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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4부 1장 2화 - 수수께끼

by 지구인



너 정말 미쳤어? 진원이 온다는데 이럴 거야?


오면 뭐요!


건물 2층에 다다른 진원의 귀에 철제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와 다급한 발소리들이 들려오더니 태수와 요한의 성난 목소리가 울려왔다. 곧이어 퍽, 하고 육신의 일부들이 세게 맞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계단을 오르던 진원의 발이 멈추어졌다.


정신 차려, 미친놈아! 전화도 안 받는데 쫓아간다고 만나주겠냐? 이럼 연주랑 다를 게 뭐야!


…다르죠… 나는 그런 든든한 엄마가 없으니까.


뭐, 든든? 모녀가 쌍으로 미쳤는데 무슨 든든? 너 혹시라도, 뭐 둘이 도망이라도 치겠다는 거냐? 그럴 일은 없다고 네 입으로 말해놓고! 너 진짜 진원일 어떻게 보려고 그러냐!


자신의 이름이 태수의 입에서 나오자 진원은 귀를 의심했다. 대화, 아니 말다툼의 내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아서였다.


이러나저러나 앞으론 못 볼지도 모르죠… 아무렴 내가 시은 씨보다 중하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막 나간다고?


형 말대로 미쳤나 보죠…


자신의 이름에 이어 시은까지 언급되자 진원은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다만 요한에게도 심상찮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또다시 여자 문제이나 지금까지와는 반대로 요한이 여자에게 매달리는 모양이었다. 진원은 마침내 요한이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것을 축하할 겨를도 없이 그를 걱정하게 된 이 상황은 물론이고 그가 자신에게는 내색조차 않은 것이 신경쓰였다. 섭섭했다.


여튼 그만 들어가. 밥은 나가 먹자. 술은 어떻게든 피하고.


이어 두 사람이 집안으로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진원은 폭이 좁고 다소 가파른 계단에 그대로 서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잠시 숨을 고르고 못 들은 척 명랑히 인사하며 등장했겠지만, 이미 시은의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그녀와의 만남이 미뤄져서 답답해하던 터였으므로 요한의 일마저 미루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대체 어떤 여자길래 요한이 매달리는 건지, 태수는 왜 미쳤다고 하는 건지 너무 궁금했다. 설마 또 한참 연상의 유부녀는 아니겠지… 진원은 요한의 전적을 떠올리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그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태수가 문을 열었다. 어서 와, 말과는 달리 태수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진원은 그에게 고맙고 미안해져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할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제대 후 십 년 가까이 요한을 데리고 살아준 그의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게 도리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나가서 먹자. 그래 냉면, 요한이가 좋아하니 먹으러 가자. 내 쏠게.


태수가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양과 표정으로 말했다. 입을 꾹 다물고 개수대에 기대 서 있던 요한이 그의 말을 따르려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진원은 잠깐만요, 라고 둘을 제지했다.


아까 계단서 다 들었다. 너 뭐냐.


두 남자의 낯빛이 동시에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보고 진원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상황일지 모른다는 직감에 충격받을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는 식탁에 먹거리가 가득 든 종량제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의자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대체 누구야? 나한텐 왜 숨겼냐?


진원은 대답을 기다리며 비닐봉지에서 캔맥주 하나를 꺼내어 벌컥벌컥 마셨다. 어젯밤 먹은 건어물의 짠기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것 같았다. 아침에는 모친이 배송해준 셀러리즙 한 병과 생수 한 컵만 마신 터라 배도 살짝 고팠다. 당장에 식사하기는 글렀기에 진원은 감자과자도 찾아 봉지를 뜯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요한은 답이 없었다.


어물쩍 넘어갈 생각은 마라. 고문이라도 해서 알아낼 거니까. 죄송하지만 형님도요.


진원은 태수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으나 그의 얼굴은 이미 고문을 받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반면 요한의 안색은 평소처럼 돌아오고 있었기에 진원은 절친에게서 답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냐고. 유부녀만 아니면 내가 적극 밀어줄게.


…아직은 아니야.


뭐가 아직은 아니야. 언제까지 숨길 작정이었냐?


아니 그게, 그냥 잠깐 그러고 말 거라 일도 바쁘고 한데 굳이 신경쓰게 하지 말자고 내가, 내가 말하지 말자 했어.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긴요. 형님이 때리기까지 하셨잖아요. 아니에요?


태수의 어설픈 해명은 거기까지였다. 그는 너무도 조마조마해서 더 이상 말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시은을 좇아 고향에 내려가면서부터 요한은 고삐 풀린 말과 같았고 태수는 그를 다루는 것이 힘에 부쳤다. 게다가 그나마 순진한 구석이 있는 딸과 달리 주도면밀한 것 같은 연주모의 등장까지, 그는 숨이 턱에 찼다.


…이혼은 아니고 파혼은 해야 하는데, 진짜 도와줄 거야? 이런 경우엔 어떡해야 돼? 이것도 소송감인가?


요한이 대범하게도 진원과 마주 앉으며 물었다. 현관 근처에 서 있던 태수는 심장이 멎을 지경이었다.


그치. 하려고 들면 못할 것도… 뭐, 진짜야?


진원이 맥주를 마시려다 말고 요한의 얼굴을 보았다.


상대남자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좋은 조건이라 쉽진 않은데, 여자는 분명 흔들리고 있거든. 아닌 척해도 마음 약한 구석이 있어서. 내가 워낙에 동정심을 자극하잖아. 뭐 식장 들어갈 때까진 모르는 거 아냐?


이 미친놈!


태수가 요한의 한쪽 어깨를 세게 내리쳤다. 그러나 요한은 눈을 감으며 신음을 삼키고는 다시 눈을 뜨고 진원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내가 여자한테 먼저 키스한 건 그 여자가 처음이야. 이젠 안고 싶은 것도 그 여자뿐이고. 어제는 키스도 순순히 받아주더라. 이 정도면 아예 꽝인 건 아니잖아, 안 그래?


요한의 눈빛에 전에 없이 광기가 서려 있었으므로 진원은 처음으로 그에게 무섬증을 느꼈다. 형님이 손찌검까지 할 만하군. 대체 누구길래. 그나마 기혼자는 아닌 게 불행 중 다행인가. 진원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떤 여잔데. 어디서… 가게 손님이었어? 얘기나 들어보자.


아니. 술도 약한데 무슨. 얼굴 밝히는 타입도 아니고. 그랬으면 벌써 넘어왔겠지. 내가 내세울 건 그것뿐이잖아.


왜 또 그러냐. 외모도 경쟁력이야. 것도 어마무시한. 너도 덕 많이 봤잖아. 자꾸 그럼 자격지심을 가장한 과시다, 짜샤.


그럼 바꿀 수 있담 바꿀래? 나로 살아볼래?


요한은 아예 시비조로 나왔다.


그는 묘한 흥분감에 휩싸여 있었다. 술에 취해서도 격렬한 성교 때도 느껴본 적 없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다는 것만 짐작할 수 있는 종류의. 문득 번지점프할 때나 아찔한 놀이기구를 탈 때와 비슷한 기분이라고 요한은 느꼈다. 스스로 뛰어내리든 기구가 출발하든 멈출 수는 없다. 바닥으로, 바닥으로. 밑으로, 밑으로. 그리하여 마침내… 그러나 무섭지 않았다.


웬 뚱딴지야. 본론으로 돌아와라.


난 본론인데.


요한이 생긋 웃자 진원은 다시금 소름이 돋았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붙잡혀 마지못해 털어놓은 그 밤에는 어여쁜 눈망울에 눈물을 가득 머금고 끝내는 소리도 없이 울어 자신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더니, 지금은 갈색에 가까운 아름다운 눈동자는 빛을 잃고 텅 비어 있기만 해서 이토록 두렵게 하지 않는가. 태수는 다리에 힘이 빠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엇나가는 자식 놈을 보는 부모 심정이 이렇겠구나.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뱃속자식마저 떠나보낸 아픔을 겪은 그는 전혀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천륜의 한 부분을 간접경험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정말 도와줄 거야?


언제 결혼하는데.


왜. 식장에서 훔쳐 달아날까? …것도 나쁘지 않겠네.


요한은 정여사의 경악하는 얼굴을 상상하고 짧은 승리감에 취했다. 그녀에게는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그 아들에게는, 비록 이미 배신은 시작했더라도, 그런 수치까지 주고 싶지는 않았다. 찰나의 망상 끝에 요한은 들뜬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진원의 걱정 가득한 얼굴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됐어. 그냥 괜히 말해본 거야. 잊어버려, 다.


요한이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태수가 뒤쫓아 나가는 것을 진원은 그저 바라보았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두 사람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원은 남은 맥주를 마저 들이켰다. 나도 담배나 피울까… 이럴 땐 피웠음 싶다. 시은이가 펄쩍 뛰겠지.


진원은 전화기를 들여다보았다. 약혼녀에게 남겨놓은 메시지에 읽음 표시는 없었다. 그는 망설이다 숫자키 0을 두 번 눌렀다. 연인의 전화기는 여전히 꺼져 있었다. 이어 그녀의 모친에게 전화할까 하다가 그는 그만두었다. 지금은 녀석에게 집중하자. 오늘은 녀석을 해결하고 내일은, 병원 갈 정도 아니면 꼭 시은일 만나서…


때마침 돌아온 요한들 덕분에 진원은 겨우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옥상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왔는지 요한과 태수의 얼굴이 안정되어 보였다.


그럼 이만 나갈까?


태수가 두 친구를 번갈아 보며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셋은 식탁에 둘러앉아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려야 했다.


…시은이가요,


유리창에 쉴새없이 내리치는 빗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진원이 입을 열었다.


며칠 전에 밤늦게 집 앞에서 누굴 만났대요.


요한과 태수의 얼굴이 다시금 굳어지는 것을, 그리고 태수가 요한의 눈치를 보는 것을 진원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근데 어머니께 날 만난다고 했다네요. 심지어 싸우고 들어온 것 같다고 어머님이 걱정하시더라고요. 그러고 만날 사람이 대체 누굴까요. 만난 것도 만난 건데 싸운 것 같다고 하니 더 걱정이네요. 하도 이상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라. 거기다 날 보고서는 그저 울기만 하니… 도저히 집에 혼자 있을 자신이 없어서 왔더니만 너는 그런 폭탄선언이나 하고. 말하려면 나 편안할 때나 말하지 타이밍 아주 죽인다.


진원은 식탁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머리를 감싸안았다.


너는 또 왜 그러냐… 하고많은 여자들 중에 왜 하필 임자 있는 사람이야. 날까지 잡았으면 결혼한 거나 마찬가지지. 임신했을지도 모르고. 문제가 한두 가지야?


…너 시은 씨 의심하는 거냐?


아니.


진원이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의 얼굴은 심각했다.


아니, 어쩌면. 네가 그런 얘기하니까 괜히. 아니야. 의심하는 거 아니야. 스토커는 아닐까 걱정하는 거야. 뭐 전남친이거나 그럴 수도 있겠네. 왜 결혼소식 듣고 그러는 경우 있다잖아.


상대가 전남친이라면 그나마 이해는 되겠어? 용서해줄 거냐.


무슨… 그럴 여자 아니라니까. 야, 이제와 얘기한다만 너 술병 났을 때 내가 얼마나 쫄렸는지 아냐? 시은이가 너 여자들이랑 사고치고 다니는 거 너무 싫어해서 고민고민하다 애걸복걸했다고. 외모보다 행실을 중히 여기는, 그런 올곧고 답답한 여자가 내 여자라고.


진원은 새삼 고지식한 약혼녀가 뿌듯했다. 그녀에 대한 신뢰와 더불어 자신감을 되찾은 그는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 여자 관둬라. 결혼상대 있는데 흔들리는 여자가 결혼했다고 달라질까.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가 어렵냐. 그리고 결혼은 현실이야. 상대가 빠지지 않는 조건이라며. 여자들이 얼마나 영악한데 그런 결혼 마다하고 너 같…


고작 캔맥주 하나에 취한 것일까. 진원은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요한의 눈빛이 한겨울 같아졌다.


왜. 내가 고아라서? 가진 거 없어서?


미안하다. 말이 잘못 나왔어. 내가 정말 잘못했다.


진원은 두 손을 모아 빌었다. 그의 말에 태수도 상처받았지만 요한이 저지른 일이 있으니 넘어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동거인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어 보았으나 요한의 눈빛은 이젠 얼음보다 겨울이었다.


괜찮아. 사실인데 뭐.


요한아…


그래, 너도 잘 생각해 봐. 전남친도 아니고 약혼자의 불알친구한테 흔들리는 여자를 뭘 믿고 결혼하겠다는 건지.


요한의 목소리는 눈빛만큼이나 차디찼다. 그러나 진원은 바로 못 알아듣고 눈을 껌벅거리기만 했다. 태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내쉬었다. 파국이다… 오래전 공전의 히트를 친 드라마의 명대사가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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