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기운인지 전 세계가 약에취햇

by 바다

A형 독감에 걸려서 약을 먹고 있다. 바이러스가 강한 탓인지, 약이 독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몸의 감각이 둔하다. 약에 취한 덕인지 독감 증세는 많이 잦아들었다. 몸이 펄펄 끓는 열도 나지 않고, 식은땀도 흐르지 않는다. 조금 있던 근육통도 괜찮아졌고, 약간의 기침과 조금의 가래만 증세로 남아있다. 아빠는 독감으로 진단받지 않았던 날에도 노오란 가래를 아침마다 뱉어내곤 했는데, 안쓰러우면서도 괜찮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70년대 한국현대소설처럼 가난집에 폐병 걸린 무능한 가장이 우리 집에 있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우리 집은 화장실이 현대소설처럼 밖에 있긴 했고, 내 배에는 가끔 자다가 작은 바퀴벌레가 떨어지기도 했지만. 70년대에 끝났으면 좋았을 풍경이 2000년대 넘어서도 내가 사는 공간에 재현되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었다. 이제야 작은 원망도 든다. 내가 이렇게 자주 아프고 콜록이는 것은 지저분하고, 습하고, 어두웠던 방에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싶어서. 그 집은 오롯이 아빠의 '탓'처럼 여겨지니까.


12.3 불법계엄이 선포되었던 날에 손발을 벌벌 떨며 무서워했다.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한 탓에 그 계엄의 끝에 고문과 옥살이로 죽어가는 나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UN산하 기구들을 탈퇴한다고 발표한 다음날 미국 공화당이 UN탈퇴법안을 발의했다. 객관적이고 냉정한 이들은 이를 그저 세계질서의 재편, 세계질서의 변화라고 명명하겠지만,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한 나에게는 '세계대전 선전포고'로 여겨진다. 전쟁은 싫다. 죽고 다치고 쓰러지는 것들을 보고 싶지 않다. 전쟁을 하지 않아도 인간이 얼마나 많은 이유로 다치고 죽는데, 또 서로를 죽이고 죽이겠다며 선언하는 꼴을 보고 있으니 울화병이 솟아오른다. 너무 작은 개인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저 분통은 터뜨릴 뿐.


그저 내가 약에 취해서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게 보이는 거였으면 좋겠다. 그래서 약기운이 가시고, 독감이 완치에 가깝게 나아지면 세상도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이 생각조차 제정신인 생각은 아니지만 그만큼 스트레스받고, 피하고 싶은 일들 투성이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처럼 전쟁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두메산골에서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전쟁은 싫다. 스트레스도 싫다. 그저 좀 평온하고 조용하게 나를 돌보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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