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병실을 나서자 문 앞에 있던 수행원 중 하나가 연주모에게 전화를 했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하려는 그를 다른 수행원이 막아섰다. 잠시 후 연주모와 지수가 휴게실 방향에서 모습을 보였다.
요한은 다시금 신경질이 났으나 소란을 피우고 싶지는 않아 그대로 있었다. 연주모가 지수에게 눈짓을 하고는 병실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지수에게 눈짓을 하여 그녀를 병실로 들여보내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뭐라고 했길래 애가 또 저래요. 아픈 애한테 너무하는군.
그동안 반복했던 말을 다시 했을 뿐입니다.
연주모는 요한의 무표정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아까 제안도 거절이란 말인가, 조용히 물었다. 요한의 얼굴에 이는 술렁임을 읽으며 연주모는 아직 내가 말했던 기한이 남았으니 더 생각해 봐요, 말하고는 다시 병실로 들어갔다.
요한이 우두커니 서 있는 동안 지수가 복도로 나왔다. 다시 바래다줄게요. 그녀의 말에 요한은 순순히 따랐다. 어차피 전화기도 신용카드도 아무것도 챙겨오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연주모녀를 대신해 사과하는 지수에게 대답 대신 화실로 가달라고 부탁했다. 거기 가면 마음이 좀 나아져서… 형도 알아요. 전해주시면 되잖아요. 요한이 평온히 말하자 지수는 잠시 고민하다가 주소를 요청했다. 외우고 있지 않아서 요한은 잠시 당황했으나 지수가 전화기를 건네주자 곧 내비게이션에 입력할 곳을 검색해 알려주었다.
…친구분이 용서해주겠다던가요?
운전하며 지수가 조심스레 묻자 요한은 힘없이 웃었다.
글쎄요. 이제 뭐 별로 상관없어요.
혹시 시은 씨와는 얘기해봤어요?
결국 감기몸살이 났다네요, 심하게. 저는 형한테 붙잡혀 있었고 전화기도 빼앗겨서. 뭐 내 번호는 받지도 않겠지만.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모르겠어요. 뭐 대단한 계획이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시은과 만나서 도저히 자신은 안 되는 건지, 정말 자신에게는 그저 동정과 연민만 느끼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는 말을 요한은 침과 함께 목구멍으로 삼켰다. 아니잖아, 그것만은 아니잖아, 너도 내게… 요한은 시은에게 달려가 그렇게 묻고 말하고 싶었다.
호텔 앞에서 시은을 껴안았을 때 그는 너 아니면 죽겠다고, 죽어버리겠다고, 널 마지막으로 보고 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아보고, 널 보내고 그대로 죽고 싶다고… 그런 망상으로 방을 잡았다고 다 말해버리고 싶었다. 실제 그런 마음이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면 시은이 적어도 자신을 혼자 내버려두지는 못하리라는 비겁한 계략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게로 쫓아와 난동을 부렸던 여자들을, 그리고 그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하던 여자들을 비로소 이해했다.
왜 여자들이 그랬는지, 왜 내 몸이라도 달라고 했는지 그때서야 알았어…
요한이 중얼거리자 지수가 그를 보았다.
벌 받나 봐요. 정말 서로 몸만 원한 경우도 많았지만… 처음부터 확실히 못박고 시작했는데도, 그러자 해놓고도 결국엔 매달리더라고요. 그저 우는 여자도 있었고 폭력을 휘두른 여자도 있었고 너 죽고 나 죽자한 여자도 없진 않았고… 봐요, 연주는 부모님까지 끌어들여 협박하고 있잖아요. 하지만 내가 뭐라 할 자격 있어요? 난 누구에게 말해도 욕먹을 만한 상대한테 그런 마음인데. 더구나 연주는 고작 스물이지만 난 뭐냐고요. 서른도 넘어서.
요한은 지수가 뭐라 할 새도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며 계속 지껄였다.
연주 어머니가 그랬잖아요. 파혼하면 후속조치 도와주겠다고, 둘이 도망가겠다면 그것도 도와주겠다고. 그때야 아니라고 했지만, 시은 씨 있는데 내 맘대로 그러겠다고 할 수 없으니까. 근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내가 얼마나 등신같이 쫄아 있었는지 그때 알았어요. 당장에 시은 씰 데리고 도망가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구요.
요한이 머리를 좌석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겠죠… 억지로는. 일방적으로는. 형 말처럼 그럼 나나 연주나 다를 게 없는 거니까. 아니 내가 더 잘못하는 거니까. 연주한텐 세상 잘난 듯 그렇게 말해놓고선.
어느새 요한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 있었다. 지수는 그가 자신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혼잣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왜 이렇게 서로 어긋나기만 할까… 지수는 연주는 물론이고 요한에게도 연민을 느꼈다. 왜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고 이루어지지 않을 소망을 품어 스스로를 괴롭힐까. 그러나 지수는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연주는 울다 지쳐 생병이 나고, 요한은 마치 현실을 도피하려는 듯 잠에 빠져들었다더니 깨어서도 혼이 나간 듯하지 않은가.
어찌됐든 두 사람은 각자의 고통으로 각자의 방식으로 아파하고 있었다. 지수는 잠시 둘 중 누가 더 괴로울지를 가늠해 보려다가 금방 그만두었다. 당사자가 아닌 다음에야 그 깊이와 정도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준다는 말을 지수는 대체적으로 믿었지만 그 말을 절감하는 데는 또한 시간이 필요했다. 지수는 그저 두 사람의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가기를 기원할 뿐이었다.
오랜만에 화실에 들른 요한은 평소 이용하는, 민선생이 특별히 사용을 허락해준 그녀 전용의 조그만 작업실에 습관처럼 들어갔다.
창문이 없어 어두웠으나 요한은 불도 켜지 않고 서 있었다. 잠시 후 문틈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 요한은 작업실 가운데 놓인 이젤 앞 작업용 의자를 찾아 앉았다. 순간 마음이 편해졌다. 그는 마스크를 벗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연필 냄새, 물감 냄새, 민선생의 취미인 조각의 대상인 나무 냄새… 요한이 만드는 칵테일의 향기들만큼이나 그를 달래주는 내음들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향들이 후각을 자극하지 못하게 되자 요한은 다시 불안해졌다. 옥상에서의 진원과의 일과 병원에서 만난 연주모녀 때문에, 그리고 고향에 내려갔던 날 이후로는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한 시은에 대한 생각 때문에 그의 머리와 마음은 몹시 심란했다. 마음이 갑갑하면 그림을 그리고 마음이 어지러우면 칵테일을 만드는 요한이었기에 지금 상황에서는 가게에 출근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었다.
요한은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며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찾았으나 비어 있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순간 자신의 독설에 충격받고 슬퍼하던 진원의 눈빛과 얼굴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진원이 그 모친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더 챙겼던 그 옛날처럼 이번에도 그 작은 말실수, 따지고 보면 요한 자신이 더 많이 말해온 그 말 때문에라도 더 자신을 용서하고 붙잡을 것만 같아서, 그렇게 세상에 둘도 없는 대인처럼 굴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그를 자신은 끝내 거부하지 못할 것만 같아서, 오랫동안 숨겨왔던 의구심에 악의를 더해 진원에게 더없이 악랄하게 굴었다. 그의 어머니를 향한 원망까지 더해. 그 아비에 그 아들, 피는 못 속인다고 했던 그 잔인한 말을 그녀의 아들에게 돌려주고야 말았다.
요한은 눈가를 훔쳤다. 진원의 유난히 까맣고 또랑또랑한 두 눈동자를, 질풍노도의 시기 가출했을 때처럼 걱정과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지게 만들 일이 또다시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이었다.
결국은 이게 너에게도 나을 거다. 어차피 예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다. 아무리 네가 정 많고 착한 녀석이라도, 네 여자를 탐낸 나를 전처럼 믿어줄 수는 없을 테니까. 전처럼 나를 보고 해맑게 웃어줄 수는 없을 테니까. 그건 신 아니면 병신만 가능한 일일 거다…
요한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쓸어내며 쓰게 웃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 내가 좋은 여자는 임자가 있고, 나를 좋아하는 여자들은 도무지 그런 마음이 안 들고… 나는 샘이 났던 걸까. 저래서 서로 사랑하고 결혼까지 하는구나… 처음 본 날 알아버렸지. 어쩌면 너라면, 너 같은 여자라면 나도 남들처럼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한 걸까. 하지만 나는 진원이가 아니지. 그렇게 될 수 없지.
요한은 눈을 감았다. 당장에라도 시은에게 가고 싶었다. 그녀 품에 안겨서 실컷 울고 싶었다.
너는, 그래 차라리 다른 여자들처럼 내 몸을 원했으면, 그때 그 여자처럼 남편 몰래 몸만 섞자고 덤벼들었으면 좋았을까. 아니, 그러지 않아서 좋았던 걸 거야. 흔들리지 않으려 기를 쓰는 모습이… 그렇게 애쓰다가 아프게 된 거잖아. 나 때문에 그 비를 다 맞고 넘어져 다치고… 그런데도 나는 네게 갈 수 없지. 가면 안 되지.
요한은 차라리 연주모의 말을 따를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연주에게 마음은 아니더라도 몸이라도 내어줄 수 있다면 좋겠다 생각했다. 아니 그마저 기다리겠다고 했으니 그저 그 아이 옆에만 있는 채 어디라도 멀리 훌훌 떠나버리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러면 연주도 괜히 또 아플 일 없을 테고 그래, 내 엄마도 찾을 수 있을 텐데.
엄마…
요한은 다시금 눈물이 솟았다.
엄마는 대체 왜… 그러려고 날 버렸어? 그럴 거면 왜 날 낳았어. 날 낳고는 웃긴 했어? 아기였을 때, 내가 기억 못할 때는 날 보고 웃어줬어? 하랑이가 진원이랑 꼭 닮아 더 마음 갔었지만 어머니가 하랑이한테 하는 걸 보면서 나도 저랬겠지, 울 엄마도 그랬겠지, 그래서 더 옆에 붙어 있었어. 하지만 엄마는 나한테 안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걸 어른이 되며 알았어. 그런데도 날 버린 엄마가 다른 자식한테 그러는 건 용서할 수 없었어. 그래서 잊으려고 했나 봐. 그런데 그렇게 살았다고… 나보다도 더 불행하게 끔찍하게 살았다고…? 이제 와서 나더러 어쩌라고.
요한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진원, 시은, 연주, 그리고 엄마까지 떠오르자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는 숨을 고르며 빨리 생각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물귀신 같은 생각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려면 다른 무엇인가에 집중해야만 했다.
그는 다급히 형광등을 켰다. 눈이 부셔 잠시 눈꺼풀로 덮었던 눈을 다시 뜨고 그는 민선생에게 부끄러워 벽면 한구석에 뒤집어 세워둔 자신의 화판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것의 앞면을 보고서는 얼어붙었다.
두 남녀, 아니 진원과 시은이 마주보고 있는 모습이 흐릿하게 그려져 있는 연필 스케치였다.
그들의 결혼선물로 주기 위해 작업을 시작했던 것을 요한은 어느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직은 시작 단계여서 그림 속 인물들의 이목구비는 위치만 대강 잡혀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진심으로 축하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을 다해 그렸던 자신을 기억해낸 요한의 눈에는 그들의 행복한 표정이 보였다. 둘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사랑이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씨X…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뇌까렸다. 그리고 그 욕을 되풀이했다. 점점 목소리가 커졌다. 그는 울부짖으며 발을 굴렀다.
그 그림 속의 행복한 두 사람을 현실에서는 아프게 하고 울게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어쩌면 자신 때문에 현실의 두 사람이 그림처럼 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러기를 바란다는 것을 벼락처럼 깨달은 요한은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졌다. 그는 그림을 던져버리고 이젤 옆 책상 위에 놓인 미술도구들 속에서 민선생의 조각칼을 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