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정지화면처럼 보였지만 시간은 조금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또다시 보름에서 스무날 가량의 날짜가 바뀔 동안, 세 남녀와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은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도돌이표처럼 반복했다.
시은은 아침저녁으로 들볶는 어머니에게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원이 아량이 넓어 앞날을 다시 논의중이긴 하나 그 모친 정여사의 허락 없이는 재결합이 어려울 것 같다고, 그분이 확실히 용서해주지 않는 한 시집살이가 무서워서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고 시은은 차분히 말했다. 별달리 잘못한 게 없었는데도 그저 며느리란 이유로 고약한 시어머니에게 시달리며 보낸 세월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는 한여사는 말문이 막혔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다가도 드물게 모친의 편만 들었던 그녀의 남편은 어정쩡한 상태로는 절대 시집 못 보낸다고 이번엔 자식의 편만 들고 나서 한여사는 더 기가 막혔다.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 사부인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빌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너그러이 봐줄 안사돈이 아님을 한여사야말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딸이 봐주고 남편이 들여주는 밥상을 게눈 감추듯 비워내고 짐짓 아이고 소리를 하며 다시 머리를 싸매고 드러눕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짝짜꿍이 맞는 부녀가 꼴 보기 싫어 주말에 불러올린 둘째자식이자 외아들인 재영을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뿐이었다.
진원은 누이동생의 지적을 수용하여 세 번에 두 번은 주말에 본가에 내려가며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었다. 심지어 그 싫어하는 예배에도 정여사의 성화에 아버지의 정장까지 빌려입고 끌려가서는 빗발치는 문의에 법률자문 노릇까지 해야 했다. 보다 못한 김원장이 아들을 빼돌려줄 때까지 정여사는 모르는 척, 아니 짐짓 사람들을 더 불러모아 진원을 시달리게 하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아니 그러고 보니 왜 신붓감이랑 인사 안 와요? 우리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데. 아이 아직 날도 너무 덥구… 찬바람 좀 불면 오라고 해야죠. 남의 집 귀한 딸, 주말에야 겨우 쉴 텐데 괜히 더위라도 먹으면 어떡해. 어머 역시 우리 정권사님은 마음도 넓으셔~ 아첨하는 여신도들에게 둘러싸여 흡사 인자한 여왕벌인 듯 구는 어머니를 보며 진원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아무래도 수십 년간 서울까지 부지런히 오가며 사교활동을 해온 어머니가 집순이 약혼녀보다 훨씬 더 고단수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라도 진원은 정여사보다 약자인 시은에게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요한은 그저 엄마 소식만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었다. 지수와 태수가 너무도 끈질기게 설득하는 바람에 진이 빠진 요한은 연주가 가게에 오는 것을 마지못해 허락은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연주는 바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구석자리로 쫓겨나, 유배지에서 임금을 다시 배알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벼슬아치와 같은 신세로 전락했다. 별다른 문학적 소양도 없고 학문적 지식도 없는 연주는 시조 한 수 읊지 못하고 상소문 한 편 쓰지 못한 채 그저 묵묵히 칵테일 바에 출근도장을 찍을 뿐이었다. 그나마 지수가 옆에 있어주고 태수도 가끔씩 와서 말을 걸어주어서 연주는 서러운 와중에 그들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네 더러운 성질머리, 내가 잘못 키워서이긴 하지만 너도 이젠 어른이야. 언제까지 떼쟁이 어린애로 살 거야. 아빠마저 가고 나면 너랑 나 둘뿐인데, 지수나 바 사장님처럼 믿음직한 사람 만나기가 어디 쉬운 줄 알아? 너 그렇게 돈자랑했어도 옆에 붙어 있는 친구라고 할 만한 애 하나도 없잖아. 그만큼 네가 지랄맞은 거지. 요한 씨 말이 맞다. 누굴 탓해.
충동적으로 일을 저질러놓고 후회하며 또다시 탈진하도록 우는 연주를 달래고 요한의 전화까지 대신 받아준 지수와 달리, 연주모는 퍽 냉정했다. 미안하면 요한 씨 어머니 무사하게 해달라고, 얼른 찾게 해달라고 진심으로 기도해. 그거 아니고서는 안 풀릴 거다. 나 같아도 그런다.
어려서 몇 번씩 수술했을 때조차 연주는 그 존재를 원망할지언정 빌지는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아픈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였다. 이토록 자신을 아프게 하고 그로 인해 엄마아빠를 울게 만드는 신따위는 필요 없다고 어린 연주는 감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태어나 처음으로, 연주는 무려 무릎까지 꿇고 두 손을 모았다. 하느님 부처님 산신령님 옥황상제님 제우스님 해님별님달님…? 연주는 아는 모든 신적 존재들을 불러모았다. 역시 특정 종교가 없었으나 지수가 웃으며 어린 동생 옆에서 거들어주었다.
음식점에서 만났던 날 이후 시은과 진원은 가끔 통화만 했을 뿐 대면하지 않았다. 시은은 이나에 대한 질투심과 진원에 대한 미련을 솔직히 인정하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더 냉정히 생각해봐야 한다며 진원과의 만남을 거절했다. 단순한 자신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식는 타입이기 때문에 그를 보지 않고서도 그에 대한 마음을 포기할 수 없어야 비로소 정여사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고 진원이 내미는 손을 떳떳이 잡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자기도 그 여자 때문에, 그 여자와 술 마시고 한 짓 때문에 괜히 죄책감에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자긴 착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어설픈 호의나 동정심이,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잖아. 나를 봐. 그래서… 적어도 우리 둘 사이에서 자기는 더는 착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옳았으면 좋겠어.
따지고 보면 정여사와 비슷한 말을 하는 것인데 시은에게는 반발심이 들지 않았다. 아 이래서 더 어머니가 서운해하시는 건가. 진원은 또다시 모친께 송구스러웠으나 잠깐이었다. 낳고 길러주신 분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진심으로 원하는 사랑과 결혼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진원의 결론은 이미 확정이었으나 그는 잠자코 시은의 말대로 했다.
그러면서 그는 요한을 생각했다. 일주일에 몇 번은 봤던 친구놈을 안 본 지가 어느새 한 달에 가까워져 있었다. 요한이 생모와의 상봉을 꿈꾸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은이 이별을 고하며 말했던 것처럼, 그 역시 불행한 요한을 두고서는 마냥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진원도 연주처럼, 요한이 생존한 생모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그 행방의 실마리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고 요한은 점점 절망해갔다. 상상하기도 싫은 상상을 하며 요한이 불안함과 초조함으로 미칠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는 예상치 못한 사람의 연락을 전달받았고 꿈에도 생각 못한 사람을 마주했다.
요한의 친부 장원장이 후배를 통해 아들에게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김원장은 본가에 내려온 진원에게 먼저 말해주었다. 오랜 투석 끝에 이제는 이식 밖에는 답이 없다는 이유로 버렸던 아들을 찾는 장원장에게 진원은 태어나 처음으로 살의를 느꼈다. 그리고 요한의 잔인하기 짝이 없는 운명에 치를 떨었다. 아니 운명이든 우연이든, 전생의 죄업이든 뭐든 다 상관없었다. 확실히 보이고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처한 현실 그 자체뿐이고, 대응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 역시 그뿐이었다.
진원은 흥분하여 요한에겐 입도 뻥긋할 생각도 하지 마시라고 부친에게 버르장머리없이 외쳤다. 그러나 김원장은 그래도 천륜이고 장남인데 어쩌랴 힘없이 말했다.
그 천륜을 끊은 장본인이 그분이잖아요?!
진원은 온화한 인격자인 아버지에게는 한 번도 대든 적이 없었다. 대들기는커녕 그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아버지였고, 그런 아버지를 가졌음에 늘 감사해왔다. 물론 그 때문에 더 요한이 가엾고 미안해져서, 정여사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어른이 되기 전엔 아주 가끔은 부친에게 서운한 때도 있었으나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속 좁은 스스로를 뉘우쳤다.
그런데 그는 이 일에 대해서만큼은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었다.
그래도 그러는 거 아니다… 어차피 공여 여부야 요한이가 결정할 문제고… 그러면 그 양반 얼마 안 남았다…
그분 때문에 요한이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나도 할 말이 없지. 친자식처럼 대하겠다고 마음먹고 데려와서는 결국 상처주었으니…
……
나라도 적극적으로 네 엄말 막아야 했는데. 하랑이가 더 소중한 건 어쩔 수 없더구나.
…요한이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그저 친동생처럼 예뻐한 것뿐이에요. 저보다 훨씬 더 끔찍하게요.
안다. 그래도… 부모 마음이란 게 이렇게나 염치가 없는 거란다. 너도 자식 낳으면 이해할 거야.
그런 마음은 이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진원은 어디선가 읽었던 가장 이기적인 존재는 부모라는 말을 떠올리며,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을 누르려 노력했지만 불퉁스러운 말투를 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그저 쓸쓸히 웃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다면 그건 행운이겠지. 그럴 일이 없다면…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런 모순적인 마음이 들 일이 없다면 말이다.
아버지의 눈빛이 더없이 슬퍼 보였기 때문에 진원은 그쯤에서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가장으로서의 존재감은 늘 부족하지 않았던 부친 역시 늙어가고 있다는 것이 순간 느껴져서 진원은 울컥했다. 어머니처럼 아버지도 어깨가 좁아지셨을까. 그러나 진원은 아버지를 안아드리는 대신 자신이 요한에게 그 기가 막힌 소식을 전하겠다고 조용히 말했다. 자신이 말려도 천륜운운하는 아버지는 기어코 요한에게 말을 전할 것임을, 그런 부친에게서 듣고서야 싫어도 싫다 하지 못할 요한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어서였다.
그러나 요한은 마치 그 순간을 고대한 듯 또다시 광기로 눈을 빛내며 흔쾌히 수락했다.
노인네, 그까짓것 떼주고 말지. 고민 끝에 칵테일 바에 불쑥 찾아가 어색하기 짝이 없는 공기를 참아내며 진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것이 무색할 지경으로, 요한은 앓던 이가 빠진 듯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심지어 그는 피식피식 웃다가 박장대소까지 했다. 진원은 시은과의 일을 처음으로 폭로했을 때의 요한에게 그랬듯 반쯤은 그에게 무섬증을 느끼고 반쯤은 그에게 질려서 도망치듯 가게를 빠져나가야 했다.
요한의 친부는 명의를 찾아 이미 상경해 있었던 터라 그 친자는 곧바로 이식을 위한 사전절차를 밟았다. 그러나 수술실이 아니고서는 부친과 한 공간에 있지 않는 것을 요한이 조건으로 내걸은 탓에 부자간의 재회는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요한이 마침내 병원에서 얼굴을 마주한 피붙이는, 불행한 어머니도 오욕의 아버지도 아니고 외국유학이다 뭐다 바쁜 배다른 형제들도 아닌, 그저 어렴풋이 존재만 알고 있던 이복누이 희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