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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진보신당에 입당하기 전까지 나의 유일한 선생님은 내 동아리의 선배들이었다.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진리처럼 들리고, 그 사람들이 제안하는 것은 정말 사회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선배들을 잘 따라다녔고 하자고 하는 것들을 열심히 했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근현대사 책을 사서 머리를 싸매면서 읽고, 동아리에서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해볼려고 입을 오물거렸다. 결과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잘 따라갔던 나는 학생운동 내부에서는 꽤 괜찮은 활동가로 자랐다. 하지만 그 때에도 운동과 내 미래를 연결시켜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선배들이 하자고 했던 것들을 따라서 했던 것이기에 나의 비전이나 목표가 없었다. 학생운동에서 이런저런 대표를 하면서 '중책'이라는 것을 맡을 때에도 시간이 지나서 군대 다녀오면 선배들이 내 일자리나 먹고사니즘을 해결해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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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일한 생각이었다. 선배들이라고 하지만 나보다 겨우 5~6살 많은 20대들이었고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미래도 책임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 선배들도 자신들의 선배들이 자신들을 먹게 해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마 그 선배의 선배까지 꼬리를 물고 올라가는 폭탄돌리기 였을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나서 운동을 더 이상 할지 안할지에 대한 고민도 많이했다. 운동을 해도 먹고살 수 없다면 운동을 하는 것은 나에게 의미가 없었다. 운동을 할 것인가 안할 것인가, 어떤 운동일 것인가 등등 이런저런 번뇌의 시간을 몇년을 경과하고 최근에 와서야 생각을 정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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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생운동과 청년운동의 선배들은 학생운동에서는 빛나던 사람들이었지만 그 사람들도 학생운동 이후에 대한 준비는 하지 못했다. 그럴 기반도 없었고, 그것을 해야한다는 인지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자신만의 '모임'을 가지는 것을 강조하던 선배들이었지만 내가 한참 학생운동을 하던 시기에 선배들은 나만큼 열정적으로 '모임'을 만들지 않았다. '모임'이 곧 운동의 성과이고 그것이 자신의 운동을 증명하던 시절에 선배들에게 혼나고 집에 돌아가면서 불만이 생겼다. 선배들은 나만큼 모임도 안하면서, 나만큼 대중들을 동원할 수도 없으면서 왜 나한테 뭐라고 하기만 하는가. 내가 모르는 각자의 모임이나 운동을 하고 있었겠지만 당시에 내가 보기에는 억울했다. 당시 주위의 분위기상 '모임'을 만드는 것은 20대 학생운동가인 나와 우리 동료들의 역할처럼 되어있었다. 30대면 30대들이랑 청년모임을 하면되고, 40대면 40대 노동자들이랑 모임을 하건, 무슨 모임을 하건 모임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더 높은 선배일 수록 그 선배들은 모임을 하지 않았다. 일부 선배들은 모임은 하지 않으면서 내 모임을 관리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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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선배들은 그랬지만 학교에서 만나는 일명 NL선배들은 그렇지 않았다. 40대가 넘은 선배가 모임을 조직하기 위해서 학교에서 애기를 데리고 유인물을 배포했다. 또 다른 40대 선배는 민주동문회라는 이름으로 자신 세대의 모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도 자신의 후배들의 모임을 관리하고 했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모임을 몇십년이 넘도록 꾸리고 있는 선배들의 관리는 납득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배들은 선배들을 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내 운동의 직속선배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삶을 잘 알지도 못했고, 얼핏보이는 사람들의 미래는 별로 따라가고 싶을만큼 매력적이지 않았다. 조직의 명령을 이행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일 뿐 개인적인 운동의 비전이랄 것이 없어보였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이긴 했지만 매력적이지 않아서 그렇게 살고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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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에 입당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나의 학생운동 선배도 아니고 그냥 같은 당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당의 선배들은 활기찬 사람들이었다. 자신만의 운동에 대한 비전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서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당에서 반짝이던 사람들이 있었다. 정책위의장이었던 장석준, 녹색위원회 위원장이었던 김현우 같은 사람들이 그랬다. 특히 김현우는 나의 선망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처음 입당하고 참여했던 신입당원 행사에서 김현우의 강의는 나에게 너무 매력적이었다. (사실, 무슨 내용이었는지 너무 오래되어서 정확히 기억은 안나지만 그 때의 느낌만은 생생하다.) 김현우는 개인적인 운동의 비전이 있었다. 운동을 하기위해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운동으로 만들고자 하는 명확한 세계의 상이 있었다. 학생운동의 선배들은 나에게 우리가 바꿀 세상의 이름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라 추상적으로 명명했지만, 김현우는 '녹색사회주의' 따위로 규정해서 구체적으로 명명했다.
난 그 뒤로 김현우의 추종자 같은 것이 되었고, 당대표 선거에서도 난 김현우를 뽑았고, 당명개정때에는(당권이 없어서 투표는 못했지만) 김현우의 무지개사회당을 지지했다. 그 뒤로도 김현우의 정의로운 전환을 읽으면서 노동과 생태적 전환은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해주었다. 정책위의장이었던 장석준이 진행하는 진보신당의 팟캐스트를 들으면서 세계진보정당의 역사에 관해서 난생처음 관심을 가졌다. 김상철 (당시 서울시당 위원장)의 무상교통이야기나 도시거버넌스에 관한 글들을 읽으면서 도시사회주의, 도시를 전유하는 것 등을 처음으로 꿈꿨다.
내가 속했던 정파나 조직은 그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지만 난 마음 속으로 그들을 존경했다. 그들이 조직적인 힘이 약해서 당세에서는 밀렸지만, 난 그들의 주장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난 내가 속해있는 정파나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 정파나 조직에는 삶을 걸고 어깨를 기댄 동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믿고서 그들에 대한 지지는 항상 마음 속으로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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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나에게 깨달음을 준 김현우나 장석준, 김상철 같은 사람들을 항상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꾸역꾸역 해나가는 운동이 아니라 스스로 창의성이나 자율성을 가지고 운동의 비전을 만들어나가는 실천을 했다. 나의 선생님들은 한분은 정의당에 가셨고, 한분은 당활동을 하지 않으시고, 다른 한분도 마찬가지지만 그 분들의 생각이나 글귀는 자주 찾아 읽고는 한다. 정치적인 글들이라 시간이 많이 지나서 얼마나 유효성을 가질지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여전히 그들이 이야기를 들으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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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생운동 선배들과 정당운동의 선생님들은 둘 다 나에게 많은 가르침과 힘을 주었다. 학생운동 선배들은 어떤 것에 헌신하고, 사람을 만나서 조직하는 법을 배웠다. 그 방식은 다르게 고민해야겠지만 근원적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틀리지 않았다. 정당운동의 선생님들은 나의 판단과 비전을 가지고 활동가로서 살아가는 비전을 보여줬다. 흔히 말하는 '뒷배'가 든든하지 않아도 신념을 가지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발휘하고서도 운동가로서 살아남을 수 있음을 알려주었다. 이 점에서 두 집단에게 모두 감사한다. 이후의 결정이나 목표 계획과 실천은 이제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