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는 요한을 발견한 이는 작업실의 주인이었다. 민선생은 놀라는 와중에도 수강생들의 도움에 힘입어 최대한 침착하면서도 신속하게 요한을 구조하였다. 그나마 요한이 그녀를 보자마자 쓰러지는 바람에 괜한 대치를 할 필요가 없던 것이 천행이었다.
요한의 소식은 그가 못 미덥고 귀가시 필요한 어떤 물품도 가지고 나가지 않은 것이 걱정되어 지수의 도움으로 화실에 찾아온 태수에게, 그에게서 지수에게, 지수에게서 연주모녀에게 전해졌다.
연주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병원에 쫓아왔다. 그 아이는 그렇게도 내가 싫었냐고 울부짖었고 그 모친은 자신이 너무 몰아세운 탓인 것 같다고 몹시 언짢아하며 태수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눈물마저 말라버린 태수는 연주모의 사죄에 답하지 않았다.
태수도 병원을 싫어했다. 죽은 아내가 아파하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서였다. 요한 덕분에 그 상처를 달래며 살아왔는데, 그마저 병실에 누워 있는 꼴을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스스로에게 칼질을 한 까닭으로.
요한마저 잘못된다면 그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얼른 여자를 만나 집을 나가라고 시도때도없이 잔소리했지만 속으로는 요한이 귓등으로 듣는 것이 뿌듯했다. 어쩌면 거절하는 요한의 답을 거듭 듣고 싶어 더 말했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요한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느 정도인지는 미처 알지 못했던 태수는 목이 메었다.
그는 요한을 협박한 연주모녀가 이젠 병원보다 더 싫어졌다. 그는 지수에게 그들을 데리고 돌아가달라고 화를 누르며 겨우 말했다. 싫다고 날뛰는 연주에게 태수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를 찰나에 지수가 연주의 뺨을 때렸다. 이 꼴을 보고도 느껴지는 게 없어? 이모도 제발 그만해! 지수는 요한의 부탁을 들어준 자책감까지 가득 담아 혈육들에게 외치고는 떠나버렸다.
마침내 요한과 단 둘이 있게 된 태수는 그제야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도 방의 창문을 열고 옥상에서 요한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어보려고 했으나 잘 들리지 않았었다. 다만 고성의 임자가 요한이라는 것은 알 수 있어서, 그가 정말이지 될 대로 돼라, 하는 것 같아 애면글면했다. 돌아온 요한의 얼굴에 난 상처를 보고서도 태수가 걱정한 것은 그의 마음이었다. 정신상태였다. 연주의 소식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도 없이 기계적으로 지수를 따라가던, 초점 없는 눈동자의 요한을 왜 좇아가지 않았는지 태수는 꺽꺽대며 가슴팍을 쳤다.
그러나 그때 다시금 비가 퍼부었기에 태수는 옥상에서 내려오지 않는 진원에게 올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자인 진원을, 가해자인 요한의 보호자를 자처하는 그로서는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형…
요한의 잠긴 목소리에 태수는 현재로 돌아왔다.
이놈아, 너 어쩌자고 그런 짓을…
…말하지 마요…
요한이 잔뜩 이지러진 얼굴로 겨우 말했다.
뭐?
진원이한테… 말하지 말라고요.
태수는 말문이 막혔다. 하기야 경황이 없어 진원에게 연락할 일은 생각도 못하고 있긴 했다.
요한의 폭로를 들은 당일보다도 더 충격이었는지, 흠뻑 젖은 몸뚱이 그대로 식탁 의자에 겨우 몸을 지탱한 채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고만 있던 진원은 한참 후에야 대리기사를 호출하여 겨우 돌아갔었다. 태수는 난리통에 집에 잘 도착했는지 진원에게 확인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그는 병실을 비울 수 없어 진원에게 안부 메시지만 남겼다.
******
평일 이른 오후여서 금방 집에 도착한 진원은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고 소파에 풀썩 누웠다가 다시 일어나 앉았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단축키 4번을 눌러 여동생에게 전화했다.
- 응, 오빠.
통화 괜찮아?
- 응. 근데 웬일이야? 한창 바쁠 시간 아니야?
하랑아.
사랑하는 동생의 사랑스러운 이름을 부르고 진원은 잠시 숨을 죽였다.
너… 요한이 좋아하니?
진원이 읊조리듯 물었다. 하랑은 잠시 답이 없었다.
- …언니, 시은 언니가 말해줬어?
진원은 하랑의 반문에 당황했다. 동시에 누이의 목소리에서 어쩐지 기쁨이 느껴져서 마음이 아팠다.
시은이도… 안다고?
- 아니야? 그럼…
시은인 어떻게 아는 건데. 네가 말했어?
- 내가 말하긴 했지만… 짐작했다고 했는데. 근데 오빠가 도와준다면 모를까 먼저 나서기는 어렵다고 미안하다고 했어. 그럼 어떻게 알았어? 설마…
......
- …역시 알고 있었구나… 그럴 줄 알았어. 그러면서 그렇게 날 피해다니고… 근데 왜 이제 와서 오빠한테 말했대?
동생의 목소리에서 기쁨이 사라지고 슬픔과 의심이 생긴 것을 느끼며 진원은 젖은 머리칼을 쓸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겠냐고 하더라.
- 정말? 정말 그랬어?
하랑의 목소리가 환희로 가득 차자 진원은 말을 다시 주워 담고 싶었다.
- 근데 오빠… 난 엄마가 너무 무서워. 아빤 결국엔 내 편 들어주실 것 같은데 엄마는…
…그래. 맞다.
- 그래도 오빠가 나서주면 훨씬 나을 거야. 오빠, 도와줄 거지?
진원은 할 말을 잃었다. 요한은 물론이고 시은마저도 눈치챘다는 하랑의 마음을 자신은 상상조차 못했던 것과, 그것이 요한의 준열한 비판의 연장선상인가 싶어 기가 막혀서였다.
지금 당장은… 답 못하겠다. 확인차 전화한 거야.
- 응… 작은 일은 아니니까… 근데 오빠, 한이 오빠 연락이 전혀 안 돼. 전화는 안 받더라도 늦게라도 문자 답은 꼭 줬었는데… 주말부터 지금까지 답이, 아니 확인도 안 했어. 오빤 알아?
진원은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 근데 오빠도 아는 거지, 한이 오빠 부모님 일…
…넌, 그래도 상관없어?
물어봐 놓고 진원은 바로 후회했다. 답이야 뻔한데 그 물음은 다시금 요한이 자신에게 했던 날선 비난에 근거를 더해줄 뿐이어서였다.
하랑이 살짝 웃으며 답했다.
- 언니가 그러더라. 내가 아깝다고. 아마 오빠나 부모님은 더할 거라고. 맞는 말이겠지. 그치만… 언니한테도 말했는데 그런 것들이 한이 오빠 잘못은 아니잖아. 따지고 보면 그 부모님도 뭐 일부러야 그러셨겠어. 사정이 있으셨겠지. 중요한 건 한이 오빠 자신이잖아. 무엇보다 오빠가 내가 싫어 날 피한 게 아니라니, 아니 오빠한테 말할 정도면 나 희망 가져도 되는 거지? 너무 기뻐. 너무 행복해, 오빠.
진원은 가슴이 먹먹하여 더 이상 통화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전화가 들어온다고 핑계대며 나중에 연락하자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든 채로 진원은 한참동안을 그대로 앉아 있은 후에야 기기를 소파에 내려놓고는, 벌떡 일어나서 침실 안 화장실로 들어갔다. 찬물로 빠르게 씻고 난 그는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트렁크 팬티만 챙겨입고 주방으로 갔다.
그는 양주병을 꺼내 뚜껑까지 열었다가 숨을 크게 내쉰 후 다시 잠그고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대신 냉장고에서 꺼낸 캔맥주 하나를 그 자리에서 다 마셔버렸다. 거하게 트림을 하고 난 그는 두 번째의 캔맥주를 가지고 가서 소파에 흥건한 물기를 목에 둘렀던 타월로 대충 닦아낸 뒤 자리에 앉았다. 아침도 점심도 먹지 않아 배가 고팠으나 입맛이 없었다. 그는 맥주로 대충 배를 채울 작정이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맥주를 금방 마셔버리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소파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무심코 집어들었다.
- 오빠, 나 도와줘. 도와줄 사람은 오빠뿐이야.
하랑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진원은 크게 숨을 내쉬며 다시금 물기가 남은 머리칼을 거칠게 여러 번 쓸었다. 물방울이 튀어 들어와 그는 눈을 찡그렸다.
만약 이 일이 없었다면, 달랐을까. 진원은 자문했다.
하랑이 진작에 도와달라고 했다면 나는 어땠을까. 반가워하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시은이가 말한 대로 누가 봐도 하랑이가 아까운 게 맞잖아. 그러니 나는 일반적인 수준의 속물인 거다. 너한테 그렇게까지 매도 당할 정도는 아니라고. 네가 완전 남이었다면 나는 오빠 노릇 톡톡히 했을 거다. 게다가 너는, 하랑일 수단으로 삼으려는 거잖아. 나와, 어머니한테 복수하기 위한. 그걸 참고 받아들여줘야 널 형제로 생각하는 내 마음을 인정해주겠다는 거냐? 시은일 못 넘기면 하랑이라도 넘기라는 거냐?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나한테…
진원은 맥주캔을 마구잡이로 으그러뜨린 뒤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캔 밑바닥에 남아 있던 맥주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소파 아래 바닥에 내려놓았던 젖은 수건으로 대충 눈에 띄는 얼룩만 닦아내고는 그대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에어컨 바람이 내려앉은 그곳이 시원해서였다.
너무 많은 생각이 들거나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기도 한다는 것을 진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팔다리를 벌려 누운 채 진원은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뒤척대던 그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 사이 요한은 물론이고 시은에게 일어난 일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진원이 잠에 취해 있는 동안 그의 여동생은 짝사랑하는 이에게 희망에 찬 메시지를 잔뜩 남기며 기쁨에 들떠 있었다. 그리고 역시 그녀와 같은 이를 외사랑하는 또다른 동갑내기의 여자는 입주 가사도우미만 두 명이 일하는 고급 저택으로 돌아가서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모친조차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인형의 방에 들어갔다.
방을 둘러보던 여자는 곧 미친 것처럼 소리를 지르며 금쪽같이 여기던 그 값비싼 인형들을 닥치는 대로 마구 집어던지고 찢어발기고 모둠발로 뛰며 그것들을 지르밟았다. 모친과 도우미들의 만류에도 여자의 광란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겨우 행위를 멈춘 여자는 모친에게 안겨 통곡했다.
이윽고 죄없는 인형들의 잔혹한 주인은 훌쩍이며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 내가 싫어 죽겠다고 저 난리인 사람, 이젠 나도 싫어. 그러니 가져가. 아니 제발 좀 구해줘… 울엄마가 말한 대로 다해줄 테니까.
저장하지 않은 번호로 온 문자를 읽고, 침대에 누워 있던 시은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시은은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의 내용을 되새긴 후 바로 발신인에게 전화했다. 상대가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연주 맞지?
- 그럼 누구겠어.
무슨 소리야, 그 사람… 요한 씨… 무슨 일 있는 거야?
D시에서 그토록 사로잡혀 있다가 상경하면서부터는 어느새 잊고 있던 불길한 예감에 시은의 목소리가 떨렸다.
- 뭐야, 몰라? …오빠 죽다 살아났어.
어디, 병원에 있어? 어디야?
시은이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 오빠 받아줄 거야? 그럴 거 아님 묻지도 마.
연주가 어느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시은은 나갈 채비를 하려다 멈추었다. 연주의 말이 옳았다. 불안정한 심리상태의 요한을 괜히 또 들쑤시는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시은은 힘이 빠져 침대에 걸터앉았다.
- 언니 결혼할 오빠는 뭐래. 설마 용서해준대? 나 같음 어림도 없다. 딴 남자도 아니고 죽고 못 사는 친구랑… 나 같음 둘 다 안 본다.
어쩌자고 이 당돌한 여자앤 오늘따라 구구절절 맞는 말만 할까. 시은은 헛웃음이 나왔다.
그 사람 상태는… 괜찮은 거야?
- 다행히 바로 발견했고 칼도 생각보다 잘 안 들었대. 대신에 손목 말고도 되는 대로 막… 얼굴에 안 그런 게 천만다행.
시은은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놀랍고 무서워 눈물도 나지 않았다. 다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요한을 처음 만난 후로 그를 보거나 생각하면 줄곧 그러했듯이. 종이에만 베어도 쓰라리고 아픈데 스스로 그럴 정도면… 시은은 요한의 절망감이 전해져 와 질식할 것만 같았다.
- 그 오빠랑 헤어지면 알려줘. 언니 입장에서야 뭐 땡잡은 거니까 포기하기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양심 있으면. 대신 울 엄마가 도와줄 거니까, 돈 걱정은 말라고.
연주는 무감하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