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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4부 2장 1화 - 막다른 길 (1/2)

by 지구인



한편 요한은 그동안 부족했던 잠을 보충하기라도 하듯 실신한 듯 잠에 빠졌다.


걱정한 태수가 여러 번 깨웠으나 그때마다 요한은 그냥 다시 잠에 들거나 겨우 화장실에만 다녀왔을 뿐, 흡연도 하지 않고 그저 잠만 잤다. 그렇게 이틀을 꼬박 보내고 칵테일 바의 여름휴가 마지막날 오전에야 그는 마침내 이부자리를 벗어났다.


요한이 소변을 보고 담배를 피우고 면도를 하고 몸을 씻고 물을 여러 컵 마시고 난 후, 태수가 차려준 밥상 앞에 앉아 수저를 들려 할 때 진원이 찾아왔다. 정장차림이었다.


…세상 편하구나. 잘 자고 잘 먹고. 우리는 몸살 나고 술병 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진원의 메마른 안색에 비해 꿈도 없는 깊은 잠을 실컷 자고 난 요한은 하얀 피부가 더욱 말갛게 보였다. 심지어 청초해 보이기까지 했다. 진원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저런 미모의 남자가 좋다고 쫓아다녔으니 수녀나 여승이라도 흔들리지 않았을까 싶었다.


시은 씨는 괜찮아졌냐.


…다시 안 좋아져서 오늘 출근 못했다. 보고 오는 길이야.


그 말에 요한은 긴 숨을 내쉬었다.


진원이 너는? 점심시간이냐?


태수가 시간을 확인하며 물었다.


출근했다가 반차냈어요. 오늘이 가게 휴가 마지막날이잖아요? 그럼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어차피 일도 집중 안 되고.


그, 그래… 시은 씨하고는… 어떻게…


…아직 얘기중이에요. 그래도 시은인, 누구와는 달리 미안하다고 하니까 다시 잘 얘기해봐야죠. 그리고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으면 병까지 났겠어요.


진원은 시은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그야말로 몹쓸 짓을 저지를 뻔한 것에, 연인의 이해와 위로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과 자괴감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눈가를 가린 채 흐느끼기 시작했고, 시은은 그를 안아주며 함께 울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한참을 울었고 그 탓에 진이 빠져서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도 못했다.


그나마 먼저 기운을 차린 진원이 시은과 눈도 못 마주친 채로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시은은 말없이 그의 손등을 토닥여주었다. 진원이 며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심스레 말하자 그의 정혼녀는 묵묵히 택시를 호출했다. 그리고 진원의 배웅을 마다하고 괜찮다고 다시 한 번 그를 위무하고는 굳이 현관에서 작별인사를 했다.


약혼녀를 보내고 나서 진원은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고 상황을 냉정하게 돌아보려 애썼다. 특히 자기자신을 돌아보았다. 아무리 정신적 충격을 받고 술까지 취했더라도 사랑하는 여자에게 평소 극히 혐오하던 범죄 행위를 저지를 뻔한 것을. 진원은 얼굴을 붉히며 욕을 뇌까렸다.


그 와중에 떠오른 것이 요한이었다. 정확히는 역시나 그런 면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그의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언행을.


자신은 물론이고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한창 반항기가 가득한 사춘기 시절에 그런 모욕을 겪고도 요한은 정여사에게조차 눈 한 번 치켜뜬 적이 없었었다. 그도 모자라 자신의 결혼 축의금조차 조금이나마 그 은혜를 갚으려는 생각이라고 말했던 요한이었건만 어째서 그런 식으로 자신을 대했을까. 예전에 비행청소년의 길로 들어섰을 때도 자신 때문에 그만두었던 요한이었지 않은가.


진원은 혹시라도 자신이 모르는 사이 요한에게 오만하게 굴었던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결혼 관련해 속물적인 말을 했던 것 빼고는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요한이 기가 죽을까 봐 그의 미모와 손재주와 미적 감각과 심지어 복잡한 여자관계까지도 실제 생각하는 것보다도 더 높이 칭찬해주고 부러워하는 척까지 했던 것만 기억났다. 자퇴한 요한의 검정고시를 직접 준비시켜주고, 나아가 수능까지 보게 하려다 함께 동반입대했고 제대 후에도 함께 살자 제안했던 것만 생각났다. 진원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녀석을 깔보았고, 그 자식은 그걸 알면서도 참아왔다는 건가. 진원은 한숨을 쉬었다.


요한이 자신보다 훨씬 예민하고 섬세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웬만한 여자애보다 심하다고 놀리기도 했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역지사지한다고 해도 명확한 한계가 있음을, 만약 그런 일들이 있었다 해도 요한은 그동안은 속으로만 삼켰으리란 것을 진원은 오랜 세월로써 알았다.


말을 해야지, 바보 녀석아… 그러나 진원은 그런 말들을 입밖에 내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할 수 있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그는 그것을 알 정도로 섬세하지도 않았으나 또한 그렇게 자존감을 다치는 경험도 겪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한에 비하면 시은은 훨씬 더 이해가 되었다.


요한처럼 미모의 매력적인 남자가 좋다고 하는데 흔들리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을까. 그럼에도 만약 요한이 아닌 다른 남자였다면 시은은 당장에, 예전에 요한이 그랬듯 자신에게 알렸으리라. 태수의 말마따나 요한과 자신 사이에서, 졸지에 두 남자의 우정을 갈라놓게 생긴 처지를 고민하다가 그렇게도 단 둘이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던 시어머니까지 제 발로 찾아간 것 아니겠는가. 어째서 시은이 요한에게 반할 것만 농담 삼아 걱정하고 그 반대는 꿈조차 꿔보지 않은 것인지, 진원은 그조차 자신이 오만했던 것은 아닌지 반성했다.


그는 이번 일로 인해 자신과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들까지 예상외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부정적인 모습이긴 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기에, 그 중 가장 부정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자신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진원은 부끄러웠다.


태수의 말마따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논리나 윤리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도 알았다. 그동안 사귀어온 여자들에 비하면 평범하고 수수한 외모에, 정여사의 지적처럼 애교도 별로 없는 성격인 데다 그렇다고 다른 세속적인 조건들이 뛰어나지도 않은 시은을 자신이 좋아하고 적극적으로 구애했던 것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다만 결혼 결심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시은은 자신의 어머니처럼 살림과 자녀양육보다 외모와 사회활동에 더 열심이지는 않으리라는 기대가 진원에게는 있었다. 당연히 알뜰한 살림꾼인 그 모친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런 어머니 아래서 자랐으니 보고 배운 바가 있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진원은 좋은 부모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한창 바쁠 때는 야근은 고사하고 휴일도 담보 못하는 직업 때문에라도 아버지 김원장만큼 해낼 자신은 없었으므로 아내가 어머니 정여사보다 훨씬 가정적이어야만 했다. 아이들이 태어나면 가까이 사는 외조부모의 애정이 듬뿍 담긴 보살핌까지 받으며 자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는 자신이 보수적이고 계산적이라고는 생각했다. 그러나 이 정도는 떳떳하지는 못해도 욕먹을 정도도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대신 아내와 처가에도 그만큼 더 잘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러므로 시은에 대해서 그는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자신을 찾아왔고 자신이 저지른 일까지 용서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랬기 때문인지 진원은 다음날 아침에 시은의 안부를 확인했고, 몸이 안 좋다는 소식에 다시 달려갔었다. 원래는 며칠은 떨어져 있을 생각이었는데도 말이다.


시은은 그 사이 잠들어 있었으나 여윈 얼굴에는 여전히 눈물의 흔적이 확연했다. 진원도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지만 꾹 참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돌아나왔었다. 여전히 시은을 사랑한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를 포기할 수 없다고 다짐하며.


그리하여 그는 요한을 찾아온 것이다. 파혼 따위는 없다고 말해주기 위해. 이제 셋이 함께 만나는 일은 없다고, 당연히 네가 시은을 쫓아다니는 일도 없어야 한다고, 그럼에도 너와의 우정도 포기할 수는 없어 이렇게 왔다고. 허심탄회하게 다 얘기해달라고. 혹시라도 내가 잘못한 일이 있으면 용서를 빌겠다고… 그런 마음으로.


요한은 표정의 변화조차 없이 밥알을 씹을 뿐이었다. 태수가 그날 이후 첫 끼라고 변명하자 진원은 바닥에 퍼질러 앉아 사들고 온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요한은 평소처럼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식사를 마치더니 올라가자, 친구가 사온 커피 하나를 빼어들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날도 날씨가 잔뜩 흐렸다. 바람도 세게 불어 흡사 태풍이 올 것만 같이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 탓인지 옥상에 놓인 크지 않은 평상에 앉아서도 아이스커피를 마신다면 버틸 정도는 되는 체감온도였다.


안절부절못하는 태수에게 걱정 말라는 한 마디만 남기고 요한은 옥상으로 앞장섰다. 그가 흡연을 마칠 때까지 진원은 잠자코 기다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아니면 듣고 싶어서 왔냐.


요한이 다 피운 담배꽁초를 평상 밑에서 꺼낸 대용량의 파인애플 통조림통에 버리고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말했다.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어떻게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니 뻔뻔하게 굴어?


요한이 진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내가 아는 너는, 그저 괴로워하다가 나를 보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데. 그러면 나는 화가 나다가도, 이미 죄책감에 시달리는 네가 마음 아파야 하는데.


그래, 처음엔 내게 가장 소중한 너를 빼앗아 가는 거 같아서 밉고 질투가 났는데, 언젠가부터는 그 여자도 좋아하게 되었다고,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다고 말했어야 했다는 거냐.


…내게 했던 말들, 정말이야? 정말 그렇게도 시은일…


그렇다면 어떻게 할 건데? 나한테 양보해주기라도 할 거냐?


뭐라고?


네가 날 정말 소중하게 여긴다면 말이야. 형제처럼 여긴다면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이 자식…


내가 처음으로 좋아한 여자라는데. 내가 먼저 만났더라면, 그렇게 생각한 여잔데. 그건 못하겠어? 아직은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왜, 임신이라도 했냐?


진원이 참지 못하고 요한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그러나 요한은 휘청거렸던 몸을 다시 일으켜세우며 피식 웃었다.


너는… 너는 내가 그렇게도 아무것도 아니었어? 너에게 친구는 나 하나뿐 아니었어? 피만 안 섞였지 우린 형제 아니었냐고.


진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 형님 말대로 사람이 사람 좋아하는 게 논리로 설명되겠어? 하지만 그런 마음을, 그런 마음이 든다 해도 마음대로 하지 않고 사람 도리에 따라 윤리적으로 행동하는 게, 그렇게 노력하는 게 옳은 거잖아. 너도 그렇게 살아왔잖아. 내게도 그렇게 잘했잖아. 근데 어떻게, 어떻게 미안해하지도 않는 거냐?


진원이 다시 평상에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렇더라. 네가 내게 그런 태도를 보였다는 게 더 견딜 수가 없었던 거야. 더 충격이었던 거지. 그래서 도망치듯 나갔었던 거야.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화도 났겠지. 그 화를 엉뚱하게, 아니 엉뚱한 건 아니겠지만, 시은이가 받아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네 몫까지 더해 시은이한테 터뜨렸단 말이다. 왜 나를 그렇게 만드는 거냐? 왜 내가 생각도 못한 짓을 저지르게 만드냐고.


무슨 소리야? 나처럼 목을 조르기라도 했어?


목을 졸랐다고?


얘기 안 해? 우리 셋이 처음 만난 다음날에 벌써 쫓아갔었다.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다는 거냐?


아니, 그땐 아니야. 술 취한 너 챙겨주는 모습 보니까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 곳이 없겠더라. 더군다나 네가 잠꼬대로 시은 씰 부르니까, 완전히 널 뺏기는 것 같아서 쫓아가서 너 포기하라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이상한 여자야. 왜 말을 안 하지? 설마 네가 그 얘기 듣고는 내게 더 화를 낼까 봐, 더 용서 안 할까 봐 걱정해서 그런 건가? …짜증나.


요한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담배를 꺼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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