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은은 잠시 멀거니 있다가 태수에게 전화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전화를 받았다.
- 네, 시은 씨.
사장님… 요한 씨 몸상태… 정말 괜찮나요?
- 아니 어떻게… 진원이한테도 일부러 안 알렸는데.
연주가…
- 아.
제가 가면… 안 되겠죠…
시은이 울먹였다. 태수가 크게 콧물을 들이마시고는 대답했다.
- …그래요. 오면 안 되지. 요한이가 진원이한테도 말하지 말랬는데 시은 씨한테는 더 알리고 싶지 않을 거예요. 생명에 지장은 없다니까 걱정 말고. …진원이가 시은 씨랑 얘기중이라고, 내가 듣기로는 그래도 괜찮은 거 같던데… 그래요?
네…
- 그나마 다행이네요. 결혼할 일만 생각해요. 그게 시은 씨 할 일이니까.
…무슨… 그 사람이 그럴 만한 무슨 일이 있었나요?
- …뭐 여러 이유가 있겠지. 시은 씨도 봐서 알겠지만 연주모녀가 또 불러다가… 아 연주가 밥도 안 먹고 울고불고하다가 입원까지 해서 불려갔었거든. 애가 그 모양이니 그 엄마가 또 요한이한테 압박한 모양이고 그 일 전에는 진원이가 또 찾아왔었는데 이번엔 주먹다짐을 좀 했던 거 같고. 많이는 아니고. 뭐 그 정도도 안 하면 사람인가… 진원이 말예요.
약혼자의 이야기에 시은은 더욱 숨이 막혀왔다.
- 내 이제 정말 단 한순간도 이 새끼한테서 눈 안 떼고 말 테니까. 시은 씨도 마음 단단히 먹어요. 설마하니 시은 씨한테 시위하려고 그랬겠어. 그럴 놈은 아니에요. 그냥…
태수는 입을 다물었다. 시은을 자극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기 때문이었다.
- 물론 아니겠지만 혹시 몰라 묻는데, 설마 시은 씨 요한이한테… 이놈하고 조금이라도… 아니죠? 호텔 앞에서 그랬던 거는… 그냥… 충동적으로,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런 거죠?
시은은 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한때의 욕정이기만 했으면. 그랬으면 진원에게 풀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요한의 다른 여자들처럼 그와 몸만 나누고 후안무치하게 진원을 속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그렇게 살 수 있는 나였다면 좋을 텐데, 그렇게까지 생각했던 것을 시은은 생각했다.
그러나 요한의 지난 세월을 알고 나자 그에 대한 측은지심은 더 강해졌고 그래서 그를 더 이상은 거부하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마음을 위안하기 위해 몸마저 주고 싶었다. 진원에 대한 마음과는 분명 다르지만, 어느새 요한도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태수의 물음에 시은은 확실히 알게 되었다.
- 어쩌면 진원이와도 연이 끊어지는 게 요한이 놈한테도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이런 일까지 일어나고 보니, 그러네요. 서로 얼굴 보기 얼마나 괴롭겠냐고. 요한이 놈도 그런 생각으로 진원이한테 모질게 구는 거 같단 말이야. 그래놓고는 지도 괴로워서… 아마도.
태수의 말에 시은은 눈물이 솟았다.
요한은 그랬다. 자신에게도 진원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고서는, 그토록 태연하고 초연하게 말해놓고서는, 폭주하여 병까지 났었지 않은가. 그의 곱디고운 육신에 깃든 정신적 그늘은 그렇게 극심한 자기파괴를 야기하고 마는 것이다. 차라리 내가, 연주 말대로 내가 그를 구해줄 수 있다면. 그럴 힘이 내게 있다면.
그러나 시은은 그럴 수 없는 스스로를 잘 알았다. 제 한 몸 하나 건사하기도 버거운 주제에 감히 누굴 구원한단 말인가. 그래서 믿고 기댈 수 있는 진원과의 결혼을 더없는 행운으로 여겨왔지 않았던가. 그래서 처음엔 요한을, 진원의 소유에 따른 재산세 정도로 여기지 않았던가. 세월에 기대어 마침내 그를 밀어내고 자신과 자식들이 진원을 온전히 차지할 깜찍한 야심까지 품지 않았던가.
- 차라리 눈 딱 감고 연주한테 갔으면, 아 뭐든 해주겠다고 하니까, 그래서 일본이든 어디든 한동안 나갔다 오면, 그게 모두한테 낫겠다 싶기도 한데 죽어도 그럴 놈이 아니니 답답해 죽을 지경이지. 그래도 어쨌거나… 시은 씬 모르는 척하고 있어요. 이 일로 또 곁을 주면… 정말 요한이랑 도망치기라도 할 생각 아니면, 마음 독하게 먹으라고요. 그게 요한이 놈한테도 나을 거니까.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태수의 말이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지 말라는 경고의 뜻임을 알기에 시은은 기가 죽었다. 마치 이 모든 사달이 우왕좌왕 어설프기 짝이 없는 자신 때문이라고 탓하는 것만 같아서 시은은 당장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어졌다.
통화를 마치고 시은은 또다시 멍청히 앉아 있었다.
연주와 태수의 말들은 방향은 달랐어도 모두 일리가 있었고, 그래서 날카로운 창검이 되어 시은의 양심을 마구잡이로 찔러댔다.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최악의 결과를 불러오고 있음이었다.
시은은 진원을 포기할 생각은 단 한순간도 품지 않았지만 또한 요한을 모든 순간 떨쳐버리지도 못했다. 마치 그 마음을 아는 것처럼 연주모는 대놓고 물어왔었다. 아니면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어야 했는데, 요한은 자신이 일방적으로 그러는 거라고 바로 날 방어해주고 보호해주었는데, 왜 난 그때 가만히만 있었을까. 마치 가련한 피해자인 양 가증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지. 그리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날 힐끔거리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를 비열하게도 모르는 척했고.
진원에게 사과하러 찾아갔을 때 그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그가 마음이 풀린 것 같아 다행스러웠지만, 동시에 또다시 요한이 떠올랐었다. 요한의 뜨거운 입술과 향긋한 입내가, 탄탄한 근육질의 진원과는 달리 뼈대와 핏줄이 더 잘 느껴지지만 결코 왜소하지 않은 요한의 품이 생각나서 눈을 질끈 감았었다. 진원이 자신의 몸을 우악스럽게 더듬을 때엔 그 자체로도 당황했지만 역시 잊은 줄 알았던 꿈속에서의 요한의 거칠면서도 섬세한 손길이 떠올라 거부한 점도 있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욱 진원에게 미안해져서, 종국에는 그대로 그에게 범해질 생각이었다.
진원은 과연 다를까. 술에 취한 데다 흥분했으니 그땐 그랬지만, 맨정신일 때도 진원은 예전처럼 사랑하는 마음만 담아 날 안을 수 있을까. 날 보면 요한이 생각나지 않을 수 있을까.
시은은 침대에 엎드렸다.
어쩌자고 일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었을까. 어쩌자고 진원이 내게 그렇게 하게 만들었을까. 아니 어쩌자고 진원에게 가 매달렸을까. 요한처럼 진원에게 모질게 굴어서, 그가 내게 진저리치고 정을 떼게 하는 것이 그를 위하는 일 아니었을까. 30년을 형제처럼 지낸 이보다 고작 3년을 사귀었을 뿐인 내가 어떻게 더 중요할까. 아무 일이 없었다면야 앞으로의 30년을 한 이불 덮고 살아갈, 함께 자식을 낳아 기를 내가 더 중요했겠지만 일이 벌어지고 난 지금에야 어떻게…
시은은 갑작스러운 구토감을 느꼈다. 화장실로 달려간 그는 변기 위에 엎드렸으나 그저 식은땀이 미친 듯이 솟고 눈앞이 캄캄해질 뿐이었다. 시은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잠시 후 다시 올라오는 구역질에 몸을 일으킨 그는 점심 때 먹은 죽을 다 게워내고 네 발로 기어서 겨우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집에 아무도 없었으므로 시은은 소리를 감추지 않고 실컷 울었다. 그토록 많이 울었는데도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끝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한참 후에 시은은 일어나 앉아 진원에게 전화했다. 역시 잠긴 목소리로 진원은 전화를 받았다.
- 응, 시은아.
잤어?
- 음. 어제 통 못 자서. 몸은 좀 나아졌어?
일이 있기 전처럼 따뜻한 목소리여서 시은은 울컥했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그가 다녀갔다는 것도 전해들어 알고 있었다. 진원이 좋은 사람이자 잘난 사내라는 것이 새삼스러워서 시은은 가슴이 저려왔다.
아까… 자기 요한 씨 만나러 갔었다고 사장님이 그러시던데.
- 어, 형님이 전화하셨어? 아니면…
내가 전화했어. 확인할 게 있어서.
- 뭐를… 나랑 놈이 만나서 어땠냐고? 꽤 오래 다퉜지. 전화로 하긴 좀 그런데. 그리고 아직 나도 다 정리가 안 돼서… 좀 기다려줘.
응, 천천히 해. 근데…
시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목이 메어와서였다. 시은은 숨을 크게 내쉰 후 요한의 일을 진원에게 알렸다.
******
진원은 곧바로 태수에게 전화해 요한의 소재를 빚쟁이인 양 독촉했다. 병원에 거의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 병실 앞에 마중나와 있던 태수는 사색이 된 진원의 얼굴을 보고는 착잡한 표정으로 병실 문을 열어주었다. 마침 요한이 깊이 잠들었고 진원에게 할 말도 있어 태수는 방문을 허락했던 것이다.
진원은 입을 꾹 다물고 주먹을 꽉 쥔 채 자신에게 맞은 흔적이 있는 요한의 핏기 없는 얼굴과 치료처치된 손목을 비롯한 여러 곳의 자상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어려서는 가출을 하고 커서는 잊을 만하면 술과 여자 사고를 쳐도 결코 이런 식의 불상사는 없었던 요한이었기에 진원의 충격은 컸다.
이 약한 자식아… 이러려고 나한테 그랬냐. 아님 그래놓고 너도 괴로워서, 아니면… 진원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젊은 베르테르를 모방했을까 봐 두려워져서였다. 어쨌든 하랑인 더욱 네게 줄 수 없다. 이렇게 위태로운 놈한테 어떻게 하나뿐인 여동생을 줄 수 있겠어. 그앤 내가 포기시킨다. 진원은 문득 요한에 대한 미움이 솟아나 그에게서 뒤돌아섰다.
진원아.
태수가 병실에서 나와 떠나려는 진원을 불렀다. 진원은 우뚝 섰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당분간은 아는 척하지 마라. 깨자마자 한 말이 너한테 알리지 말란 거였어. 왜 그랬겠냐.
……
따지고 보면 결국엔 요한이 놈 잘못이지 뭐. 물론 지도 지가 컨트롤이 안 되니까 그랬겠지만. 아마 진짜 죽으려고 한 건 아니었을 거다. 너도 알지? 너희 커플 결혼선물로 그림 그려주겠다고 한 거. 그 그림 보니 지가 한 짓이 또 생각났겠지. 그 그림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하더라고. …놈 이해해주고 용서해달란 말은 나도 더는 안 한다. 시은 씨한테도 말했는데, 그냥 둘이 무사히 식 치르는 게 그놈 마음 정리하는 데도 도움될 거 같아. 그러니 더는 요한이 찾아오지 마라. 연락도 말고, 그냥 내버려둬. 그냥 기다려줘.
…혼자 두면 안 되는 거 아시죠. 혼자 어떻게 하시려고요. 가게는요.
지금 가게가 문제냐. 어쨌든 괜찮을 거 같어. 연주네도 한 짓이 있으니까 도와주고 싶어하더라고. 병 주고 약 주고지만 그래도 고맙지 뭐.
때마침 지수와 예의 몸 좋은 수행원 두 명이 오는 것을 두 남자는 보았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태수가 피식 웃었다.
왜 나와 계세요. 안에 누가 있나요?
아니, 깊이 잠들어서 잠깐요. 아, 여기는 김진원 변호사. 그리고 이쪽은 연주 친척 언니신데…
김지숩니다. 어마어마한 부잣집 딸인 육촌 동생 보디가드 노릇하다가 좀 전에 사표 냈어요, 더는 못 해먹겠어서. 사장님께 죄송해서 온 것뿐이에요. 식사도 못하셨잖아요?
지수가 진원에게 살짝 목례한 뒤 태수에게 말했다. 진원도 지수에게 같은 방식으로 인사하고는 말했다.
괜찮으시면 잠깐… 연주 어머니가 하신 말씀들, 요한이한테… 전해들을 수 있을까요?
지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도 궁금하다는 태수의 말에 다같이 간단히 요기라도 하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병원 내 카페에 자리를 잡았고, 지수는 차분히 이야기를 전했다. 그녀가 들려준 요한의 친모 일은 진원과 태수 역시 알지 못했으므로 둘의 놀라움도 컸다. 태수는 당장에 눈가를 훔쳤고 진원은 입을 탁 벌렸다.
태수가 돈밖에 모르는 연주모녀와는 상종도 하기 싫다며, 데려온 덩치들도 도로 데려가라고 고함을 질러대서 진원은 그를 말리느라 진땀을 뺐다. 지수의 거듭된 사과와 진원의 중재로 태수는 겨우 마음을 풀고 연주모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요한의 소식에 충격받은 연주가 마침내 요한을 포기하고, 나아가 어떻게든 그를 보호하고 도와주라고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모친에게 애원했다는 소식도 태수의 결정에 보탬이 되었다.
가게는 하루만 더 쉬고 그 이튿날부터 정상운영하기로 결정한 태수는 긴장이 풀어졌는지 병실 내 보호자용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이내 코를 골았다. 함께 있던 지수가 그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