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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글쓰기 모임 1차 과제>

by 바다

<노동자 글쓰기 모임 1차 모임 과제>
- 나를 6단어로 설명하기


1.아버지
어릴 적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되고싶었다. 사람들에게 유들유들하게 대하고, 사교성도 좋은 사람이었다. 또 강단있게 결정하고 남들과 맞서는 상황이 되면 '남자답게' 싸웠다. 어릴 적 부터 우리 형제에게 진짜 남자다움에 대해서 알려주고, 윽박을 질러서 우리에게 그것을 각인시켰다. 아빠는 분명 나에게 멋진 사람이었고 닮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아빠와 같은 삶을 살고싶지는 않았다. 큰 돈을 벌기 위해서 사채업을 해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혔고, 그나마 번돈을 모두 날렸다. 아빠는 실용불량자가 되었고, 우리집에는 법원압류딱지 흔히 이야기하는 빨간딱지가 붙었다. 엄마는 식당에서 일을 시작했고, 우리집과 나의 지독한 가난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아빠처럼 한탕을 노리다가 가족까지 힘들게하고싶지 않았다. 공무원이든 뭐든 안정적인 직장에서 일하려고 노력했다. 피는 어지간히 진한 것인지 지금의 나는 아버지처럼 불안정한 삶을 살고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등본에 내가 세대주로 등록되어있지는 않다는 것 정도다. 아버지는 말년에 정신질환을 얻었고, 어머니가 바람을 피고 있다는 믿음에 사로 잡혀서 결국엔 엄마와 이혼해서 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떠났다.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다. 어릴 적 아버지가 윽박지르고 나를 남자로 키우고자 했던 일에 대한 경험들로 인해서 나는 지금 정신과에 다니면서 우울증 치료를 받고있다.


2.어머니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다. 엄마 같은 사람은 되고싶지 않았다. 사소한 것에 화내고, 큰 것에는 무던했다. 정확히는 작은 돈에 민감하고, 큰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던했다. 모든 것을 경제관념과 돈으로만 보고 판단했다.엄마는 내가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의존하고자 하면 쌍욕을 불사하면서 나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아들인 나에게 조차 경제적으로 손해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엄마의 이런 성품 덕분에 우리집은 가난하지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용불량자가 된 경제무능력자인 아빠 대신 엄마가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우리 가족이 먹고 살았다. 엄마의 삶처럼 조금씩 벌어서 먹고 살기만 하는 삶을 살고 싶었지만, 엄마와 같은 인품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지금도 나를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눈엣가시 같은 인간으로 보고있는 것 같다. 엄마와 집에 있으면 좌불안석으로 제대로 쉬지도 못한다. 아빠는 나의 정신병의 근원이었지만, 내 정신병을 악화시키고 악화된 상태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엄마다.


3.돈
늘 없었던 것이다. 아주 어릴 적을 제외하고 늘 돈이 없었다.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내 책상에는 항상 법원압류 딱지가 붙어있었다.엄마와 아빠는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돈 문제로 싸웠다. 외할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가게 되었을 때 병원비를 내지 못하는 우리 부모님은 '믐으로 때워라'는 이야기를 들어야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제대로 된 용돈이라는 것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대학교 와서 처음으로 용돈을 받았고 한달을 20만원으로 버텼다. 그래도 아르바이트를 안하고 버티다가 엄마에게 쌍욕을 듣기도 했다. 등록금은 한번도 먼저 내본적이 없고 일단은 대출을 받고 장학금을 받아서 겨우 갚았다. 덕분에 대학시절의 수업은 빚을 갚기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학점이 잘나오면 빚이 줄어들었고, 학점이 잘 안나오면 빚이 늘어났다. 남들은 가장 인생에서 빛나는 시기에 나는 가장 많이 빚을 지고 살았다. 지금은 주말에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풍족하게 살고있다. 여전히 빚이 달달이 조금씩 생기고 그것을 갚아가고 있지만 이전보다 '시민'으로 살고있다고 느낀다. 앞으로도 수익은 크게 늘어나거나 하지 않을 예정이라 어떻게 돈을 벌고 살지가 늘 고민이다.


4.운동
exercise는 아니고 movement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친구따라 어떤 동아리에 들어갔다가 나는 흔히 이야기하는 학생 운동권이 되었다. 그 뒤로 카르마라는 인문학회에서 학회장으로 오래 활동했다. 방학이면 밀양으로 농활가서 송전탑을 막는 할머니들과 함께 경찰과 한전직원들과 싸웠고, 학기중에는 학교직원들과 투닥거리며 싸웠다. 노동자 집회에 가서 팔뚝질하면서 노동요를 부르는 것을 가장 즐거워했다. 함께 운동하던 동료들과 새벽에 편의점 실태조사를 하면서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부산지부를 만들었고, 청년들의 생태주의 운동을 만들어보겠다고 청년초록네트워크도 했었다. 노동당이라는 정당에서 부산시당 청년학생위원장도 했었다. 권위는 있는 자리였지만 재미는 없었다. 늘 꿈이었던 상근인력을 갖춘 종합인문학공동체를 추구하며 인권네트워크 사람들을 만들어서 '사람들 토크콘서트'를 성황리에 진행했다. 인권네트워크 사람들은 활동하던 조직의 문제로 공중분해 되었고 지금은 따로 운동이라 부를 만한 것은 하지 않는다. 그저 과거에 했던 운동들을 반추하며 평가하고 글을 쓴다. 앞으로도 쭉 운동을 하면서 살 생각이고, 어떤 운동을 하면서 '먹고' 살지 고민이다.


5.우울증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단을 받아서 4월부터 병원을 다니고 있다. 심할때면 사람들이 나를 칼로 찌를 것만 같은 공포에 시달리고, 멀쩡히 달리던 버스가 폭파하거나 갑자기 사고나서 죽는 상상 때문에 힘들어한다.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잘 못잔다.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40대 이상 중년 남성들의 모습이나 목소리 행동 등을 보면 극심한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폭력적인 남성들 문화에도 잘 끼지 못한다. 주기적으로 무기력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집에 누워있고, 심해질때면 자살충동이나 자살시도를 하기도 한다. 처음엔 좌절스러웠지만 이제는 평생 동반자처럼 끼고 살면서 약만 잘 챙겨먹으면서 살아볼 생각이다.


6. 군대
학생운동 한다고 군대를 가지 않았다.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핑계로 4급을 받아서 공익을 가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두렵다. 남자를 무서워하고, 40대남성들을 두려워하고 총과 칼 등에 큰 공포를 느끼는 나에게 군대는 상상만으로도 무서운 곳이다. 되도록 이면 어떤 방법을 써서도 가고 싶지 않다. 우리 동생은 최전방 GOP를 나와서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나를 항상 한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최근에 대체복무제 인정 판결이 나서 기뻐했지만,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집총만 하지 않는 군대 업무를 시킨다는 뉴스를 보고 좌절했다. 역시 한국에는 미래가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라도 많았으면 이 나라를 떴을텐데 그럴 돈도 없어서 서럽다. 일단 영장은 올해 10월로 나왔다. 올해 안에는 현역이든 공익이든 결과가 나올 듯 하다. 꼭 공익을 가고 싶다. 현역을 나와도 어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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