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작에 너한테 일러바치고도 남을 짓들을 했는데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 너한테도 모자라 네 여자한테까지 동정받고 싶지는 않았는데… 씨X. X나 지겨워. …그런데도 끌리는 걸 어떡하냐고. 비굴하게도, 그 마음에라도 기대어 보고 싶은 걸.
그래서 너는, 너는 그 마음에 기대어 시은일 식장에서라도 데리고 도망치려고 했다는 거냐? 그래서 나를, 앞으로 날 보지 않으려는 거냐?
나한테 그럴 권리가 있냐. 결정권은 너한테 있는 거잖아, 언제나처럼.
언제나처럼이라니.
요한은 또 웃었다.
그럼 내가 결정권이 있었던 적이 있었어? 그런 부모한테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버림받고 피 한 방울 안 섞인 너희 집에 얹혀 살게 된 거, 그게 내가 결정한 거였어? 그때도 네가 나랑 살고 싶다고 떼를 써서 그런 것도 있었던 거 아니야? 네가 그러지 않았다면, 아니 만약 네가 나랑 사는 게 싫다고 했으면 아무리 아버지라도 날 데려오자고 하셨겠어? 어머니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여자의 아들을 받아주셨겠어?
요한의 눈빛이 다시 광기로 빛났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어머니가 하랑일 두고 그러셨어도, 거리로 뛰쳐나가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 있겠냐고. 그마저도 네가 아프고 네가 날 때리고, 나는 너를 잃을까 봐 네가 정말 나를 안 볼까 봐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 맞잖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어. 네 곁에 있기 위해서, 너에게 미움받지 않기 위해서 나는 적어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버텼다고.
그래, 알아. 그러니까 나도 너를, 다른 친구들한텐 미안하지만, 내가 진정으로 친구라고 여기는 친구는 나도 너밖에 없었어. 부모님보다도 네가 더 소중했어. 하랑이보다도, 그애도 역시 너보다 중요할 순 없었어. 넌 내 반쪽 같은 거였으니까, 쌍둥이 같은 거였으니까. 너는 내게… 너는 아니야? 너는 아니었냐고.
요한이 다시 웃었다. 그가 다시 평상 아래의 쓰레기통을 꺼내며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말하잖아. 그렇게 너한테 소중한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갖고 싶어한 여자가 네 여자라고. 나한테 양보해줄 수 있겠느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냐고.
진원은 숙취 때문만은 아닌 두통을 느꼈다.
요한은 그를 시험하고 있었다. 그토록 견고하다 믿어왔던, 세상 어떤 친구들보다도 돈독하다고 의심한 적 없던 우정과 우애를 모두. 누군가에게 심장을 주어야 한다면 요한뿐이라고 생각했다. 시은을 만나 결혼을 결심하고 나서는 한 명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시은인 너에게 가지 않아. 그건 내가 알아.
머리가 지끈거려 미간을 찌푸리며 진원이 겨우 말했다.
어떻게 자신해? 흔들리지 않을 여자라 믿었는데 아니었잖아. 넌 내가 고백하기도 전에 의심하고 있었잖아.
그건 너 때문에, 네가 한 말들 때문에 잠깐 그런 거야. 그리고 네가 말한 대로, 답답하게 착한 사람이라 우리 둘 생각해서 말 못하고 어떻게든 자기 선에서 해결하려다 그렇게 된 거야. 본가까지 쫓아간 건 너라면서. 네가 너무 괴로워하는 모습이 너무 마음 아파서 그랬다고, 나한테 다 말해줬다.
진원은 시은이 고백한, 어쩌면 D시에서는 현실에서도 선을 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괜히 요한이 미련을 가질까 봐 우려했고 한 여자의 남자로서 자존심도 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치 그의 속을 알아챈 듯 요한이 이기죽거리며 말했다.
그렇다기엔 꽤 뜨거웠는데. 그렇게 비가 퍼부었는데도 몸이 너무 뜨거워서 타버릴까 걱정되던데. 그렇게 날 꼭 껴안을 수가 없었는데.
진원의 두 번째 주먹이 요한에게 날아갔다. 첫 번째보다 훨씬 셌기 때문에 요한은 바닥에 주저앉았으나 이번에도 비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진원은 더욱 화가 솟아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세웠다.
씨X새끼… 한 번만 더 지껄여.
왜 못할 거 같아? 태수 형이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내가 잡아놓은 방에 올라가는 건데. 다쳐서 내가 안아들고 있었으니 그대로 가면 끝…
진원의 세 번째 주먹이 요한을 바닥에 나뒹굴게 했다. 진원이 그를 붙잡아 네 번째 주먹을 내려치려다 가까스로 자제심을 발휘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요한이 진원의 이마를 자신의 정수리로 받아치며 그에게서 빠져나왔다. 이번에는 진원이 나뒹굴었다.
고작 그것뿐이냐? 날 반쯤 죽여놔도 모자랄 판에 고작 세 대 치고 망설여? 대체 어디까지 날 비참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할 거냐?
요한이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진원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넋이 나간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아? 그때 그 호텔에서 그냥 시은 씰 안아버렸어야 했는데! 어머니한테 내 얘길 다 듣고 내가 불쌍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 그때, 그 빌어먹을 동정심을 어떻게든 더 자극했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연주 계집애랑 형이랑 방해하지만 않았어도, 그랬으면 네가 이렇게 날 어떻게든 이해하고 용서하려고 구는 꼴을 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뭐…
그래, 어렸을 땐 네가 붙잡아주지 않았다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몰라. 너랑 아버지랑, 그리고 어린 하랑이가 없었다면 나는 버티지 못했겠지! 하지만 머리 나쁜 나도 어른이 되니까 알겠더라. 그 모든 게 다 가진 자들의, 잘난 사람들이 나는 이렇게 관대하다, 나는 이렇게 굳이 안 해도 되는 자비를 베푼다, 아주 우아하게 잘난 척하는 거라는 걸! 어머니가 아시면 그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하고도 남을 짓을 저지르고 있는 나한테, 네가 이렇게 병신같이 설설 기는 거, 얼마나 재수없는 줄 알아?!
진원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요한을 보았다. 자신이 요한이 저지른 일보다 그에 대한 태도에 상처받은 것처럼, 요한도 진원의 태도에 상처받았다는 말이지 않은가. 내가 우월감 때문에 그런 거라고? 아니야… 나는… 진원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너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아버지랑 하랑이랑 내가… 너를 그저 우월감에서 비롯한 동정심으로만 가족으로 받아들였다고? 아니 내가… 나는… 그래, 나도 그랬을지 몰라. 너를 친구보다는 형제처럼, 그것도 동생처럼 생각했으니까. 병아리, 어머니가 안 된다고 했는데도 몰래 사다 기른 병아리가, 죽어버렸었지. 그 직후에 너랑 함께 살게 됐었지. 그때의 너는 너무도 작고… 그래 그 병아리처럼 작고 연약해서, 내가,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어. 지켜주고 싶었어. 그게 그렇게도 잘못된 거야?
진원의 눈앞에 그때의 조그맣고 가녀린 어린 요한이 떠올랐다. 그가 눈물을 삼키며 지금의 자신과 비슷한 어깨높이로 자란 어른 요한에게 말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아서, 네가 없는 삶이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이제 나 결혼하고 나면 너도 얼른 짝을 찾아서 우리 함께 아이 낳고 함께 기르고 싶었던 게, 널 다시 가족으로 돌려놓고 싶었던 게, 그렇게도 큰 욕심이라는 거야?
요한은 대답 없이 친구를 보았다. 진원의 얼굴이 전에 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전에 없이 마음을 다치고 있음을, 그것도 다른 누가 아닌 바로 자신 때문에 그러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알기에 요한 역시 심장의 통증을 느꼈다. 그를 달래고자 다시 담배를 입에 물며 요한이 말했다.
…가족으로 돌려놓고 싶다…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하랑이는 괜찮겠어?
…?
그애도 내가 좋대. 그앨 위해 내가 거절하고 있을 뿐이야. 만약 내가 결혼하겠다고 나서면 너 그건 축복해줄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정말 가족이 되는 건데 두 팔 벌려 환영해줄 거야? 어머니야 뒷목 잡고 쓰러지실 거고 아버지도 반기지 않으실 텐데 넌 도와줄 수 있겠느냐고.
진원은 또다른 충격으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나 요한은 쐐기를 박을 셈이었다.
훗. 그럴 줄 알았지. 너는 다정하지만 다정하지 않아. 꽤나 무심하고 둔하지. 하지만 그 여자는…
요한은 말을 이어가는 대신 담배연기를 한껏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진원과 달리 그의 약혼녀는 무정해 보이지만 무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원보다 더 깊이 요한을 이해해주고 동감해주는 데가 있었다. 그래서 그 호텔에서 자신을 안아주고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는 것도 예민한 요한은 알아차렸다.
시은이 그가 안아온 어떤 여자들과도, 그와 결혼까지 꿈꾸는 연주나 하랑과도 달라서, 아마도 시은과 자신은 나름의 방식대로 진원과 가장 가깝고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요한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을 진원에게 할 수는 없었다. 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그는 담배꽁초를 다시 통에 버린 후 평상 위에 앉아서 아이스커피를 들이마셨다. 얼음이 거의 녹아버린 커피는 그래도 아직 시원했다. 진원은 그런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대답해 봐. 네 하나뿐인 여동생은 기꺼이 넘겨줄 수 있겠냐고 내게.
진원은 심해져 오는 두통으로 이마를 짚은 채 여전히 아무 말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진원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아파트에 와 있었던 여동생이 떠올랐다. 진원이 시은을 배웅해주고 돌아오자 거실에는 하랑 혼자만이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고 요한은 방에 들어가고 없었다. 그때 하랑의 눈이 붉어져 있는 것을 진원은 그저 착한 누이가 작은 오빠가 아픈 것이 가슴 아파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동생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걱정 마, 괜찮을 거야. 그렇게만 말했었다.
이젠 알겠어? 네가 말한 대로 나는 네게 병아리나 강아지 같은 존재였던 거야. 아마도 강아지 같았겠지. 어려서는 그야말로 너만 바라보고 너만 쫓아다녔으니. 그래서 네가 날 아무리 가족처럼 여긴다 해도, 우리 사이엔 결코 넘어갈 수 없는 선이 그어져 있지. 그 선을 지켜야만 나는 너한테 형제이고 친구인 거야.
요한의 신랄한 비판에 진원은 그야말로 온몸이 갈가리 찢기는 기분이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고 상상도 해본 적 없던 기분이라 진원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게다가 두통으로 머리는 빠개질 것만 같고 높은 습도 때문에 숨은 막힐 것만 같아서, 그는 비틀거리며 평상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진원이 앉은 동시에 요한이 일어서서 그를 내려다보며 마지막 비수를 날렸다.
결혼은 현실이라고 나를 비웃었던 거, 정말 단 한순간도 그런 생각 없었다면 입 밖으로 말할 수 있었을까? 위선자. 아닌 척하지 마. 너도 네 어머니의 아들이야.
말을 마친 요한이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평상 아래에서 쓰레기통을 꺼내지도 않고 그대로 바닥에. 그러고 나서 그는 출입문으로 나가버렸다.
진원은 그대로 평상에 앉아 있었다. 얼마 후 또다시 내리기 시작한 기습적인 폭우를 그는 그대로 맞았다. 두꺼운 빗줄기가 머리통에 내려치는 것이 차라리 시원하여 진원은 꼼짝하지 않았다.
잠시 후 허둥지둥 커다란 우산을 들고 올라온 태수가 혀를 차며 그를 일으켜세웠다.
어서 내려가자. 감기 걸릴라.
그러나 진원은 요한과 더 이상 한 곳에 있을 수 없었다.
…요한이 놈 없다.
태수의 말에 진원이 그의 얼굴을 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연주한테 불려갔어. …단식투쟁하다 입원했단다!
세찬 빗소리 때문에 태수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