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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폼'잡기에서 벗어나기

허황된 권위 찾기에서 벗어나자.

by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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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아는 형과 이야기하다가 어떤 말을 들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랑 개인적인 관계는 별로 없었어." 그 자리에서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오늘 카페로 걸어가는 길에 이 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다. 그 형은 나보다 이 활동도 오래했고 그만큼 만났던 사람도 많았을텐데 '친하다'라고 느끼는 사람은 나보다 훨씬 적어보였다. 나는 그 형보다 활동은 몇 년이상 적게 했지만 형보다 친한사람, 아는사람은 훨씬 많다고 느낀다. 이 차이는 어디서 나타나는 것일까 궁금했다.

결론은 그리 어렵지 않게 나왔다. 내가 '폼'을 잡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폼'이라고 하면 전문용어(?)로 풀어보자면 '가오'이고, 좀 더 어려운 말로는 '권위'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집단이 있다면 그 곳에서 권위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다. 특히 대학의 학번과 나이를 중심으로 설계되는 '선후배' 질서 속에서 생물학적으로는 고작 1,2년에 불과한 차이를 커다랗게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권위를 쌓는 것에 집중했다. 권위를 획득하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과거에 나는 구성원들의 동의를 통해서 권위를 획득하지 않았다. 대신에 대단한 일을 하거나,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을 안다고 말하거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떠들어서 권위를 얻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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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형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이 형도 권위를 획득하는 것에 중요성을 인정하고 그것에 민감한 사람이다. 형은 이 권위를 행사하기 위해서 자신의 비전을 내세우고, 성과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실천을 한다. 독서모임을 만들고, 지역모임에 참여하고, 선거에 출마하고, 사람들을 꾸준히 만난다. 성과를 만들고, 그 성과를 다시 사람들에게 알려내는 방식으로 집단에서 권위를 획득한다. 이런 방식에 형 특유의 솔직함이 합쳐져서 꽤나 좋은 시너지를 발휘한다. 그래서 이 형은 7년전에 처음 만났을 때 부터 지금까지 항상 조직과 단체에서 중심에 서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그 위치에서 형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는다. 형은 항상 자신의 자리에 알맞는 계획을 세우고, 사람들을 조직하고, 성공적이든 아니든 계획을 끝까지 실행해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사람들과 함께 평가하고 다시 사람들을 이끌고 다음 계획으로 나아갔다. 긴장되는 평가의 순간에도 형은 과장하거나 왜곡하지 않고 평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다음 계획을 구성했다.

나도 일을 하면서 꾸준히 조직과 단체의 중심에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단체와 대표를 맡으면서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는 위치에 있었다. 형처럼 일을 계획하고, 사람을 만나고, 평가하는 과정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권위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자부하기는 어렵지만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일정정도의 권위를 획득했다. 나의 어려움은 계획이 끝난 이후 그것을 평가하는 부분이었다. 사람들이 사업과 계획에 대해 평가하는 것이 두려웠다. 내가 쓴 글과 계획에 대한 평가가 나에 대한 평가처럼 느껴졌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끊임없이 평가에 저항하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마시키려고 했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거나, 너희들이 잘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는 식으로 넘어갔던 적도 많았다. 최악의 경우에는 화를 내고 힘으로 눌러버리는 일도 있었다. 긴장과 스트레스, 불안이 마음 속에 가득했다.

그 때 나는 '권위'를 잃을 것이 무서웠다. 사람들의 비판과 평가가 나의 권위를 실추시킨다고 생각했다.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일정정도 우위를 점하려고 했다. 선배들은 이를 '지적 권위'와 '실천적 권위'라고 불렀지만 이것에 대해 이해하는 바는 사람마다 모두 달랐다. 그 중 나의 이해방식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이었다. 이 우위는 모래성처럼 매우 위태로웠다. 그래서 종종 무너지거나 도전받기 마련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그 권위를 다른 사람에게 내준적도 있었지만, 속으로는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래서 우위를 통한 내 권위가 도전받는다고 느끼거나, 다른사람에게 넘어가면 나는 '허풍'을 떨기 시작했다. 잘 모르는 어려운 학자와 책에 대해 떠들었고, 실제로 하지도 않은 일들을 했다고 말했다. 그것의 최고봉은 내가 대단한 사람들과 연락하고 알고있는 사이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서울에 누구누구가 어쩌고.." "대구에 누구누구가 어쩌고.." 다른 사람들은 이야기도 해보지 못했을 사람과 나는 연락도 하고 그 사람의 성격에 대해서도 잘 알고있노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 내가 말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권위만큼 내 권위도 올라갔다. 쉽게 말해 같은 급이 되었다. 이 전략은 꽤나 잘먹혔고 실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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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의 부작용은 다양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 스스로가 인간적인 관계가 매우 약하거나, 거의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놀라울정도의 친밀감을 보인다는 것이다. 친밀감을 느끼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친밀하지 않은데도 나는 친밀감을 강하게 느낀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나의 인생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을 마치 내 인생의 전부처럼 여기게 된다. 그래서 그들과의 연결이 끊어졌다고 느끼거나 더 이상 그들과 하나가 아니라고 느낄 때 엄청난 상처를 받는다. 실체가 없는 믿음에서 유래한 상처는 회복하기도 어렵다.

나는 운동을 하면서 나와 비슷한 활동을 했던 운동가들과는 전부다 '친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한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될 필요도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과 나는 직장동료와 같은 관계 였다. 직장 동료는 직장에 함께 있을 때에는 의지하고 친근감을 가지지만 직장이라는 매개가 사라지면 그 관계는 급속하게 필요성을 잃는다. 물론, 그 중에 직장이 사라지고도 존재하는 관계는 있지만 그것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로의 간판이 달라지는 순간 적까지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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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나의 믿음에 기초한 인맥을 동원했다. 이를 통해서 나는 '폼'을 잡는 것에 성공했고 내 권위를 유지했다. 이제는 직장의 간판이 달라진 나의 직장동료들과 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직장 동료였으니 직장이 달라지면 당연히 멀어진다. 나의 내면은 이들과 멀어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고 있다. 가장 사적인 부분에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가장 공적인 부분에서는 나의 '권위'를 잃고 싶지 않고, 다시금 권위를 회복하고 싶다는 욕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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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이것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해야할 때이다. 내 믿음과 필요에 기초한 관계에 의존하는 것을 끊어야한다. 고통스러울 것이고 삶의 중요한 부분이 떨어져나가는 기분이겠지만 그것은 기분일뿐이다. 상상의 관계를 끊는다고 해서 내 실존의 삶은 무너지지 않는다. 도리어, 이전과는 다른 식의 권위를 얻는 노력을 할 수 있다. 거짓의 담요를 덮어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썼던 에너지들을 실질적인 활동과 사람들을 만나는 것에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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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을 할 때면 선배들이 '폼'만 잡는 것에 대한 불만이 마음 한 구석에 있었다. 나한테는 모임을 만들고, 계획을 세우고, 실천을 하라고 노래를 불렀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모임을 안 만들고, 내 계획을 평가하기만 하고, 실천도 나와 동료들에게만 요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잘 모르는 활동들이 있었다고 믿고 있지만, 그 불만은 여전히 가득하다. 이런 불만이 눈에 가시처럼 잘보이는 것은 선배들의 태도도 있었지만, 나 역시 그들처럼 '폼'을 잡는 것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상 그들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고, 내심 그들처럼 되고싶기도 했다. 그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너무나 잘알 수 있어서 더 불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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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살아가면서 하게 될 활동에서는 더 이상 인맥이나, 허풍에 의존해서 권위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이다. 계획하고 실천하고 만나고 평가하기를 할 수 있는 한 하고 비판을 수용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허왕된 권위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삶으로 증명하는 것이 조금 더 나은 삶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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