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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Jul 18. 2019

 '정수기 물통'들기 논쟁

모두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함께' 없애자.


https://mnews.joins.com/article/23526578#home

정수기 물통으로 상징되는 '무거운 물건'을 드는 노동에 대한 이야기는 꾸준히 나온다. 내가 일하는 편의점에서도 '무거운 물건'을 드는 노동을 근거로 남성노동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을 비난한다.

"여자들은 사다리도 안타고 물도 안옮기면서 월급은 똑같이 받는다."
"포스기에서 계산만 하는 거면 키오스크나, 무인계산대 쓰지 왜 사람을 쓰냐"
"여자들은 포스기에서 핸드폰만 보고있다." 등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 비난으로 하나가 되고 친목을 형성한다. 나중에는 친목을 넘어 남성연대가 구성된다.

얼핏보면 저들의 말이 근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게에서 사다리를 타고 물건을 들고 내리는 것은 90%남성들이 한다. 이들의 주장은 사실일까? 편의점의 경험을 토대로 알아보자.

1. 남성들이 무거운 일을 전부한다고 가정하자.(실제로 그렇지도 않지만) 여성은 그 동안 진짜 아무일도 하지 않는가.
- 이는 감정노동에 대한 무시에서 나온다. 포스기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진상과 마주하고, 시재확인을 하며 돈이 틀리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끊임없는 감정노동이 있다. 이것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다. 여성이 하는 일이니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 자신들에 대한 이유없는 우월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남성들은 이 노동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꿀빤다.' '날로 먹는다'고 표현하며 감정노동, 정리노동을 비하한다.

- 또 이는 편의점 노동자체에 대한 무지에도 기인하고 있다. 포스기 앞에 가만히 서있는 것은 편하고 꿀빠는 것인가. 의자가 없는 특수점포나 직영점의 경우에 하루 8시간 내내 그 자리에 서있어야한다. 골반이 뒤틀리고, 발바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프다. 엄청난 육체노동이다. 여성들은 육체노동과 감정노동을 동시에 수행한다. 남성들은 이것을 육체노동으로만 치환해서 하고 있다.

양 노동 사이에 우열을 가리거나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남성들도 가만히 서있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에 대해서 인정한다. 군대경험을 꺼내며 밤샘보초서는 것 같다며 고통을 호소한다. 자신이 포스기 앞에서 벗어나서 창고 위로 올라가는 순간. 서 있는 풍경이 바뀌자마자 그들의 시선은 고통스러워하는 다리가 아니라 핸드폰에 집중된다.   

#. 일하면서 놀라웠던 것은 이 '남성'이라는 의식은 계급이나 계층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이 욕하는 것은 비단 여성 알바노동자 뿐이 아니다. 본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는 여성점장, 여성매니저, 여성SV 모두를 욕한다. 명백히 자신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존재들에게도 비난을 멈추지 않는다. 남성이 점장일 때는 상명하복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던 직원들이 여성이 점장이 되는 순간 모두 업무에서 "점장님이 잘 모르시나 본데.."로 시작하는 말을 꺼내는 것을 봤다. '여성'에 대한 혐오와 편견은 정말로 강고하다. 보편적인 위계구조마저 박살낸다.

2. '무거운 물건'을 드는 노동 자체에 대하여.
- 남성들도 무거운 물건을 들기 싫어한다. 편의점에서도 어느 하나 사다리 타기를 즐기거나, 사다리에 떨어져가며 생수를 창고위로 옮기는 작업을 즐기는 사람은 없었다. 되도록이면 안하면 좋을 일이라고 모두가 인정한다.

- 그런데 한편으로 남성들은 이 '되도록이면 없어지면 좋을 일'을 하면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한다. '되도록 이면 최소화 되면 좋을 조직'인 군대에 대한 반응과 비슷하다. 남성들은 군대를 가기 싫어하지만 '제대' '예비군'이라는 훈장을 통해서 사회에서 우위를 점하고,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이들은 결국 모순적인 태도를 취한다. '하고 싶지는 않지만 존재는 해야하는 일.' 그것을 해야만 자신은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 그래서 없어지면 좋지만, 없애자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저 그 일을 하는 자신의 억울함이나, 부당함, 여성과의 차별에 대해 떠들 뿐이다. 문제의 근원을 없애보자고 말하면 '그건 좀 다른 이야기고..'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니까..' 등의 태도를 취한다.

- 큰 편의점들은 최대한 물건을 많이 쌓아놓기 위해 높은 곳에 계속 창고를 증설한다. 내가 일했던 곳에는 전봇대 정도의 높이에까지 라면과 물건들이 쌓여있었다.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감기약이라도 먹고 어지러운 날에는 생명의 위협도 느꼈다. 일터의 구조 자체가 모든 인간에게 위협적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사다리에서 떨어지면 다치거나 죽는다. 남성은 할 수 있고, 여성은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사람이 해서 안되는 위험한 일이 있을 뿐이다.

- 노동현장에 대한 문제, 결국 높은 매출을 위해 노동자들의 목숨값을 담보로 움직이는 가게가 문제의 핵심이다. 무거운 물건을 높은 곳에 쌓아야하는 구조는 계속해서 탈락하는 인간을 만든다. 키가 작은 사람, 근력이 약한 사람, 다리를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 팔을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 등 비장애인 그 중에서도 꾸준한 자기관리로 어느 정도 근력을 유지한 사람만이 일을 할 수 있다. 일을 못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 소수의 인력만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하게 분업의 실패로 이어진다. 키가 작아서 손이 닿이지 않는 사람과 사다리 업무를 분담할 수 없다. 결국 팔이 닿는 사람에게 일은 몰린다. 가게는 이 팔이 닿는 사람을 기준으로 설계되고 만들어져있다. 팔이 닿는 사람은 자신이 키가 좀 크다는 이유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근력이 좀 있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는다고 믿게 된다.

- 문제의 본질은 태초의 구조문제다. 설계과정부터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구조와 시스템이 문제다. 이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도돌이표처럼 반복될 문제다. 어떤 일이든 분업이 되지 않고 특정 직군의 사람에게 몰리는 것은 위험하다. 해결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일 할 수 있는 높이의 가게, 누구나 팔이 닿을 수 있는 곳에 창고를 만들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편의점 가게의 크기는 더 넓어져야한다. 그래야 위로 쌓이지 않는다. 분업이 가능해지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

3. 정수기로 돌아가자.
- 정수기 문제로 돌아가자. 무식하게 큰 생수통을 낑낑대면 옮기는 것은 누구든 위험하다. 손이 미끄러지거나 힘이 풀려서 발에 떨어지면 골절이다. 무거운 일을 드는 행위는 대부분 이렇다. 할 수 있는 한 이런일들은 가벼운 무게로 다같이 할 수 있는 일로 대체되어야한다.

- 정수기가 아니라 500ml 생수를 쌓아넣고 먹는다거나, 물통이 있는 정수기가 아니라 호스로 바로 연결되는 정수기를 두면 된다. 회사가 돈이 아까워서, 자리가 비좁다는 이유로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인지하지 못해서 '무거운 물건들기' 를 대체 하지 않기 때문에 갈등이 증폭되고 돌고돈다.

- 싸우고 싶고 문제를 제기하고 싶으면 무거운 물건들기 싫으니 회사에 정수기를 없애자고 건의하자. 새로나온 코웨이 직수 정수기를 사달라고 조르자. 함께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상황이 진전될 수 있다. 하지 않는 것은 게으름이거나 누군가를 혐오하기 위해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 그러니 당당히 말하자.

"정수기를 바꿔달라."

"무거운 거 나도 들기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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