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을 들은 진원은 한밤중에 빗속을 뚫고 시은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좋아하는 맥주에 건어물과 땅콩을 씹으며 오매불망 연인의 연락을 기다리던 그는 연인의 전화기가 계속 꺼져 있자 술맛이 달아나버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으므로 그는 초조하게 거실을 거닐다가, 팔굽혀펴기와 체중스쾃을 했다가, 눈으로만 TV를 보다가, 아직도 정리되지 않은 서재에서 좋아하는 책의 표시해 둔 곳들을 펼쳤다가, 냉장고에서 꺼낸 2리터짜리 무라벨 생수통을 병째 들이켜다가, 심호흡을 여러 번 하며 불길한 생각들을 떨치려 애썼다.
그리고 시은이 집에 도착했을 법한 시각임을 확인하고 그 어머니에게 전화했다. 몸이 젖어 있지는 않았으나 시어머니 뵈러 간다고 차려 입은 새하얀 원피스가 잔뜩 구겨지고 더러워진 채, 신발조차 벗지 못하고 거실 입구에 쓰러져 있는 딸을 남편을 시켜 겨우 방에 옮겨놓는 중이라는 한여사의 말에, 진원은 그대로 뛰쳐나와 운전대를 잡은 것이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진원은 거칠게 입술을 씹었다. 어머니를 뵈러 간다고 전화할 때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내려가서는 또 연락을 피하고. 어머니는 6시쯤 헤어졌다는데 그럼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충전 잊어버리는 사람도 아니고 새 휴대폰인데. 거기다 기절까지 했다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진원은 걱정하는 마음과 함께 회피하고 함구하는 시은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액셀을 밟았으나, 막상 초췌하기 짝이 없는 약혼녀를 보자 걱정하는 마음만이 남았다.
시은아…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그냥 역에 마중 나가는 건데.
진원의 정혼자는 기운이 없어 침대에 누운 그대로 신랑감을 맞았다.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요한이 때문에 그래? 녀석 얘기, 부모님 얘기랑… 다 들은 거야?
자기는…
시은이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잘 들리지 않아서 진원은 연인의 메마른 입술에 귀를 가까이 대었다.
자기는… 왜. 왜 놓지 못해서 이렇게 만들어…
그게 무슨 소리야.
시은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미안해…
뭐가. 왜 울어.
시은이 돌아누워 본격적으로 울자 진원은 침대에 살짝 걸터앉아 그녀의 엉망인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기야, 나 너무 걱정된다… 무슨 일인지 좀 말해줄래?
…지금은 말 못하겠어… 그만 가줘…
…그래. 그럼 괜찮아지면 연락해.
진원은 시은에 대한 인내심과 애정을 다시 한 번 발휘하여 침대 옆 스탠드 불을 꺼주고 조용히 방에서 나갔다. 그가 나간 뒤 시은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부스스한 양배추 머리를 한 한여사가 딸이 더 이상 입지 않는 낡고 펑퍼짐한 트레이닝 복을 그나마 위아래로 맞춰 입은 채 식탁에서 참외를 깎고 있었다. 이리 오라고 입모양과 함께 손짓을 한 그이는 사윗감이 고개를 숙이며 조심스레 의자에 앉자, 그에게 포크에 꽂은 참외 한 조각을 건네며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아니 사부인 뵈러 갔다 온 거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길래 쟤가 저렇게 비 쫄딱 맞은 생쥐 꼴이 돼서 돌아온 거야. 어머님은 별말씀 없으셨나?
예. 그냥 말씀 나누고 저녁때쯤 헤어지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은 그러고 나서 뭘 하다 왔길래 저 모양이야.
한여사가 한숨을 쉬었다.
애가 요새 좀 이상하긴 했지만…
무슨 일… 이상한 일이 또 있었습니까?
아니 뭐 정신을 얻다 두는지 핸드폰도 깨먹어 오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말도 잘 못 알아듣고. 그래 얼마 전에 왜 자네가 집 앞으로 만나러 왔지 않나? 그때 나갔다 오더니만 더 심해진 거 같아.
최근에 진원은 시은을 만나러 오지 않았다. 그의 퇴근이 늦었고 시은이 유독 피곤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진원은 불길함을 느꼈다.
몇 시였지? 10시는 아득히 넘었던 거 같은데. 원래 같으면 나나 걔나 벌써 누웠을 시간이었어. 허둥지둥 나가더니 금방 또 허둥지둥 들어오데. 조용조용 다니는 애가 그날은 시끄러워서 내가 막 잠이 들려다 깼었지. 그날 뭣 땜에 싸웠나?
…아닙니다. 싸우기는요. 시은이는 뭐라고 했습니까?
뭐 물어보면 사근사근 말해주는 앤가. 아무 일도 없다고 그러지. 그냥 내 생각에, 그날 자네랑 싸운 것 같고 시어머니까지 뵈고 왔다니 무슨 일이 있긴 있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싸운 건 아니고 조금… 불편한 일이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긴. 원래 결혼준비할 때 많이 싸우고 그래. 그리고 아프다니까 바로 이렇게 뛰어왔는데 뭐. 고맙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머님.
응, 그래.
한여사가 진원과 함께 일어나며 여봐요, 김서방 간대요. 안방을 향해 말했으나 그녀의 남편은 반응이 없었다. 아이고 이 양반 그새 잠들었나… 한여사가 민망해하며 방으로 가는 것을 진원이 붙잡았다. 어머님만 괜찮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내일 또 오겠습니다. 속삭이는 진원의 등을 한여사는 아이구 뭘 또 와… 요새 바쁘다며 쉬지. 기쁨과 염려가 섞인 손길로 두드렸다.
진원은 며칠 전 시은이 자신을 핑계대고 만나러 나간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한동네 살거나 자차가 있는 친한 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고, 시간과 장소를 고려할 때도 왠지 여자일 것 같지는 않아서 신경이 쓰였다. 더구나 싸운 것처럼 보였다는 한여사의 말은 더 마음에 걸렸다. 진원은 속이 타들어갔지만 다음날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먼저 말하지는 않아도 묻는 말에 거짓을 말하지는 않아온, 아니 그렇다고 믿어온 연인을 새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은의 상태는 밤새 더 안 좋아졌다. 열은 내렸으나 기침과 근육통이 심하여 자리보전을 해야만 했다. 심지어 죽과 약도 침대에서 받았다고 한여사는 전했다. 약기운으로 통증이 잦아들면 다시 잠에 곯아떨어진다고 했다. 아프면 잠에 의존하는 시은을 진원도 알고는 있었다.
정오를 한 시간 가량 앞둔 시각, 진원이 현관 신발장에 놓아둔 자동차 키를 챙기며 나가려고 할 때 한여사에게서 굳이 걸음하지 말고 쉬라고, 상태 봐서 다시 연락 주겠다는 전화가 왔다. 진원은 그저 자는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말해보았으나 한여사는 뭐하러 헛걸음하느냐며, 더구나 그 까칠한 성격에 분명 짜증낼 거라며 만류했다. 진원은 하루를 또 기다려야 하는 것이 답답했지만 예비 장모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시은과 밤을 보내고 싶을 때는 물론이고 이럴 때조차 그 부모님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것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새삼 섭섭해져 왔다. 시은은 부모님께 괜한 핑계를 대기 싫다며 여행은 물론이고 외박조차 꺼려했다. 부모님께 인사드린 후에는 그나마 조금 나아졌지만 진원의 욕구에는 여전히 한참 모자랐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일찌감치 결혼을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하기야 전날에조차 진원은 시은의 방문을 살짝 열어놓았었다. 늘 온화해 보이던 장인어른의 표정이 화가 난 듯, 인사도 받는둥마는둥해서 왠지 눈치가 보여서였다. 하나뿐인 딸이 안사돈을 만나 그 꼴로 돌아왔으니 그 아들에게 한소리하고 싶었지만, 남편의 속을 꿰뚫어본 아내가 미리 입단속을 했으므로 시은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정도였다. 그리고 진원이 돌아갈 때 짐짓 잠든 척하고 내다보지 않은 것 정도가 다였다.
진원은 바지 주머니에 넣은 차 키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몰고 나왔다. 정지신호에 걸렸을 때 그는 단축키 1번을 눌러 요한에게 전화했으나 받지 않아 단축키 5번인 이태수 사장에게 전화했다. 태수가 요한의 전화기를 다시 압수했음을 진원은 알지 못했다.
하늘은 여전히 흐렸다. 이날도 중간중간 비소식이 있었다. 장우산으로 받쳐도 온몸이 다 젖는 무서운 기세의 빗줄기가 여름 내내 기승이라 사람들은 치를 떨었다.
- 어 그래, 진원아.
태수의 목소리가 떨렸으나 진원은 운전중이기도 해서 알아채지 못했다.
댁이시죠? 요한이도 같이 있어요?
- 어? 어… 그렇지 뭐.
저 지금 가고 있어요. 다른 일 없으시면 점심하자고요. 모처럼 쉬는 주말인데, 밥 먹고 이따 저녁에는 한잔하시죠. 형님 일정 물어보라고 어제 전화했었는데 들으셨죠?
- 어… 아니 그게…
나가기 귀찮으시면 배달시켜도 되구요. 오늘도 비가 올 거 같네요.
- 나야.
어. 뭐 했냐?
- 화장실. 왜.
밥 먹자고. 지금 가고 있어.
- 왜. …주말에 만난다고 그러더니 오늘은 안 만나? 아님 이따 저녁에 만나.
그게… 아프네. 감기몸살이 좀 심하게 났어.
요한이 걱정하던 일이었음을 알 수가 없는 진원은 이야기를 계속했다.
발목도 삐었다고 그러고 열은 내렸는데 약 먹고 계속 잔다고… 아마 오늘은 안 될 거 같다.
- 얼마나 아픈데,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풋, 너랑 똑같아. 병원 싫어해. 버틸 만하니까 어머님이 그냥 두셨겠지.
- 그래도 아프다는데 너 그렇게 태평해도 되는 거야? 아무리 부모님 계시다고 해도.
나도 가고 싶은데, 어머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성격 아니까 아픈 사람 괜히 신경쓰게 하긴 싫고… 결혼해서야 가능하겠지. 결혼하면 그런저런 모습 다 보여주려나. 워낙에 고지식해놔서. 어쨌든 나도 이래저래 싱숭생숭하니까 좀 놀아주라. 끊어.
요한이 대답할 새도 없이 진원은 통화를 종료했다. 시은이 아프다고 말한 이후부터 요한의 목소리가 동요했지만 역시 그의 절친은 눈치채지 못했다. 진원은 약혼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일 때문에 자신에게 거리를 두고 나아가 어머니까지 만나러 다녀왔고, 몸까지 다친 데다 자신을 보고서는 그저 울기만 한 것에 신경이 쏠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정여사는 아들의 추궁에 나중에는 화를 냈다. 며느릿감이 물어보는 말들에 귀한 시간을 들여 성실히 대답해준 것뿐인데 죄인 취급하는 것이 부아가 치밀어서였다. 아무리 자식 키워봤자 소용없다지만 너 정말 너무한다! 네가 이럴수록 걔만 곤란해지는 거 몰라?! 나쁜 놈. 정여사는 씩씩대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이가 하늘처럼 여기는 아들에게 ‘놈’ 운운한 것은 요한과 시은, 두 사람과 관련된 일 말고는 없었다. 친구에 대해서는 어머니를 원망하는 마음이 있어 그런 식으로 전화가 끊겨도 진원은 모친에게 다시 연락해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붓감에 대해서는 어머니의 서운함을 이해해드리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거기에는 시은의 조언도 작용했다. 그는 짐짓 애교를 피워가며 모친을 달래드렸고, 그러면 정여사는 사춘기 이후 한동안 보지 못했던 다정한 아들이 돌아온 것 같아 곧 기분이 풀어지곤 했다.
그러나 진원은 이번에는 어머니께 다시 전화하지 않았다. 시은이 어머니를 뵈러 간다는 말에 요한이 쓸쓸히 웃으며 어머니 내 얘기 마음껏 다하시겠네. 따라가 말리고 싶을 정도야. 라고 해서 아차 싶었는데 예상대로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그렇게도 녀석이 불편했나. 어머닐 찾아뵐 정도로.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거지… 게다가 자신을 핑계대고 시은이 만났다는 누군가까지, 흔한 말처럼 이제는 그저 손 잡고 식장에 들어갈 일만 남았는데 왠지 일이 꼬이고 있다는 느낌을 진원은 지울 수가 없었다.
결국 시은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나 당장에는 불가능했으므로 진원은 요한을 찾았다. 도저히 혼자서는 하루를 버틸 자신이 없었고, 사전약속 없이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친구라곤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오직 요한뿐이었다. 그리고 시은과의 일에 대해 모호하게라도 말할 수 있는 이도 역시 그뿐이었다.
진원은 편의점에 들러 주류와 주전부리를 잔뜩 사들고 요한이 사는 건물에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