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나는 현상적으로 방황하며, 실재적으로 속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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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SNS에 들어갔다가 본 글귀다. 속지 않는 자는 방황한다. 대단한 문필가나 작가가 쓴 말은 아니었지만 이 말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내가 '속지 않는 자'라는 감각이 커서보다는 '방황하는 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의 나를 '방황하는 자'라고 정의한다.
나에게 '방황'이란 무엇일까. 삶의 뱡향성을 상실해서 어떤 일이나 목표를 향해 집중하고 있지 않는 것, 계속해서 계획이나 고민만 하는 상황. 이것이 나에겐 '방황'이다. 방황을 설명한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삶의 뱡향성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어떤 삶, 어떤 사람, 어떤 감각, 어떤 경험, 어떤 목표들이 모여서 '뱡향'이 된다. 나는 지금 그것을 상실했고 그것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처음 방황을 시작했을 무렵에는 반드시 어떤 하나의 뱡향성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런 하나의 뱡향성은 존재하지도 않고,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나를 피폐하게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 날 그날, 혹은 그 주의 나의 목표와 행복을 위한 발버둥들이 모여서 하나의 뱡향성을 형성하고 다시 사라진다. 그것이 총체적으로 질서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질 때 나는 다시 뱡향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만이 내 삶을 보람차고 행복하게 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원하는 삶과 세상의 모습을 그리는 것에 조금 더 가까워 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찌되었건 더 보람찬 '방황'을 위해서 나에게 당장 중요한 것은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 나의 에너지와 자원들을 적절하게 배분하는 일이다.
나의 나이가 20대 중반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나의 방황은 용서받고 인정받는다. 응당 그래야할 시기라고 어른들과 주위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나의 방황이 좀 더 길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방황하는 동안 나는 더 질겨지고, 튼튼해지며, 때로는 유연해진다. 그것만으로도 나의 방황은 충분히 의미있다. 그것에 나이를 통한 사회적 인정은 그리 중요치 않다. 방황 속에서 내가 이전보다 나아지고, 행복을 찾아간다면 죽는 그날까지 방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삶은 목표를 찾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행복 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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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주어인 나는 '속지 않는 자'일까 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과거에는 나는 분명히 속지 않는 자이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을 알고있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아니, 강하게 확신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 확신은 흐려지고 있다. 내가 모르는 것은 너무나도 많으며, 속지 않기 위해서 지식을 쌓고, 이성을 단련하고, 비판적 지성을 다루는 연습을 꾸준히 하기에는 나는 너무 게으르고 지배질서의 단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돈을 벌면 행복하고, 돈을 쓰면 더 행복하다. 내 방에 새로운 물건들이 하나 둘 쌓이는 것이 지금 내 삶의 가장 큰 행복이 되었다. 수입과 지출에만 둘러쌓인 삶을 사는 것은 불행하고 속는 삶이라고 확신했던 과거의 내가 봤을 땐 지금의 나는 속는 자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속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자다. 그 증거로 나는 방황한다. 내 삶에 대해 반추하고, 내 생각들을 검열한다. 사상에 민감해지려고 하고, 감각에 예민해지려 노력한다. 하루에도 몇번씩 후회와 좌절 속에서 자신을 놓아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묵묵히 나의 왼쪽 손을 잡으며 앞으로 나아간다. 뱡향성을 찾아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지금의 내가 보기엔 나는 속지 않는 자다. 속지 않는 자여서 방황을 하는 것인지 방황하는 자여서 속지 않는 자인지 그 둘의 관계는 아직 규명하지 못했다. 다만 나는 현상적으로 방황하며, 실재적으로 속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