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는 길에 진원은 시은에게 전화해 만나서 얘기하자고 제안했고, 그녀를 태워 신혼집에 데려갔다.
진원은 말없이 시은을 부축하고 자동차 문을 열어주었고, 시은 역시 말이 없었다. 도착해서도 진원은 똑같이 시은에게 해주었으나 시은은 여전히 고맙다고 하지 않았다. 진원은 어딘가 냉랭해진 시은을 느꼈지만 말하지 않았다.
마실 거 좀 줄까.
집에 도착하여 시은을 소파에 앉힌 후 진원이 냉장고를 열며 묻자 시은은 실온의 물, 이라고 조용히 답했다. 진원은 주방 옆 다용도실에서 생수통을 가져와 머그잔에 물을 따르고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통과 함께 소파로 돌아왔다.
그에게서 물잔을 받으며 시은이 물었다.
병원 다녀온 거야?
응.
그 사람… 어때. 얼굴 봤어? 얘기했어?
…괜찮대. 잠들어서 얼굴만 봤어. 괜찮은 거 같았어.
진원은 요한의 친모 이야기를 듣고 난 뒤 마음을 바꿔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함께 병실에 있던 태수와 지수가 생각보다 친밀해 보이자 문득 소외감을 느꼈다. 자신만이 한참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답답해했던 것도 기억났다. 그는 지수에게 목례하고는 병실을 떠나왔다.
나 보면 괜히 또 흥분할까 봐 걱정돼서 그냥 왔어. 자기도 그래서 안 간 거 아니야? 가고 싶었던 거 아니야?
…무슨 대답이 듣고 싶어.
시은의 목소리에서 다시금 차가움이 느껴졌으므로 진원은 그녀 옆에 약간 떨어져서 앉았다.
자기가 그랬지. 형님이 모른 척해달라고 했지만 나도 알아야 할 거 같아서 말한다고. 요한이가 나한테 한 말들을 정리하는 데 필요한 정보일 거라 생각했다고. 이것까지 알아야 제대로 정리할 수 있을 거라고.
응.
자기 말이 맞았어. 근데 또다른 정보도 얻었지.
무슨…
요한이가 자기를 해한 일… 혹시라도 자기가 자책할까 봐 말하는 거야. 아니 자책이야 하겠지만, 그 정도에는 분명 영향을 끼칠 정보여서. 요한이가 연주 어머니한테서 생모 소식을 듣고서 충격이 컸던 거 같아.
……
어머니께 들었을지 모르겠네. 요한이 어머니가, 살인죄로 복역했단 거 말이야.
…응.
역시. 근데 연주 어머니가 요한 어머니 행방을 알려줄 테니 연주와 결혼하라고 압박하다가… 요한이가 모르는 줄 모르고 실언했나 봐. 나나 형님도 깜짝 놀랐는데 당사자는 더했겠지. 더구나 출소 후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니 아무래도… 그렇잖아. 그 얘길 들은 직후에, 아마 마음을 달래러 화실에 간 거 같은데 거기선 또… 우리 결혼선물로 주려던 그림을 보고… 일을 저지른 거야. 아마 정말로 죽을 생각은 아니었을 거라고 형님이 그러시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니 자기도 조금은 마음의 짐 내려놓으라고.
시은이 넋이 나간 듯 있자 진원은 그녀에게 다가앉으며 어깨를 감싸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시은은 소파 끝으로 옮겨 앉았다.
…어제 일 때문에 그래? 불편하면 주방으로 옮길까? 아, 아예 밖으로 나갈래?
아니야. 그 일은 괜찮다고 했잖아.
그럼… 왜 그러는 건데?
진원이 서운함을 누르며 부드럽게 물었으나 시은은 입술을 깨물며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기야…
그만해, 우리.
시은이 진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헤어지자고.
진원은 예상치 못한 말에 당황했다.
그는 이미 시은을 이해하고 용서했다.
시작은 분명 요한이었다. 시은은 그를 거부하려 했고 그의 미모와 슬픈 사연에 흔들리지 않으려 노력하지 않았던가. 보수적인 성향의 시은이었기에 그나마 입맞춤에서 멈춘 것이라고 진원은 내심 안도하고 있었다. 고향에서의 일 역시, 설령 호텔 방에 들어갔더라도 결국은 미수에 그쳤으리라는 기대를 진원은 경험적으로 충분히 품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 시은보다 요한이, 그의 와신상담을 방불케 하는 언행 때문에라도 훨씬 더 미웠는데, 그마저도 요한이 병원 신세를 지게 된 것과 그의 불행한 생모의 소식에 많은 부분 그 미움이 사라진 후였다.
태수의 충고대로 일단은 요한에게서 거리를 두고 시은과의 사이를 잘 봉합하여 결혼식을 무사히 치르는 데 집중하겠다고 진원은 결심했다. 웨딩마치를 울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집들이를 하다 보면 시간은 정신없이 흐를 테고, 세 사람 모두는 평정심을 되찾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때쯤엔 요한과의 관계 회복도 본격적으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라 진원은 기대했다.
물론 과연 언제쯤 다시 세 사람이 한자리에 있어도 불편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런 날은 끝내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이대로 요한을 놓아버릴 수 없는 자신을 진원은 병원에서 깨달았다. 자신의 심장에 박혀 있는 요한을 뽑아내면 자신 역시 피를 철철 흘리다 죽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자리는 결코 다른 친구로 메워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진원은 시은에게 그러한 마음을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시은 역시 요한의 소식에 충격받았을 테니 그녀의 양해를 구하는 것은 수월할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런데 시은은 뜻밖에 이별을 말하고 있지 않은가.
…어째서.
충격을 감춘 진원의 반응에 시은이 그를 빤히 보았다.
그 일은, 완벽히는 아니더라도, 일단락된 거잖아. 자기가 용서를 구했고 나도 이해한다는데. 아, 내가 확실히 말하진 않았구나. 지금 말할게. 내게 미안해서라면 난 괜찮아.
시은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요한이가… 그래, 워낙에 미모잖아. 더구나 가엾기까지 하니 착한 자기는 차마 떨칠 수 없었겠지. 녀석도… 잠깐 잘못 생각한 걸 거야. 결국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야. 그러니 괜찮다고.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시은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났다.
나까지 동정할 필요 없어.
그게 무슨 말이야.
…연주가 그러더라. 나한테 자기는 땡잡은 거라고. 그래, 그애 말이 맞지. 어느 쪽에 타격이 크겠어. 자기야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다른 여자, 나보다 훨씬 좋은 조건의 여자들 줄 세워 만나겠지. 반면에 난, 아니 그건 나중 일이고… 당장 그동안 들어간 돈은 어떡해. 울 엄마 통장 탈탈 털었을 텐데, 혼수랑 예단비랑 다 어떡하냐고… 엄말 생각하면 난, 자기가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자기한테 매달려 식장에 들어가야 하는 거잖아.
시은이 눈가를 거칠게 훔쳤다. 진원이 티슈를 건넸으나 그 역시 시은은 받지 않았다.
그래,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지 몰라. 그냥 눈 딱 감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해야 하는 건지 몰라. 자기 말대로 시간이 해결해줄지 몰라. 그래서 그냥 그러려고 했어. 난 비겁하니까.
시은아…
진원이 그녀에게 다가앉으며 이번엔 손을 잡으려 했으나 역시 거절당했다.
얼마나 힘들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 없어, 자길 잊는 데. 또 누군가를, 자기에 비할 만한 좋은 남잘 만날 자신은 더욱 없고. 그래도 어쨌든 난 버틸 수 있을 거야. 잘못되지 않아. 그러니 나까지 동정 말라고.
…아니야. 자기가 놈처럼 그럴까 봐 그러는 게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어. 자긴 요한이처럼 약하지 않잖아. 그럴 만한 사연도 없잖아. 멀쩡한 집안에서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잘 자랐잖아. 내가 자길 동정해야 할 이유가 뭐야.
시은이 다시 빤히 진원을 보았다. 진원은 웃어 보였다. 시은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필요해. 난 괜찮으니까, 난 놓아버리고 그 사람은 붙잡아줘. 너무 가엾잖아.
…그래, 가여운 녀석이지. 어떻게든 내가 돌봐주고 싶었던. 자기라면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내가 동생처럼 여기듯 자기도…
미안해.
…나도 미안해. 결국엔 내가 녀석을… 자기한테…
진원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시은도 울음 섞인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자기 말대로 워낙 눈에 띄는 사람이니까…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 사람 사연을 알고 나니 내가 할 수 있으면 손을 잡아주고 싶더라. 나도 약한 사람이니까… 나도 결핍이 있는 사람이니까… 지나치기 힘들었어. 자긴 다 가졌잖아. 엄친아잖아. 자긴 금방 나보다 더 좋은 여자 만나겠지만 나는… 또 그 사람은… 하지만 나 역시 그 사람을 구해주지는 못하겠지. 난 자기가 아니니까.
무슨 소리야.
자기 놓치기 싫어. 자기랑 남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어. 자기 꼭 닮은 아이도 갖고 싶어. 하지만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해?
…자기가 워낙 깐깐해서 그래. 시간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안 보면, 잊혀질 거야.
자기야말로 괜찮겠어? 날 보면, 생각나지 않겠어? 그 사람, 안 볼 수 있어?
진원이 슬프게 미소지었다.
더는, 언제까진지는 모르겠지만 한동안은 우리 셋이 다같이 볼 수 없고 너희 둘이 따로 만나는 것도 당연히 안 되지만, 그래, 나는 녀석, 못 버려. 강아지처럼 나만 졸졸 따라다니던 걸 난 잊을 수가 없어. 근데 그보다는… 내가 놈을 안 보고 살아갈 자신이 없어. 내가 훨씬 더 그 자식을 좋아하나 봐.
자기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는 자길 가질 자격이 없어… 자긴 좀 더 좋은 여잘 만나야 해. 자기가… 자기도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나처럼 유혹되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픔까지 보듬어줄 수 있는 누군가를.
시은아.
나까지 짐 되기 싫어. 이미 그 사람만으로 힘든 자기한테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아.
아니야. 내가 자길 얼마나 의지하는데. 자기의 그 까탈스러움이 나를 얼마나 붙잡아주는데. 내가 혹시라도 잘못하면 날 꾸짖어줄 거잖아. 내 양심이 되어줄 거잖아.
진원이 시은의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시은이 거부하지 않자 진원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애처로우면서도 믿음직스러웠다. 절친처럼 빈정거리고 도발하기는커녕, 눈물을 참지 못하면서 꾸역꾸역 자신은 괜찮다고 말하는 정혼녀가.
자기가 놈을 버리라고 했다면 난 오히려 실망했을 거야. 변명하면서 날 붙잡으려 했다면 의심했을 거야. 근데 자긴 외려 나더러 녀석을 돌봐주라고 하잖아. 그리고 나는 다른 여자에게 기대라고 하잖아. 날 놓치고 싶지 않다면서도 그러잖아.
…사랑하니까… 그리고 그 사람은 가엾고…
그래. 그건 나와 같은 마음이야. 녀석을, 설마 사랑해? 나에게처럼?
나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 그치만 이젠 더 이상 당당하게 자길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 사람 만나기 전과는 달라진 거야… 자기도 알잖아.
…선을 넘은 건 아니잖아.
말했잖아. 꿈에서는 여러 번, 그리고 현실에서도 그 호텔 앞에서는,
실제가 아니라니까.
자신 없어.
정말 헤어지자는 거야?
……
시은아.
그게 맞아.
진원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오늘 사고 때문에 자기 지금 너무 흥분한 상태 같아. 그래서 우리 일 때문만은 아니라고 굳이 다 말해준 건데, 아직은 시기상조였구나. 내가 성급했어.
내 생각은 달라.
시은이 진원에게서 손을 빼내며 말했다.
자기야말로 그 사고 때문에, 그리고 그 어머니 일 때문에 지금 당장은 또 동정심이 발동해서 그렇게 관대한 거야. 정말 용서할 수 있겠어? 아니 잊을 수 있겠어? 날 안을 때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내 모습 상상되지 않겠어? 자길 탓하는 게 아니야. 그게 당연하고 자연스럽단 뜻이야. 하지만 난 그걸 견딜 자신이 없어.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극단적으로만 생각하는 거야… 겨우 수습돼가고 있는데.
그러나 시은의 말 때문에 진원의 머릿속에서는 요한이 했던 자극적인 말들이 재생되고 있었다. 그로 인한 진원의 감정은, 명백히 질투였다.
어제 일,
시은이 일어서며 말했다.
자기가 아니라 나자신한테 화가 나. 자기가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그 사람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한테.
그만…
무엇보다 난, 그 사람은 저러고 있는데 자기랑 행복할 수가 없어… 어느새 그 사람이 내 안에, 자기만 있던 내 심장을 비집고 들어와버렸단 걸 알게 됐다고.
결국 두 사람은 같은 곳에서 또다시 울어야만 했다. 그러나 전날과 달리, 서로를 껴안은 대신 떨어진 채 각자의 얼굴을 가리고 숨조차 죽인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