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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는 비와 스쳐가는 바람을 싫어하게 된 것이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주 어릴 적 축구를 하고 친구들과 뛰놀 때에는 내리는 비를 즐겼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비를 좋아했던 마지막 기억이다. 그 뒤로는 비는 늘 끔찍하게 싫은 것이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밖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고, 학교에서도 온갖 핑계를 대면서 조퇴를 신청해서 빨리 학교를 떠서 집에 갔다. 나이가 더 들어서 집회를 하건, 선거 운동을 하건, 세미나를 하건 내가 평소에 좋아했던 그 어떤 것들도 비는 다 끔찍한 것들로 만들었다. 사실 비는 그렇게 만들지 않았다. 비가 오면 내가 모든 것을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비'자체를 싫어하기보다는 비가 내리면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들을 싫어한다. 비가오면 웅덩이에 물이 고이고, 습기가 많아지고, 밖에 나가면 온 몸과 가방에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리고 몸이 아프다. 힘겹게 집에와서 샤워를 하고 방에 누우면 급격하게 늘어난 모기들이 나를 위협한다. 흠뻑젖은 옷을 빨면 햇빛이 나지 않아서 옷은 마르지 않는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든 '비'의 다양한 얼굴을 나는 싫어한다. 얼굴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으나 얼굴을 확인할 수 조차 없이 높이 있어서 나는 일방적으로 구름의 침 덩어리인 '비'를 두들겨 맞는다.
짧게 내리는 소나기나 겨울비, 봄비도 싫어하는 나에게 폭풍이 북상하거나 장마전선의 등장으로 일주부터 한달까지 주구장창 내리는 '장마'는 나에게 지옥주다. 최대한 밖에 나갈 일이 없기를 기도하고, 나가도 짜증 가득한 얼굴로 사람들을 맞이 한다. 노동을 하는 날에도 힘이 없고, 일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장난스럽게 오늘은 비가 오니까 천천히 쉬면서 일하자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글로 쓰고는 있지만 장마는 정말 글이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기분과 감정의 '똥'들을 내안에 만들어낸다. 'x개같은 날' 딱 그 정도가 내가 정의할 수 있는 장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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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7.3
저 밑에서 태풍이 북상했고 부산이 영향권에 들었다. 어김없이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가 내리고 있다. 그런데 왠지 오늘은 예전처럼 비와 바람이 그리 싫지 않다. 여전히 나를 찝찝하게 하고 내 가방을 젖게 하지만, 새로 구입한 내 가방은 방수가 되고, 한수원에서 받은 우산은 생각보다 튼튼해서 강한 바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여러 가지 준비들이 나를 비로부터 보호해주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큰 것은 비에 대한 생각의 변화다.
저번주 주말은 감정적으로 힘든 날들이었다. 친구를 만나서 즐거웠지만 이야기를 나누면서 여러 생각들이 교차하면서 크게 마음이 동요했다. 동요를 이겨내지 못하고 거짓말을 하고 알바를 이틀이나 가지 않았다. 꽤나 큰 스케일의 거짓말을 쳐서 점장님이나 같이 일하는 친구에게 몇 번이나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거짓말과 거짓말의 알리바이들을 맞추고 이야기하는 작업도 큰 정신적 스트레스였고, 말하고 나서도 사람들이 나를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하고 뒷담화 할 것이 두려워서 공포에 떨었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고도 월요일에 쉬지 못하고 다른 알바를 가야한다는 것도 큰 스트레스였다. 심지어 이 알바는 아직 적응하지 못해서 가는 것 자체인 알바였다. 레시피도 외워야하고 일하면서 이것저것 배웠던 것들을 되새김질 하는 일도 필요했다.
어떻게 어떻게 월요일에 알바를 다녀와서 오늘이 되었다. 여전히 해야하는 것들은 있지만, 막상 일을 갔다오니 스트레스 받았던 것들 중에서 많은 것들이 해소되었다. 마음의 찌꺼기 같은 잔여물들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것들은 이 글을 쓰면서 정리해서 버리고자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던 차에 비가 세차게 내렸다. 그 비를 보면서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던 말을 경험했다. 원래라면 끔찍해 했을 장면이지만, 오늘은 내 마음의 찌꺼기들을 씻어내려보내 주는 시원한 장면으로 보였다. 비가 시원하게 내리는 것처럼 보이다니! 태어나서 처음하는 경험에 생경하기도 하고, 내가 정신적으로 성장했는가 싶어서 뿌듯하기도 했다. 내가 비를 마음먹기에 따라서 시원하게 느낄 수도 있다면, 세상에 웬만한 것들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 어디까지 그것이 가능할지 실험을 해보고 싶어졌다. 일단은 내일 있을 알바부터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하루 더 잘 버텨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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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언이라는 '말'이 너무 말이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 문제지만 더 문제적인 것은 그 겪언의 내용들을 체험할 삶의 여유나 기회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