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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4부 1장 3화 - 배반자들 (1/2)

by 지구인



잠시 후 진원은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태수의 침통한 표정과 요한의 싸늘한 얼굴을 보고서는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절친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남자의 멱살을 거칠게 거머쥐었다.


제 생각이 맞아요? 시은이가 맞냐고요?


그대로 멱살을 움켜쥔 채 진원이 태수를 보며 외쳤다. 태수가 일어나 진원의 손목을 붙들며 조용히 말했다.


일단 이거 놓고… 진정해. 내가 막아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 면목이 없다, 진원아.


진정하라고 하지 마세요. 이게 진정할 일이에요 지금?


때려서 해결될 일이면 안 말린다. 그래서 될 일이면 내가 벌써 반쯤은 죽여놨어. 이 자식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그래. 그리고… 어쩌냐. 누구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데.


…너지, 시은이가 만난 사람. 그리고 뭐야, 어제 키스했다는 얘긴… 여자가 받아주었다고? 흔들린다고? 정말이야? 아니, 어제라면, 또 밤에 불러내 만났다는 거냐?


나도 따라 내려갔었다. 같이 올라왔고.


나도 걱정돼서 쫓아 내려갔었고 다같이 연주네 차 타고 올라왔다. 시은 씨 감기 기운 있고 다리도 다치고 해서, 연주 어머니가 차 쓰게 해주셨어.


진원의 주먹을 막으며 태수가 재빠르게 부연설명을 하자 진원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요한이 그의 손을 차분히 뿌리쳤다.


연주 어머니는 또 무슨…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예요, 나만 모르게?


진원이 다시 의자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요한이 시은을 쫓아다니고 있고 시은은 그에게 흔들리고 있으며 둘은 최소한 한 번 이상 키스했다. 태수가 말렸지만 실패했다. 연주도 어쩌면 그 어머니도 이 사태를 아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이토록 큰 충격을 받아본 적 없었으므로 진원의 사고회로는 거기까지만 작동되었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성이야 그렇다쳐도 감정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화가 나야 할 상황인데, 그것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는데도 이젠 화조차 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놀라서 충격을 받은 그 상태로써 진원은 박제된 것만 같았다. 자기자신이 자신에게서 괴리되어 있는 것만 같았다.


진원아…


그를 말리며 제법 이성적인 척했으나 사실은 태수 역시도, 아니 같은 일을 겪은 누구라도 주먹이 올라가고도 남을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원이 그저 의자에 몸을 얹은 채로만 있자 태수는 이젠 그가 걱정이 되어 그의 몸을 조심스레 흔들었다. 그 때문인지 진원의 입술이 움직였다.


…너 정말이냐. 파혼 얘기… 진심이야.


그건, 그냥 홧김에 해본 소리지! 결혼할 만한 상대 아니라고 아까…


그 전이었어요, 그 말. 형님은 가만 계세요, 안 때려요.


…때릴 가치도 없다는 거냐. 백마 탄 왕자님의 주먹은 고귀하기도 하시겠지.


야!


요한의 빈정거림에 태수가 소리쳤다. 잘못했다고 빌며 이젠 그만하겠다고 속죄해도 모자랄 판국에 요한은 오히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려온 것처럼 굴고 있었다. 뻔뻔하고 재수없었다. 요한에게 이런 돼먹지 못한 밉살 궂은 면이 있는 줄은 전혀 몰랐으므로 태수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요한이 저지른 일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인데 그의 그러한 태도는 충격에 충격을 더했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요한이 아니라 자신인 것만 같지 않은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오직 자신에게만 미소짓고 말해주던, 자신만을 바라보고 쫓아다니던 친구가 배신에 배신을 더하고 있다는 것이 진원은 믿어지지 않았다.


그 누구도 부술 수 없는 든든한 울타리가 요한과 자신을 굳건히 둘러싸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울타리를 거둬버리고 있는 이가 요한이었다. 요한이 다른 친구 백 명보다도 더 소중했는데, 많은 친구들 중 오직 그만이 자신의 심장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 심장을 찢어내고 있는 이가 바로 요한이었다.


진원은 눈물이 나려고 했다. 소리치고 화를 내고 요한을 늘씬하게 패지는 못할망정 눈물이라니. 남자라면 말리든 말든, 옥상으로 끌고 가든 건물 밖으로 데려가든 일단 몸을 부딪치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이미 전의를 상실한 그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진원아, 태수가 불렀음에도 진원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집밖으로 나갔다. 너 이 새끼, 그대로 있어. 태수는 다급히 요한에게 말하고는 현관에서 장우산을 집어들고 진원을 따라나갔다.


진원은 늙은이처럼 계단 손잡이에 의지해 엉금엉금 내려갔다. 태수가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진원은 괜찮아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조금은 속도를 냈으나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렸다. 1층 건물 입구에 마침내 도착하자 진원은 우뚝 서서 땅에 내리치는 빗줄기를 멍하니 내다보았다.


저놈이 왜 저러는지 나도 도대체가 모르겠다. 내 잘 얘기해볼 테니까, 너도 마음 잘 추스려. 정말 미안하다. 근데 시은 씨는… 요한이가 진지하게 한 말로는 그냥 자기 혼자 그러는 거래. 그러니까…


갈게요.


대리 불러라, 응?


그러나 진원은 대답 없이 태수에게서 우산을 받아들고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무릎 아래로 흠뻑 젖어가며 백여 미터를 걸어가 자동차에 올라탄 진원은 그저 앉아 있었다. 이윽고 습관처럼 시은에게 전화를 걸며 그는 어젯밤 자신을 보고서는 왜 놓지 못하냐는 말만 던져놓고 울기만 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안내멘트에 통화를 종료하고 진원은 이젠 나도 알아, 라고 메시지를 입력하다 조수석에 전화기를 던져버렸다. 이어 운전대가 부서질 듯 양팔과 주먹으로 세게 내리치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분노와 슬픔, 나아가 열패감과 두려움까지 지금껏 경험한 바 없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몸부림쳤다.


******


탈진한 진원은 가까스로 귀가한 뒤 술을 들이부었다. 결국 구토까지 하고 소파에 뻗어버렸고, 꽤 시간이 흐른 후 전화벨 소리에 그는 정신을 차렸다. 태수였다.


- 괜찮냐?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진원이 차에 닿을 때까지 태수는 멀리서나마 지켜보았었다.


…그 자식은요?


- 잔다. 업어가도 모르게 잔다.


태수가 헐레벌떡 되돌아갔을 때 요한은 제 방에서 잠옷까지 갈아입고 예쁘게도 누워 있었다. 심지어 진원이 사왔던 먹거리들을 냉장고 안과 그 위의 흰색 플라스틱 상자에 차곡차곡 정리하고 식탁까지 말끔히 치운 뒤였다. 맥이 탁 풀린 태수는 요한의 잠든 숨소리를 확인하고 나서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고 기절하듯 한잠 자고 일어난 참이었다. 잠에서 깬 그가 허겁지겁 요한의 방에 가보니 방의 주인은 여전히 아기같이 자고 있었다.


나한테 그렇게 뻔뻔히 굴고 이젠 잔다고… 잠도 별로 없는 놈이. 진원이 기막혀하는 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태수가 바로 말을 이었다.


- 어제오늘 잘 못 잤다고 나도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운데, 요한인 그때 술병 나고 돌아온 뒤로 계속 그랬다니까. 이해해달라는 건 아니다만. …시은 씨랑 얘기했어?


…아직은요. 형님은 어디까지 아시는 거예요. 요한이가 시은일… 정말 파혼 얘기할 정도로, 그렇게 진지해요?


- 그건…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만은 좋아하긴 하나 봐. 내 그랬어. 시은 씨처럼 얌전하고 조신한 여자 본 적도 잘 없는데 네가 결혼한다고 나서니까 덩달아 결혼하고픈 마음이 들어서 잠깐…


그날, 시은이 집 앞에 불러내서 뭐라고 했다던가요. 고백이라도 했대요?


- 아냐아냐. 네 어머니 뵈러 간다니까 괜히 찔려서… 혹시라도 너한테, 너희 어머니처럼… 그럴까 봐 걱정돼서 앞뒤 생각 없이 달려갔다고 하더라. 그렇게 궁금하면 자기한테 다 물어보라고 했대.


그게 다예요?


- 아유 그럼. 근데 시은 씨가 결국 내려가서 네 어머니 뵀잖아. 그래서 또 쫓아간 거고 나는 놈 붙잡아 오려고 연주네랑 내려간 거고. 근데 연주 어머니까지 와서는,


그분은 또 왜요?


- 아 글쎄 연주가 결혼하자고 들이대고 그 엄마도 동거라도 해보라잖아. 모녀가 쌍둥이처럼 생겨가지고는 성질이, 엄마는 말투만 차분하지 내 보기엔 딸보다 더하더라. 아버지가 무슨 회장님이라는데 아이구 느낌은 무슨 조폭 같아.


…쫓아 내려가서 시은이랑… 그런… 키스했다는 거예요? 혹시 보셨어요?


- 어? 아니 내가 그걸 어떻게 봐. 난 몰라.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여야 했으므로 태수는 펄쩍 뛰었다.


형님이 말렸다는 건…


- 사람 도리로 말이 되는 소리냐. 만에 하나 시은 씨도 그런 마음 조금이라도 있다 해도 안 된다고 했더니, 그냥 자길 불쌍히 여기는 마음밖에 없다고, 너랑 똑같다고만 하더라. 그러니까 시은 씨랑 잘 얘기하고… 놈도… 어렵겠지만 용서해줘라. 막말로 잔 것도 아닌데… 크흠! 시은 씨도… 너랑 요한이가 너무 친하니까 중간에서 말하기 그랬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그리고 요한이도… 오늘은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만 엄청 괴로워했다. 어차피 안 될 거 지도 알고, 너한테는 미안하니까 그랬겠지. 근데 사람 마음이 어디 무 자르듯 딱 잘라지냐. 그러면 얼마나 편하겠냐… 그러니 네가 좀 너그럽게… 지금까지처럼… 내 부탁한다. 응?


…끊습니다.


진원은 전에 없이 무례하게 태수와의 통화를 종료했다.


자신의 이해나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뻔뻔하다 못해 적대적으로 굴더니 이제는 태평하게 잔다는 요한이 더욱 괘씸하고, 그런 그를 싸고도는 태수도 원망스러워서였다. 진원이 당장에 요한에게 쳐들어가고 싶은 충동으로 소파에서 일어섰을 때, 한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몸상태는 좀 나아진 것 같은 딸이 이젠 말도 없이 서럽게 울다가 멍하니 있는 걸 반복한다는 탄식의 말에 진원은 행선지를 바꾸었다.


어머니, 죄송하지만 제가 지금 좀 가야겠습니다. 가서 봐야겠어요. 시은이한테 전해주세요.


모친에게서 말을 전해듣고 시은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찾아 전원을 켰다. 태수의 부재중전화와 문자가 눈에 들어왔다.


- 진원이가 집에 왔었어요. 요한이가 무슨 생각인지 말해버렸네요. 그놈 혼자 반해서 쫓아다녔다고, 일이 커질까 내가 말리고 있던 중이라 했으니 잘 얘기해서 풀어요. 결혼할 일만 생각해요.


시은은 눈물이 말라버렸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뭐라 시작해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진원이 충격받는 모습을 감당할 자신이 아직은 없어서 고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진원이 이미 알고 있다니 그 고민은 더는 안 해도 되지 않은가. 어머님 말씀 다 듣고 나니 그 사람 계속 보기가 불편해서 나는 못 만날 것 같아. 정말 피하기 힘든 자리 아니면 난 빼줘. 이런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어졌다. 그냥 솔직하게 말하자. 더는 숨길 수 없어. 시은은 입술을 깨물었다.


시은은 눈물자국을 씻기 위해서라도 늦은 세수를 했다. 거울에 비친 엉망인 얼굴에 기초화장품을 찍어 바르고 머리를 빗어 단정히 묶으며 정혼자를 대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은 다시 또 흘렀다. 시은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려가며 마음의 격동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시은에게 가는 자동차 안에서 진원은 D시에 다녀온 밤에 지금은 말 못하겠다며 울기만 하던 연인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랬던 시은이니까 설마 놈처럼 그렇게 더 내 마음을 아프게는 않겠지. 제발 그러지 말아줘… 자기마저 그러면 난… 진원은 초조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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