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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4부 2장 3화 - 인형의 방

by 지구인



요한은 자신을 데리러 온 지수와 함께 국내 최대 규모의 상급종합병원에 도착했다. 연주가 입원한 최상층의 특실 앞에는 D시의 호텔에서처럼 연주모의 수행원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이 지수를 알아보고 요한에게 눈길을 주더니 곧 문을 열어주었다.


잠들어 있는 듯한 연주 앞에 딸의 손을 부여잡고 기도하듯 연주모가 앉아 있었다.


이모… 속삭이는 지수의 목소리에 연주모는 고개를 돌려 문 앞에 서 있는 요한을 보았다. 원망이나 슬픔의 빛도 없이 담담한 눈빛이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지수가 부축했으나 그 친척은 금세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딸 때문에 속이 몹시 상했을 텐데도 연주모의 외모는 요한이 처음 봤을 때처럼 완벽히 가꾸어져 있었다. 12센티미터는 족히 될 법한 높은 하이힐도 여전했다.


…잠시 얘기 좀 하죠.


연주모가 천천히 요한 앞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하고는 지수를 돌아보며 깨면 바로 연락해, 라고 말한 뒤 병실을 나갔다. 수행원들이 쫓아오려 하자 연주모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고용주에게 목례를 한 뒤 돌아가 다시 방 앞을 지키고 섰다.


연주모는 병동 중앙에 위치한 휴게실로 요한을 데려가 창가 쪽 소파에 자리했다.


얼굴이 왜 그래요?


눈가와 볼이 푸르스름하고 마스크를 벗은 입가마저 찢겨 있는 요한의 얼굴을 보고 연주모가 묻다가 곧 친구가 알았나 보군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요한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곤란하네. 그럼 그 카드는, 호텔에서 연주나 내가 말했던 건 이제 소용없겠네요.


…네.


어쩌다 알게 됐어요? 친구분이 마침내 눈치챘나요?


제가 말했습니다.


요한이 덤덤히 대답하자 연주모는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내가 말한 기한이 아직 꽤 남았는데도 벌써 말해버렸다는 건, 거절의 뜻인 거 같군. 어느 쪽이든 내 제안의.


그렇습니다.


…아찔했어요. 아무리 완치되었다 해도 스트레스라는 게 만병의 근원이라고 하니. 우리 연주, 해외여행도 제대로 해본 적이 없어요. 혹시라도 병원 갈 일이 생길까 봐 내가 못 나가게 했죠. 해외는커녕 서울도 벗어나게 한 적 거의 없었어요. 근데 하도 떼를 써서 모처럼 간 곳이, 요한 씨 고향이라니. 그것도 좋아하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쫓아간 걸 쫓아간 거라니. 내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요한 씨는 짐작도 못할 거예요.


저도 마음 아픕니다만, 제가 연주한테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 데리러 사람까지 보내셨으니 오긴 왔습니다만, 이젠 연주나 어머님이나 더는 얼굴 볼 일 없었으면 합니다. 연주한테도 그게 좋을 겁니다.


요한이 일어서서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가 자리를 뜨려 하자 연주모가 거기 서요, 날카롭게 말했다. 요한이 반사적으로 멈추어 섰다.


내 말 안 끝났어요. 앉아요.


요한은 짜증이 났다. 진원이나 연주나 왜 이렇게 질척거려 사람을 미치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나 연주에게는, 단 한순간도 자신을 이성으로서 봐달라고 한 적도 없고 연주를 그렇게 본 적도 전혀 없건만 이제는 그 어머니까지 나서서 닦달하는 꼴이라니. 잠시나마 ‘극성엄마’를 가진 연주가 부러웠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는 주먹을 꽉 쥐고 연주모 앞에 서서 말했다.


연주는 좋게 봐줘야 저한텐 귀여운 동생 정돕니다. 이성으로는 단 한순간도 생각해본 적 없습니다. 나이만 성인이지 제 눈에는 중학생 정도로밖에 안 보인다구요. 그런 취미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좀,


임XX.


요한의 말을 자르고 연주모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이었다. 요한이 영문을 몰라 그녀를 보았다.


어머니가 어떻게 되셨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제야 요한은 충격을 받았다. 어느새 생모의 이름 석 자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과 연주모가 뒤이어 말한 내용 때문에. 그는 멍하니 그대로 서 있었다.


이미 찾기 시작했어요. 돌아가셨거나 외국에 밀항이라도 한 게 아니라면 찾을 수 있어요. 얼마나 걸리냐지.


요한이 다시 의자에 앉자 연주모가 활짝 미소지었다. 오종종한 윗니들 옆에 귀여운 덧니가 드러나자 요한은 다시금 연주가 그녀의 딸임을 인식했다.


다만 출소 후부터는 행방이 묘연해서… 행정이나 금융, 통신기록까지 전혀 없는 게 좀 걸리긴 하네요.


출소… 라면…


요한의 백지장 같은 안색을 보고 연주모는 자신의 실언을 알아차렸다.


…몰랐었나 보군.


엄마가… 감옥에라도 있었다는 겁니까?


분노를 삭이며 단호하기만 했던 요한의 얼굴과 목소리에 동요가 이는 것을 알아챈 연주모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가정폭력. 뭐 그 시절에야 흔한 얘기지. 동거남이 무능력한 데다 주취에 폭력에… 참다못해 칼로 찔렀는데 그만. 10년, 모범수로 복역하고 출소했더군요.


……


그 당시는 요한 씨가 아직 어린애일 때니까… 아버지나 어른들이 알았어도 숨기셨겠지. 그 뒤로는 말할 기회를 놓친 것 같고. 요한 씨도… 묻지 않았나 보군. 따로 알아보지도 않았고.


요한은 어렸을 때는 김원장 부부가 자신의 물음을 얼버무리던 일과 사춘기 들어서는 모친에 대한 원망으로 그녀를 잊고자 했던 지난날을 기억해냈다. 꼴도 보기 싫은 친부에게는 응당 물어본 적도 없었다.


역으로, 아무런 기록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정말 자본력과 인력을 적극투입할 수밖에 없어. 우리 연주를 받아준다면, 아니 그냥 옆에만 있어준다면, 내가 어떻게든 찾아내줄 거라고. 이래도 싫어요?


요한은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그저 남자와 눈이 맞아 자식도 버리고 집을 나갔다고만 알고 있었던 생모가 새로운 자식들을 낳고 잘 살기는커녕 사람을 죽여 죄수복을 입기까지 했다니. 간통하고 자식을 버린 죄라기에는 너무 가혹하다. 아니, 아무도 그러라고 등 떠민 적 없잖아. 다 자기자신의 선택이다. 아니, 그러기엔 엄마는 너무 불행하게 살았지… 그 잘난 아버지란 인간 때문에.


요한은 어금니를 앙다물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의 젊다 못해 어린 엄마는 늘 울고만 있었다. 웃는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리하여 요한이 술에 취하거나 아플 때 나타나곤 하는 꿈속의 그녀도 그저 울고만 있었다.


생모가 그렇게 꿈에 다녀가고 나면 요한은 그이를 찾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죽을힘을 다해야만 했다. 엄마가 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여전히 울고 있으면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반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그 역시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아서. 아니 후자가 더 괴로울 것만 같아서, 그는 엄마를 의식하지 않으려 몹시도 의식했었다.


…연주는 보고 가줘요. 요한 씨 보겠다고 그 난리친 거니까.


연주모가 진동하는 전화기를 보더니 일어섰다.


요한은 그녀의 인형이 된 것처럼 움직였다. 병실로 돌아가는 길이 마치 불 꺼진 터널 안처럼 느껴졌다. 어두움. 칠흑 같은 어두움이 다시 그를 덮치고 있었다.


오빠!


짧은 사이 뭐라도 발랐는지 야구모자를 뒤집어쓴 연주의 얼굴빛이 밝아져 있었고 입술은 빨갛고 촉촉해 보였다. 가까이 가니 향수 냄새마저 맡아져서 요한은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연주모 역시 생기가 도는 딸의 얼굴과 반짝이는 눈빛을 보고서는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랬어. 어머니 걱정하시게.


오빠 못 보게 하니까 그렇지. 거기다 그 언니랑 이어지게 도와준다고? 내가 어떻게 밥이 넘어가? …근데 얼굴이 왜 그래? 설마 또 여자들이?!


진원이한테 내가 다 말했다. 근데도 고작 세 대 치고 말더라. 그것도 내가 도발해서 겨우. 내가 한 박치기가 훨씬 아팠을걸.


요한이 침대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오빠가 잘한 게 뭐라고 그 오빨 박치기해? 웃긴다.


그러게. 웃기지.


요한이 초점 잃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연주가 설렘과 걱정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모친에게 말했다.


오빠랑 단 둘이 할 얘기 있어. 잠깐이면 돼.


…10분.


연주모가 벽시계를 가리키며 말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지수가 그 뒤를 따랐다.


저럴 땐 무슨 신데렐라 계모 같다니까. …아빠 아프고 나서부터 저래.


연주가 한숨을 쉬었다.


…우리 엄마 얘기, 네가 한 거야?


어? 난 그냥… 오빠한테 들은 대로만 말했는데 왜 엄마가 뭐래?


…됐다. 뭐 알아내려고 하면 어려울 것도 없을 분인 거 같으니. 할 말이 뭔데?


오빠는… 내가 오빠 땜에 밥도 안 먹고 목이 쉬어라 울다가 쓰러졌다는데도 별로 걱정도 안 하는 얼굴이네.


나 말고도 걱정할 사람 천지잖아. 배부른 투정 마라.


오빠는… 왜 그렇게 나를 무시해? 내가 어리다고 내 마음까지 어리진 않아.


그래? 나는 서른이 넘었어도 여전히 속은 어린 것만 같은데 그래서 미치겠는데 너는 고작 스물에 다 큰 것 같아? 웃기지 마라.


연주가 울먹거렸으나 요한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원에게도 그토록 뻔뻔하고 못되게 굴었는데 연주에게야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었다. 더구나 생모까지 들먹이며 또다른 협박을 해온 그녀의 모친 때문에라도 연주가 보기 싫었다.


원하는 거 다해주는 부모가 있으니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이거지. 한정판 비싼 인형들이 방 하나에 가득하댔지. 이젠 나도 그 방에 가둬두고 싶은 거잖아?


어떻게 인형에 비교해? 그 인형들 언제라도 기부하거나 버려버릴 수 있어! 하지만 오빤 그게 안 된다고! 대체 어떻게 해야 내 마음을, 내가 오빨 사랑한단 걸 믿어줄 건데?


…날 놔줘. 정말 날 사랑한다면 날 좀 놔줘라.


그 언니 땜에 그러는 거지! 넘어올 거면 벌써 그랬겠지! 결혼한다는 그 오빠랑 오빠는 생긴 것부터 완전 틀린데 잘도 그러겠다! 그래, 그 언니가 그렇게 좋다면 바람 펴라. 일단 나랑 결혼만 해. 그 언니 말고도 다른 여자들도 다 봐줄 테니까. 내가 전에도 얘기했잖아, 기다리겠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옛날 여자들이 많이들 그러고 살았다는데, 아니 뭐 지금도 그런 여자들 있겠지. 나라고 못할까 봐?


서연주.


요한이 의자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너야말로 왜 내 말을, 내 마음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거냐. 네가 도저히 여자로 보이지 않는데 나더러 어쩌라고. 맘껏 바람 펴도 되니 결혼만 해달라고? 네 어머니가 잘도 허락하시겠다. 그리고 나도 싫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란 소린 절대 듣고 싶지 않거든. 그런데 아무리 부정해도 그 더러운 피는 내 몸속에 흐르고 있잖아. 그래서 이미 난잡하게 살고 있어. 대신 행복한 결혼생활은 애저녁에 포기했지. 누구처럼 원하는 대로 다 가지려는 철면피는 아니거든.


요한이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개를 푹 숙였다.


…너랑 네 엄마가 왜 꼴보기 싫은 줄 알아? 결국 다를 게 없어. 이미 가진 게 많은데, 차고 넘치는데, 단 하나도 포기할 줄을 몰라. 그렇게 싫다고 몸부림치는데, 제발 좀 놔달라고 하는데, 들은 척도 안 해. 날 벼랑 끝으로 몰아서 기어코 목줄을 채우려 해. 그게 네가 말하는 사랑이다.


낮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을 마친 요한이 얼굴을 들어 연주를 보았다. 그의 얼굴은 그의 목소리처럼 담담했다.


연주는 차라리 그가 소리치고 화를 내기를 바랐다. 그러면 함께 소리지르고 더 화를 내며 대거리를 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러나 요한의 눈빛은 적요하기만 했다. 나이 많은 부친이 건강을 잃은 뒤부터 목소리보다는 눈빛으로 말해온 모친에 길들여진 연주는 그 눈빛의 무서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윽고 연주가 울기 시작했다.


이게 마지막으로 보는 거면 좋겠다.


이어 몸조리 잘해, 라는 말을 하려다 요한은 그만두었다. 그는 그대로 병실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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