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시 출품용 작품
1-1 싸움에 대한 시선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장애인들이 지하철 선로를 막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들 싸우는 건 좋은데 꼭 불편하게 해야되? 피해는 주면 안되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순간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딱 찝어서 화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어떤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이 마음 속에서 샘솟는다. 사람에 대해서 최소한의 예의나 이해가 없다고 느낀다. "당신 같은 사람은 사회에서 살 가치도 없어!"하고 소리라도 치고 싶어진다.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서사를 이해하려 노력해보지만 노력에는 한계가 있고, 감정은 이성보다 빠르게 작동한다.
전쟁광이 아닌 이상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갈등없이 평화롭게 살고 싶다. 파업같은 것 안하고 직장 조용히 다니다가 명예퇴직하고 싶고, 지하철 선로 점거 안하고 편안하게 지하철타고 맛있는 음식 먹으러 가고 싶다. 타인에게 비난과 모욕이 아니라 칭찬과 격려를 듣고 싶어 한다. 하지만 회사가 나와 동료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해고하고 징계를 하면, 세상이 예산을 핑계로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지하철을 못하게 하면 싸움이 일어난다. 아니, 싸움으로 내몰린다. 호소하고,대화하지만 과정이 끝나면 남는 것은 오로지 싸움이다.
유일하게 주어진 싸움이라는 선택지를 고르면 상황은 딱 2가지 결과로 귀결된다. 싸움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2가지 뿐이다. 이기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고, 지면 일상은 무너진다. 싸움은 절박해지고 강력해진다. 때로는 생과사의 영역을 넘나들며 싸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군가의 싸움을 지켜볼때 싸움을 선택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해보자.. 노력에는 한계가 있지만 노력을 안 하지는 말자. "저 사람들 왜 싸우지?" 하는 질문이 싸움을 막을 수도 있다.
2-1 바다에 대한 권리
26년을 해운대 바다 앞에서 살았다. 바다에서 썩어가는 미역내음과 바닷물의 짠 맛은 나에게는 고향의 향취다. 여름이 되면 아빠의 목마를 타고 바닷가를 구경했고, 좀 더 자란 후에는 아빠와 모래성을 만들고 몰려오는 파도로부터 지켰다. 고민이 많아지면 혼자 해운대 해변을 걸었다. 살을 빼기 위해서 동백섬을 몇 바퀴씩 뛰기도 했다. 내가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항상 바다를 배경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해운대 바다 입구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내 삶과 역사가 고스란히 해운대 바다 속에 녹아들어있다.
해운대와의 긴 인연 속에 좋은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릴 적 해수욕을 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을 뻔한 적도 있었고, 동생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내가 좋아했던 범퍼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철거되었고, 맛있는 간식거리들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모두 사라졌다. 지금도 호텔과 아파트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내 추억의 조각들을 밀어내고 있다. 어릴 적 나의 집이었던 곳은 고층아파트가 되었고, 나의 단골 포장마차는 공사장이 되었다.
어릴 적의 해운대는 사방이 구름과 하늘로 가득찬 이름처럼 '해운'의 도시였다. 고층 아파트가 생기고, 호텔이 생기면서 점점 구름은 아파트에 가려졌고, 하늘은 빌딩에 조각났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놀던 해변은 철저히 구획지어졌다. 파라솔은 강요는 아니지만 필수가 되었다. 매년 여름만 되면 여기저기를 뜯어서 공사를 하는데, 그 동안에는 해운대 주민들은 바다를 즐길 수 없다. 여기저기 위험하게 널린 돌판들과 세워진 포크레인이 바다의 풍경과 감성을 망친다.
해운대는 수 많은 이들의 낭만과 추억이 공존하는 바다다. 해운대의 주인은 그 낭만과 추억을 공유하는 모든 시민들이다. 이들에게 동의받지 않는 오로지 돈만을 위한 개발과 건설을 언제까지 지켜만 봐야할까. 하늘이 건물로 전부 뒤덮이면 그만둘까. 해운대에 더 이상 건설할 땅이 하나도 남지 않으면 개발이 멈출까.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은 희석되고 흐릿해진다. 하지만 이것을 노골적으로 파괴해서는 안된다. 20년은 더 살게될 이 도시에 나의 흔적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 두렵다. 그렇게 모두의 추억이 하나둘 파괴되어 간다면 이 바다는 누구를 위한 것이될까. 바다가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듯이, 해운대의 풍경도 어떤 것들의 전유물이 되서는 안된다.
3-1
영화 <부당거래>에 "호의가 계속되면 그게 권리인줄 알아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영화에서는 이를 부정하지만 저 말은 분명 사실이다. 사람은 계속된 호의를 권리로 받아들인다. 차별로 점철된 삶 속에서 좌절하는 사람에게 주어진 별 것아닌 호의는 힘을 준다. 그는 그 속에서 본능적으로 권리를 엿본다.
우리는 끊임없이 호의를 베풀어야한다. 계속된 호의는 권리가 된다. 해고에 저항하는 자신의 싸움이 정당한지에 대한 고민을 하는 한 노동자에게 '당신이 옳아요' '힘내세요'하는 끊임없는 사람들의 호의는 한 여성노동자를 수십미터 크레인위에서 몇백일을 버티게 했다. 그 결과 싸움은 정당한 것이 되었고, 해고에 저항하는 것은 권리가 되었다. 우리의 호의는 '그것은 나의 일은 아니다.'라는 시혜적인 생각에서 나오지만, 그것의 결과인 권리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서 보편적이고 평등하다. 존엄으로 대접받지 못하던 사람들에게 베풀어준 호의는 스스로를 하나의 인간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이러한 순환은 파괴력이 엄청나다. 사람의 마음의 망설임을 없애주기도 하고, 하나의 체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자. 담배 사러 들린 편의점에 있는 노동자에게 응원의 목소리와 1+1 음료수 1개를 선물하자.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낑낑 올라오는 택배노동자에게 문자로 감사를 표하자.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가 존엄한 인간임을 깨닫게 하자. 권리가 내뿜는 달콤한 향기를 맡도록 하자.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전달하자. 그래. 호의를 베풀자.
4. 스위치
스위치를 끄자. 살아가기 위해 스위치를 끄자. 세상의 온갖 더럽고 추잡한 것들로 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서 스위치를 끄자.
스위치를 끄자. 눈뜨고도 온갖 부당한 것들이 보이지 않도록 스위치를 끄자. 어둠 속에서 당당히 눈을 뜨고 살자.
스위치를 끄자. 나와 연결되어 있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자. 동료의 죽음이 느껴지지 않을 때 까지.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느껴지지 않을 때 까지.
스위치가 켜졌다. 가라 앉는 배의 모습을 보던 순간에 스위치가 올라갔다.
스위치가 켜졌다. 굴뚝 위에서 삶을 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에 스위치가 올라갔다.
스위치가 켜졌다. 버스를 타기 위해 쇠사슬로 몸을 묶었던 장애인들의 모습에 스위치가 올라갔다.
스위치를 켜자. 처절한 패배와 죽음을 위해 스위치를 켜자. 더러운 세상 속을 온 몸으로 구르기 위해서 스위치를 켜자
스위치를 켜자. 눈 감고도 온갖 불행이 몸으로 느껴지도록 스위치를 켜자. 찬란한 햇빛 속에서 눈을 감아도 삶의 어둠을 볼 수 있게 스위치를 켜자.
스위치를 켜자. 인연의 그물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지자. 동료와 함께 죽을 때 까지. 가난한 이들의 죽음이 나의 죽음이 될 때 까지.
그래. 스위치를 켜자.
5. 사랑'하기'
누구나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길을 가다 누군가 번호를 물어봐주길 기대하고, 길에서 우연한 사랑을 고대한다.
그렇게 사랑을 받길 원한다.
환상과 같은 사랑의 세계에 들어가길 원한다.
하지만 사랑은 받을 수 없다.
사랑은 본디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을 ‘하는’것이다.
사랑은 나누는 것이다.
예수도 그랬고, 부처도 그랬다.
그들은 무시받고 멸시 당했지만 가는 곳곳마다 사랑을 나눴다.
그리고 사랑을 했다.
우리가 인연이라 부르는 것은 주고받음이 아니다.
그것은 주고주고는 것이다.
서로가 끊임없이 주고 또 주는 것이다.
받는 이는 아무도 없다. 서로 사랑을 주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다 우연히 주파수가 같은 사랑을 줄 때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인연이다.
그러니 사랑받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사랑하기를 노력해야한다.
우리의 삶은 누구의 사랑은 받느냐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은 내가 누구를 사랑하느냐로 결정된다.
사랑하라.
사랑한다.
사랑하자.
6.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
고대부터 인류에게 죽음과 잠은 본질적으로 같았다. 죽음은 영원하고 잠은 일시적일 뿐이다. 눈을 감으면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들에게 잠은 신성한 것이었다. 사람은 잠 속에서 죽음에 이르고, 해가 뜨면 다시 생명을 얻었다. 삶과 죽음은 밤과 낮의 흐름과 정확히 일치했다. 저주를 받으면 밤에 시체가 되어서도 죽을 수도, 낮에 사람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도 없었다.
잠을 자지 않는 사회가 있다. 이 사회에서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기계의 빛으로 대체된다.
이곳에는 저주받은 존재들이 있다.이들은 죽음의 시간에 움직인다.
이 사회의 길목에는 시체들이 움직인다.
사회는 죽을 수 없는 자들에 의해 지탱된다. 이것들은 잠의 안식에 들지 못하고, 노예의 노동에 시달린다.. 햇빛을 등지고 잠들고, 달빛의 인도로 일어난다. 이들은 '살아있는 시체'다.
시계는 24를 넘어 25를 향해 간다. 흐름을 초월한 시간이다. 초월적 시간은 더 많은 시체들을 만들어낸다. 시체의 목적은 죽는 것이다. 이들은 죽기 위해 살아가는 모순덩어리 들이다. 25시03분에 상영하는 괴기한 영화의 제목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이다. 상영관에는 상영을 준비하는 시체들이 청소를 시작한다.
7. "축구야"
할머니는 "축구"라고 했다.길을 가다가 다리에 힘이 없어 넘어졌을 때도, 핸드폰을 쓰지 못해 머리를 긁적일 떄에도 축구라고 했다. 축구의 대상은 항상 할머니 본인이었다. 할머니는 가족들에게 절대로 이 말을 쓰지 않았다. '축구'로 할머니는 실수를 자책했다. "내가 축구라가꼬 이런 거는 잘 모른다." 할머니는 스스로의 인생을 ‘축구’라고 생각했다.
만석꾼의 딸로 태어나 가진 것 하나 없는 할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던 할머니는 남편이 병에 걸리면서 수십년을 병수발을 들었다. 남편이 죽고 나서는 자기 밥벌이도 못하는 작은 아들 걱정에 밤을 지새우고 기도를 했다. 그렇게 살아온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이제 쉽게 오를 수도 없는 가파른 5평짜리 옥탑방과 이혼까지 당해서 생사도 확인할 수 없는 작은아들에 대한 걱정 뿐이다. 억울하다고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꼬이고 꼬인 서사 속에서 할머니는 '축구'라는 말로 자기를 탓했다.
'축구'는 불행으로 점철된 할머니의 삶에 대한 회환이었다. 생의 마지막에 와서 그 말은 이제는 그만 쉬고 싶은 할머니의 한 숨 섞인 유언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세상이 아니라 자신을 탓했다. '축구'처럼.
8. 그래, 해가 뜬다.
밥 먹다가 숟가락마저 바닥에 떨어뜨리는 날이었다.
숨쉬는 것 말고는 하나도 성공적인 것이 없던 날.
눈물을 베개에 떨어뜨리며 창 밖에 해가 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생각이 떠올랐다.
내일이 왔다. 그래, 내일이 왔다. 이제 어제가 아니다.
숟가락을 떨어뜨린 어제가 아니다.
삶은 푸르스름한 새벽이 밝아오던 순간 리셋되었다.
하얗게 펼쳐진 전지처럼 나는 다시 하루를 살아갈 수 있다.
밥을 먹는 것 조차 실패 할 때 생각한다.
그래, 해가 뜬다. 몇 시간만 더 버티면 해가 뜬다.
해가 뜨면 나는 다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걱정 해야 할 것은 딱 하나다.
해가 뜨지 않는 것이다. 푸르스름한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해가 뜨지 않는 새벽이 올 때까지는 살아갈 수 있다.
베개에 떨어진 눈물을 닦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그래, 해가 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