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51화. 4부 1장 4화 - 배반자들 (2/2)

by 지구인



시은은 다시 침대에서, 그래도 이번엔 앉은 채로 진원을 맞았다. 술 마시고 구토한 사람 특유의, 얼굴에 수분기라곤 찾아볼 수 없이 버석한 느낌이 진원의 얼굴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모습을 본 적 없던 시은은 그가 충격을 받아서라고만 여겼다.


그 사람이… 뭐라고 했어.


…연락 왔어?


사장님이 문자 주셨어.


진원이 불쾌함을 표하자 시은은 눈을 내리깔며 조심스레 답했다.


그래…


진원이 화장대 의자를 가져와 침대 앞에 앉았다.


자기 어떻게 그렇게 침착해?


시은은 다행스러우면서도 서운하기도 해서 다소 퉁명스럽게 물었다.


침착해 보여?


응.


그러는 자기도 생각보다 괜찮네. …왜 말 안 했어? 상대가 요한이라서 그런 거라고, 내가 이중으로 충격받을까 봐 그런 거라고 나는 생각하고 싶어. 녀석이 일방적으로 쫓아다녔다며.


아니야.


뭐가 아니야?


일방적으로 그런 거 아니라고.


…그러면.


진원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 애썼다. 여자가 흔들렸다고 요한이 말한 것을 떠올리지 않으려 힘썼다.


그 사람과 선을 넘는… 꿈을 여러 번 꿨어. 너무도 생생하게.


…꿈일 뿐이야. 실제가 아니잖아.


그 사람 만난 데 호텔 카페였어. 올라가면 그만이었어. 우리 둘 다 비를 그대로 다 맞았고 그 사람이 조금만 더 적극적이었다면 어쩌면…


요한이 올라가자고 속삭인 말을 시은은 듣지 못했지만, 그를 쫓아가다 넘어져 다치기까지 했으니 태수들이 아니었다면 옷을 말리기 위해서라도 요한이 잡아놓은 방에 결국 갔을 것만 같고… 그러다 보면… 과연 거부할 수 있었을까. 시은은 스스로를 믿지 못했다. 자신을 갖고 싶다는 요한의 말은 분명히 들었었다.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 순간에는.


…거짓말이지? 그래, 녀석이 키스 얘기는 했어. 몇 번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엔 자기가 받아주었다고도 했지. 그렇게 당당하게 날 약올리듯, 시비조로 말하면서도 호텔이니 그런 얘긴 없었어.


진원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은은 잠시 그의 얼굴을 보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약간 헐렁해진 커플링을 괜히 돌리며 시은이 말했다.


…그 얘기까지 하면 자기가 더 상처받을까 봐 그랬을 거야. 자기가 얘기하겠다고, 그러고 떠나겠다고 했어. 너무 불안정해 보여서 그 사람 쫓아가다가 난 넘어진 거고… 사장님이 갑자기 나타나지 않았으면 비도 맞고 내가 다치기까지 했으니 아마 방에… 올라갔을 거야. 내가 자길… 배신했다고.


진원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서… 놈한테 가기라도 하겠단 거야? 그래, 파혼이니 식장에서 도망 운운했었지… 설마 자기도 그렇다는 거야?


시은은 진원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과 요한이 말했다는 내용에 놀라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진원에게는 자신에게 뻔뻔하게 굴었던 요한의 모습이 시은에게 겹쳐졌다.


왜 너희는 미안하다고 하질 않아? 왜 용서를 빌지 않는 거야? 나한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진원이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사윗감의 간청에 따라 걱정과 호기심을 참고 안방에서 텔레비전을 켜놓고 있던 한여사가 놀라 뛰어왔다. 그이의 남편은 마침 친구를 만나러 나가고 없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김서방? 그러나 진원은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부들부들 떨며 죄송하다는 말만 겨우 남기고 뛰쳐나갔다.


시은은 그를 쫓아가려 했지만 발목의 통증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정말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용서해줘. 자기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그냥 그렇게 시작할 것을.


스스로에게 위해를 가할까 걱정시키던 요한이, 호텔 앞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고 자신이 떠나겠다고 하던 요한이 진원 앞에서는 돌변할 줄 전혀 몰라 저지른 오판이었다. 그리고 솔직하게 다 말해야 한다는 명제에만 어리석게 집착해서, 진원이 예상외로 너무 침착해 보여서,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고약한 기질과 사람 성질 긁는 나쁜 말버릇이 발동해버려서. 시은은 울며 진원에게 전화했으나 연결되지 않았다.


주차된 차 안에서 진원은 또다시 울부짖어야만 했다. 그저 미안하다고, 요한의 미모에 홀려 아니면 그의 신파 그 자체인 사연이 너무 가여워 흔들렸다고, 용서해달라고 말해주길 바랐는데 시은마저 가슴에 대못을 박았다. 진원은 그야말로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난공불락이라 여겼던 그의 성채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시은은 눈물이 멈추지 않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진원에게 전화했으나 연결되지 않자 모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택시를 불러 진원의 아파트로 달려갔다. 다시금 오르는 열과 근육통을 달래기 위해 약을 집어삼킨 후 겨우 샤워를 하고 제대로 말리지도 않은 몸에 되는대로 옷을 꿰어입고서.


비는 멎었으나 여전히 잔뜩 찌푸린 하늘이 어느새 저녁을 맞이하고 있었다. 정혼자가 집에 있기를 기도하며 시은은 약간 절뚝이는 다리로 건물에 들어섰다.


진원은 소파에 걸터앉아 안주도 없이 양주병째 들이키는 중이었다. 그는 현관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반사적으로 시은을 보았으나 곧 외면했다. 시은은 마음이 아팠다. 늘 강아지처럼 자신을 보면 드러내고 좋아하던 연인은 없었다.


뭐하러 왔어.


지금까지 시은에게는 들려준 적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진원이 내뱉었다. 시은이 파스를 붙인 위에 목이 긴 흰 양말을 신고 그 위에는 발목보호대까지 찬 발로 힘겹게 거실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진원은 보았으나 다시 외면하고는 술만 들이켰다. 원래 같으면 당장에 뛰어와 걷지도 못하게 했을 그를 알기에 시은은 서러워졌다.


시은을 본 순간 진원은 반갑고 고마운 마음이 일었다. 그러나 그녀가 다친 것이 요한과 함께 있어서, 아니 그를 쫓아가려다가 넘어졌다는 말이 생각나서,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떠올라서 그는 다시 마음이 짜게 식었다.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달라고… 아까 했어야 했던 말하려고.


소파에 와 앉은 시은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진원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엎드려 절받기지. 됐어. 이제 와서 무슨 소용.


진원은 다시 술을 들이켰다.


자기야…


시은은 기도하듯 모아쥔 두 손을 자신의 허벅지에 올려놓았다. 반바지를 입어 드러난 시은의 무릎에 멍이 들고 정강이에도 꽤 큰 생채기가 나 있는 것을 진원은 보았다. 걱정과 분노가 솟구치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려 진원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 어디 변명해 봐. 들어나 보자. 유치하지만, 둘이 대체 어디까지 간 거야?


시은은 요한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었으나 진원의 실핏줄이 솟은 취기 어린 눈동자에서 조급함을 읽었으므로 그의 물음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아까처럼 말실수하지 않기 위해 공을 들여 천천히 이야기했다. 진원의 이삿날과 요한이 아팠던 날의 실수가 분명했을 사건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 뒤로 시작된 꿈 때문에 죄책감이 들어 고민 끝에 정여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진원에게 말할지,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결정하려고 했는데 요한이 집 앞으로 쫓아와 있었던 일을. 그리고 D시에서는 괴로움을 토로하며 키스하는 그가 너무 가여워 자신도 모르게 거부하지 않은 것을.


그럼 자기가 받아준 건… 그 호텔 앞에서가 다야? 그 전에는 요한이가 일방적으로, 실수든 어쨌든.


맨정신으로 그런 건 내가 어머님 뵙는 일로 집 앞에 쫓아온 그날 한 번뿐이야. 그날도 너무 흥분해서 그랬을 거야. 따지고 보면 마지막 때도… 흥분 상태였겠지.


…나한텐 이젠 자기 말고는 여자 필요 없다고 하던데. 거짓말 같지는 않았어. 짧았지만 그렇게 진지하게 여자 얘기한 적, 내가 아는 한은 없었어.


진원이 일어섰다. 약간 비틀거렸지만 그는 이내 바로 서서 시은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말한 대학 때 여친 얘기, 기억하지? 녀석한테 꼬리쳤다는. 그때 당시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에서는 아니었나 봐. 놈과 자기가 친해지길 바랐지만, 자기가 요한일, 너무 잘생겨서든 행실 때문이든 불편해하는 게, 거리 두려고 하는 게,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어. 그러면서도 또 놈을 걱정해주고 챙겨주려는 게, 자기한테 미안하면서도 고마웠지. 자기라면 내가 꿈꾸는, 요한이를 다시 가족 품으로 데려오는 데 도움될 거라고 믿었어. 그런데 그게 내 착각이고 오만이었다는 게… 믿었던 자기마저 흔들렸다는 게… 결국은 내 탓이라는 게 날 미치게 해.


그게 어떻게 자기 탓이야.


그럼 누구 탓이야. 너희 둘 잘못이라고? 그거야 당연하지!


진원은 다시금 머리끝까지 화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당장에 요한까지 불러와 둘을 앉혀놓고 마구잡이로 화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은 시은뿐이었으므로 그녀에게 요한에 대한 분노까지 더해졌다.


정말 그뿐인 거 맞아? 놈은 파혼까지 말했어! 그 자식은 그렇게까지 자길 원하는데 자기는 단지 그냥… 동정심이라고? 정말 그뿐이야? 아니, 고작 키스 한 번 받아주었단 것도 못 믿겠어. 잘 뻔했다고 했지. 혹시 어제만이 아니라 그때도 아니야? 요한이 아팠을 때, 단 둘이 이 집에 있었을 때, 나 도착하자마자 자기 가버렸던 그날! 아니 자버렸던 거 아냐?! 그날 이후로는 우리 한 번도 안 잤잖아! 날 피하기만 했잖아!


진원은 거칠게 시은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시은은 그의 양손에 잡힌 양팔이 너무 아파서 신음했으나 진원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니 알았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 아니라고 말 못해? 어서 말해봐!


시은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미안해. 미안해, 자기야…


왜 아니라고 안 하냐고! 다 내 망상이라고, 오해라고 왜 말 안 해!


이윽고 진원은 시은을 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시은은 눈물만 흘리다가 용기를 내어 그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눈가를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원은 그런 시은을 피하지는 않았다. 시은은 다시 용기를 내어 그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대었다.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하고 싶은 말 다 해. 그치만 내가 아는 자기는… 그래놓고 나중에 후회할 거 같아. 그러면 또 마음 아파할까 봐 걱정돼.


진원이 고개를 돌려 시은의 얼굴을 보았다. 시은은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진원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다가 습관처럼 입을 맞추었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진원이 다시 입을 맞추어오자 시은은 눈을 감았다. 진원은 오랜만에 하는 입맞춤에 격렬한 감정이 더해져 술기운에 취한 몸이 바짝 달아올랐다. 그의 한 손이 연인의 등을 끌어안고 다른 손은 그녀의 허벅지에서부터 가슴까지 쓸며 올라왔다. 그의 입술이 상대의 입술에서 턱밑으로, 이어 쇄골에서 가슴으로 성급히 움직였다.


시은은 당황해서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진원은 그녀를 소파에 눕히고 맨살을 거칠게 훑었다. 싫어… 시은이 하의로 내려가는 그의 손을 막으며 말했으나 진원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체력이 떨어져 있던 시은은 곧 반포기 상태가 되어버렸다. 무엇보다 진원에 대한 죄의식이 그녀의 저항을 방해했다. 생각도 못한 방식이었으나 진원이 원한다면 이렇게라도 속죄해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시은의 아랫도리를 벗기려 바둥거릴 때 그녀의 엉덩이와 다리가 전에 없이 무겁게 느껴져 진원은 힘을 주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 시은의 한쪽 팔이 소파 밑으로 툭 떨어지는 것을 진원은 보았다. 무심코 올려다본 시은의 얼굴이 힘없이 옆으로 떨구어져 있었다. 눈은 감겨 있고 입은 약간 벌려진 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시은은 다시금 정신을 잃고 있었다.


시은아. 시은아… 진원은 그녀의 상체를 세워 끌어안고 볼을 때렸다.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시은아, 정신 좀 차려봐. 시은이 눈을 떴다. 미안해. 내가 미쳤었어… 진원은 시은을 껴안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아니야… 내가 자기 서운하게 했잖아. 괜찮아… 계속… 해. 그러나 진원은 방금 저지른 일에, 어쩌면 상대보다도 더 큰 충격을 스스로에게 받았으므로 욕구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는 넋이 나간 채로 그대로 있었다.

keyword
이전 03화50화. 4부 1장 3화 - 배반자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