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세상에 죄를 지은 자는 셀 수도 없이 많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도 죄를 지었다. 속세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에게 구제의 기회를 준다. 속죄다.
속죄에는 원칙이 있다. 용서는 죄를 지은 사람과 그 죄에 대한 내용으로만 이루어져야 한다. 죄의 내용과 무관한 일을 열심히한다고 해서 속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죄는 철저히 상처를 준자와 상처를 입은자 사이의 문제다.
사람들은 쉽게 착각한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하면 용서가 된다고 믿는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이 제 아무리 위대한 사회운동 위대한 투쟁을 이끈다고 해도 그 한 사람에게는 그냥 죄인일 뿐이다. 용서는 자신이 저지른 일로만 받을 수 있다.
용서받는 일은 의무가 아니다. 용서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이 한 일은 죄가 아니라고 믿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명심해야한다. 상처받은 사람이 있고, 눈물 흘린 사람이 있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도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처를 준자가 위대한 일은 하는 동안 상처받은 자는 더 어두운 곳에서 죽어간다.
자신의 삶으로 죄를 덮으려 한다면 헛수고다. 죄는 삶의 가장 어두운 곳에 늘 존재하고 있다. 죄지은자의 삶이 넓어지면 죄와 함께 무너질 공간만 더 커질 뿐이다.
나를 죽도록 괴롭혔던 학교폭력 가해자가 훌륭한 군인이 되어서 공동체를 수호하고, 좋은 아들로서 가족구성원들과 살아간다. 그렇다 해도 폭력을 휘둘렀던 일들이 사라지지도, 사해지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그냥 나를 '거지새끼'라고 부르던 악마일 뿐이다.
나에게 칼을 던지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쓰는 글을 검열하고 말로서 찢어버렸다. 소문으로 그 사람이 상담을 하며 사람들을 따듯하게 안아주며 함께 눈물흘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소름이 돋고, 끔찍했다. 그 사람이 좋은 일 하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따위는 없었다. 그 감정은 역겨움에 가까웠다. 함께 안고 울었던 사람들에게는 천사같은 상담선생님이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칼을 던지는 사람. 잔인한 인간일뿐이다. 나에게 용서를 구하러 오지 않는 한 그와 나의 관계 속에서는 그는 죄인이다.
사람은 살면서 셀 수도 없는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모든 일에 용서를 구하기는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각오를 해야한다. 기억도 나지 않는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 부르는 날이 온다. 그 순간에 구차하게 굴지 않고, 죄의 사실만 확인된다면 바로 가진 모든 삶을 내려 놓아야한다. 도저히 다시 일어나기 힘든 조건에 바닥으로 내려 앉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내가 죄를 저질렀고, 용서를 구하지 않았으니 현재의 내가 받는 업보요. 죄의 댓가다.
우리는 늘 긴장해야한다. 모든 삶을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 각오로 살아야한다. 용서받지 못한자의 비애요. 업보다. 우리는 죄의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용서받지 못한 죄야 말로 우리 삶의 토대다. 죄의 댓가는 생각보다 크다. 자신이 선하다고 믿든, 하던 일만 계속하면 잊혀질 일이라 생각하든 중요하지 않다. 상처받은 누군가는 평생 기억한다. 자신 삶에 가장 큰 결정타는 타인의 기억 속에 있다.
그러니 죄지은 자여. 용서를 구하라.
용서를 구하지 않는자여. 처절하게 무너지리라.
사람의 삶이 불행으로 가득차서는 안된다고 믿는다. 행복과 풍요가 가득하고 죄의 무게는 그 행복과 풍요의 기원을 찾는 정도면 충분하다. 삶의 토대는 죄로만 되어있지 않다. 토대와 상부라는 층간의 구조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삶의 층간으로 쌓이지 않고 섞여서 만들어진다. 다만, 저주하고 싶은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은 이 글을 읽지 않겠지만, 문장에서 자신의 죄의 흔적이라도 발견하고 고통받길 바란다. 자신의 수십년 인생이 부질 없게 느껴지는 공허함에 빠지길 원한다. 그 바다 속에서 헤엄치다 익사하기를 기도한다.
<속죄> 20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