각기 생각할 시간과 평정심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하다 판단한 그는 다시 일에 매달렸다. 시은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누르기 위해 일부러 야근을 하고 회사 근처 바에서 간단히 술잔을 기울인 뒤 집에 가서는 바로 잠을 청했다. 그는 그동안 소홀했던 운동에도 열을 올렸다.
시은 역시 진원과 요한은 물론이고 태수나 연주에게도 연락하지 않은 채 시간을 보내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여름휴가를 떠나는 직장동료들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일했다. 그들의 시답잖은 수다에 끼어들기도 하고, 그동안 연차를 많이 써서 미안하다며 비싼 밥에 커피까지 쐈다. 아직은 부모님께 말할 자신도 없어서 그저 다퉜다고만 꾸며댄 채였다. 그래서 그녀의 왼손 약지에는 진원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커플링이 끼워져 있었다.
사랑하는 정인과 가엾은 그 친구를 위하여, 그 둘의 오랜 관계를 지켜주기 위하여 자신이 그 삼각관계에서 물러나기로 마침내 결심했지만, 막상 진원에게마저 연락이 없자 시은은 애가 탔다. 그동안 싸운 적도 거의 없었지만 그렇더라도 그 자리에서, 십중팔구는 진원이 사과하여 단 하루도 연락이 끊어진 적이 없었던 것을 시은은 기억해냈다. 부러 무음으로 설정한 전화기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두면서, 시은은 어쩌면 자신이 진원을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한 오기와 자존심을 부린 건 아닌지, 성급했던 건 아닌지,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 되새겼다.
자신보다 좋은 여자를 만나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지만, 정말 진원을 다른 여자에게 줄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시은은 목이 탔다. 요한이 연주든 누구든, 하랑만 아닌 다른 여자에게 가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시은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진원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다정한 그는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고 다시 받아달라고 하면 그래줄 사람이므로. 그에게 헤어질 명분을 확실히 주어야 한다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그에게 줄 수 있는 배려라고 생각하며 시은은 또다시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그런 시은을 집밖으로 불러낸 것은 하랑이었다.
- 언니, 확인할 게 있어요. 죄송하지만 만나주세요.
평소와 달리 단도직입적인 메시지를 읽고 시은은 하랑도 알아버렸음을 직감하고 죄인이 된 기분으로 전에 그녀를 만났던 집 앞 카페로 나갔다. 예상대로 하랑은 화난 얼굴이었다. 그럼에도 교양 있는 아가씨답게 그녀는 시은을 보자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시은이 자리에 앉고 난 뒤에야 착석했다.
오빠한테 바로 가려다가 그래도 언니 말도 들어봐야 할 거 같아서 왔어요.
…진원 씨한테 들은 게 아니에요?
하랑은 답하지 않았다.
친오빠의 말을 듣고 고민 끝에 바에 찾아가 태수에게서 요한이 있는 호텔을 알아내어 만나러 가서, 진원에게서 다 듣고 왔다는 자신의 말에 당황한 요한이 제풀에 시은을 말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당사자에게 털어놓는 것을 하랑은 망설였다. 내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야. 난 미친놈이니까. 그 사람은… 아니야. 그러니까 너도 나 같은 놈은 얼른 잊어버려. 우는 자신을 달래기는커녕 외면하며 차갑게 뇌까리던 요한의 모습이 떠오르자 다시 눈물이 나려 해서, 하랑은 차가운 음료를 급히 들이마셨다.
시은은 당황했다. 요한 스스로가 진원 남매 모두에게 실토했다는 뜻 아닌가. 설마 진원이 요한에게 달려가 우리의 이별을 말했을까. 그를 놓지 못하겠다고 했었는데 충격을 못 이기고 요한에게 화풀이를 한 걸까. 그러나 괜한 말실수를 할까 봐 시은은 하랑의 질문공세를 잠자코 기다렸다.
…오빠, 원이 오빠도 꽤 아팠었어요. 나한텐 언니 걱정할까 봐 말 안 했다고 했는데, 왜 그랬는지, 왜 갑자기 아팠는지도 알겠네요. 그리고 언니도 몸이 안 좋았다고 하더니 그것도 알겠구요.
오빠들은 물론이고 이젠 시은까지 얼굴이 상한 꼴을 보고 있자니 하랑은 마음이 아팠다. 따지고 보면 연적이라 할 수 있을 상대였지만 시은은 아직 하랑에게 예비 올케언니였다. 요한이 일방적인 마음이라고 했고 진원은 아예 말조차 꺼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형제 같은 두 남자 사이에서 언니도 힘들었겠구나… 하랑은 시은에게 시샘보다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러나 하랑은 친오빠가 앓아누운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했으므로 시은의 얼굴에 이는 동요의 이유 역시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헤어짐을 말했던 그날, 어느새 어두워진 거실 소파에서 고개를 떨군 채 앉아 있던 진원을 뒤로하고 떠나오면서 시은은 그가 자신을 붙잡을까 걱정하고 또 붙잡지 않을까도 염려했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두 사람에게서 가장 커다란 마음의 상처를 입은 진원이 몸까지 아플 것은 생각도 못한 것이 시은은 부끄럽고 미안했다. 얼마나 아팠길래 한참 어린 여동생에게 알렸을까, 시은은 목구멍이 더워졌다.
오빠가… 엄마 만나러 내려간 언닐 쫓아갔다고 했어요. 언니는 아닌데 오빠가 일방적으로 그런 거라고… 그 말 맞는 거죠?
하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시은은 눈물을 닦고 그녀를 보았다. 그랬으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거예요, 시은은 겨우 그 말을 삼켰다.
…진원 씨가 말 안 했군요. 내가 헤어지자고 했어요.
그럼 언니, 언니도…?! 아니 그럼 한이 오빠 말은…
날 위해서 그래주는 거예요. 실망시켜서 미안해요.
하랑이 벌떡 일어섰다.
설마, 설마 한이 오빠한테 가겠다는 거예요, 오빨 버리고?!
경악하는 하랑의 표정에서 그 오빠의 얼굴이 겹쳐졌다. 시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그럴 배짱도 없어요. 겁쟁이거든요. 오빠… 하랑 씨가 잘 챙겨줘요.
힘없이 걸어나가는 시은의 뒷모습을 하랑은 그저 바라보다가 다시 의자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하랑이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어올렸다.
- 어, 하랑아.
진원의 목소리를 듣자 하랑은 목이 메었다.
퇴근했어?
- 아니. 넌 어딘데. 아직 서울이야? 왜 말 안 듣고…
바보.
진원은 말문이 막혔다.
오빠 바보야? 아니 우리 둘 다 바보네… 바보 남매야.
- …너 어디야.
진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고 그는 곧 여동생이 있는 곳으로 왔다. 막상 대면하고서는 그저 서럽게 울기만 하는 누이의 머리를 안아주며 진원은 참담했다. 과연 일을 수습할 수 있을지, 꼬여만가는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 난 하랑은 요한과 시은을 만난 일을 털어놓으며 진원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물었다.
솔직히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것만 알아. 우리 둘, 아니 셋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한 것만 알아. 그리고 너랑 요한인 안 된다는 거랑, 이 모든 일… 부모님은, 아직은, 확실해질 때까지는 모르셔야 한다는 것만 알아. 그러니 부탁한다.
진원의 고요한 간청을 들으며 하랑은 자신의 실연따위는 아무것도 아닐 그의 비통을 느꼈다. 자주 보지는 못했어도 늘 햇살같이 웃어주던 오빠의 얼굴에 드리워진 깊은 그늘이 마음 아파 하랑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틀 후인 토요일에 하랑은 마침내 본가에 내려갔고, 진원은 누이를 기차역까지 데려다주었다. 오누이의 슬픈 비밀을 부모님께는 함구할 것을 다시 약속하고 하랑은 눈물을 뿌리며 열차에 올랐다.
그로부터 엿새 후 늦은 밤, 진원은 시은에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