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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Apr 04. 2018

대학'내부'에서 이야기하기

'학생에게 임금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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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에게 임금을 읽었다.' 이전에 듣던 수업에서 선생님이 이 책에 실려있는 글의 일부분을 주셔서 읽고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 때 글을 읽어보고서 마음에 들어서 가슴 한켠에 넣어두고 있다가, 우연히 책이 출판된 것을 보고 책을 들추어 보았다. 이번 읽기 전에 한번 빌리기는 하였으나, 3분의 1정도만 읽고서 고스란히 반납했다. 이번에도 관심이 더 가는 책들을 먼저 손에 집어 들었으면 또 다 읽지 못하고 반납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겨우' 책을 끝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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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일본 대학의 문제점들을 이야기하고 저자 나름대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 전반적인 문제점들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의 기업화가 과도하게 진행되어서 인문사회과학과 같은 자본의 영향을 덜 받는 학문들이 사라지는 것. 대학본부와 재단이 대학내 구성원들(주로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과도하게 규제하는 것. 학생들이 과도하게 비싼 등록금과 생활비로 제대로된 연구와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것 등. 큰 결들은 함께 하지만 세세한 차이들은 존재한다. 그 중에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일본은 장학금이 대출(?)이라는 점이었다. 한국은 장학재단이 있고 거기에서 학자금이 대출하는 것과 동시에 상환 조건 없이 제공하는 돈이 존재한다. 보통 한국에선 그것을 '장학금'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그 어떤 장학금이라고 해도 '상환유예를 길게해주고 저 금리로 대출해주는 것'을 이야기한다. 직접 돈을 벌어서 내는 것 이외에 일본에서 학생이 자신의 등록금을 빚을 지지않고서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연적으로 빚쟁이를 만드는 '부채왕국'일본이다. 한국이라고 해서 그렇게 다르겠냐만은 이것은 '헬조센'에 사는 나에게도 좀 충격이었다.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이야기에 이것보다도 더 끔찍한 이야기도 있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돈이 없고, 게다가 건강에는 자신이 있는 나이니까, 자기도 모르게 호구를 잡히고 만다. 예를 들어 이것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지금 리쓰메이카대학의 학교 식당에서는 '후쿠시마정식'이라는 것이 대 인기라고 한다. 분명 아무도 사지 않는 후쿠시마의 식재료가 대학으로 밀려들어온 것이다. 야채,쌀,해산물 그리고 거기에 붙어오는 '후쿠시마 살리기 운동'따위 평소라면 초호화 등급인 식사가 3백 엔 정도에 제공된다. 실제로 후쿠시마의 식재료는 전국1,2위를 다툴 정도로 맛있으니까 그런 것을 식욕 왕성하고 가난한 학생이 먹게 되면 끊을 수 없게 된다." P254

여기서 등장하는 후쿠시마는 몇년전에 거대한 쓰나미로 핵발전소가 폭팔을 일으켜서 폐허가 된 그 '후쿠시마'가 맞다. 후쿠시마산 재료를 최대한 안쓰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상품으로 만들어서 특식을 판매하고 있다. '대학'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말이다. 이 음식들이 타겟으로 하는 대상은 확실하다. 대학내부에 존재하고 가장 가난한 존재인 '대학(원)생'들이다. 방사능이 있는 것을 알지만 당장에 즉사하지는 않을테니, 이것이라도 먹지 않으면 배고픔이 더욱더 아픈 사람들이 먹는 정식이다. 인용문에서 등장하는 '호구'라는 말만큼 이런 대학생들의 처지에 잘어울리는 말은 없는 것 같다. 이런 것이 대학에서 버젓이 가능한 나라가 일본이다. 그 속에 살아가는 대학생들의 삶은 얼마만큼 담보잡혀있고, 파괴되어 있는지 안봐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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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을 때에는 '일본대학사회와 그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논의'정도로 이해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점점 '모든 것을 잃은 한 대학원생의 자포자기한 심정의 현실고백'정도로 그 이해가 바뀌었다. 많은 문제들을 나열하고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이거나, 현실적인 해결양상이나 기획 등이 책에서 등장하지는 않는다. '대학은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나'하는 당위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대부분이다. 저자가 해결책으로 이야기하는 '기본소득'도 매우 거대한 담론에서 나오는 '정책'이다. 대학내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책에서 하는 이야기들이 추상적이고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무용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책에서 시도하는 '대학'을 새롭게 사유하고 정의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속에서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해결책들이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것들이 공허하게 느껴졌던 것은 주장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이 거의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교직원노동조합이나(시간강사도 교직원 노동조합에 들어가는 것을 보니 교직원으로 인정은 해주는 것 같다. 한국은 지위상 교직원 자체로도 잘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대학(원)생들이 진행하는 '취직은 저리꺼져'데모와 같은 소규모 데모 단체들만이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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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새롭게 정의하고 사유하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는 대학을 새롭게 구성하기 위함이다. 그것이 정말로 정의나 사사유에만 머무르는 것이라면 저자가 이야기하는 현실의 모순에 부딪히는 사람들의 삶은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 그 정의와 사유의 과정에서 새롭게 사람들이 모이고, 그것이 세력으로 구성되어야한다. 그것이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힘이되고 목소리가 된다. 책에서 전공투의 이야기 중에서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

"우리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한다. 일상으로부터 출발하는 나, 유일자로서의 자기존재와의 싸움을 다하는 것, 출발은 여기밖에 없다. 여기에는 어떤 당파 논리도 조직 논리도 없다. 우리는 자기 내부의 '언어'로 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자기 존재를 반복해서 추구하는 싸움이며, 조직과 강령을 뛰어넘는 시점이 거기에서 비로소 생길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싸우는 동료들을 모아, 논쟁이 아니라, 스스로 말하지 못한 모순을 말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비판이, 동의가, 각각의 언어로 말해질 때, 우리는 선동에 시를 불어넣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자립에의 지향, 개인의 발상으로부터 비롯한 근본적인 싸움을 만들어보자." P166

여기서 이야기하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당시에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개인이 단순히 혼자가 아니라, 전국적인 전공투 투쟁이라는 거대한 세력 속에서 존재했기 때문이다. 우익학생들이 좌익학생들에게 염산을 투척하는 정도의 시기에 말 그대로 혼자서 저런 이야기를 하고 소리를 쳤다면 그 결말은 참혹했을 것이다. 전공투의 이야기들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주로 전공투가 이야기되어지는 맥락은 조직적 논리에서 벗어난 개인의 자율성이 극도로 발현되었다는 것이 많다. 그 전체주의적인 상황 속에서 그 개인들의 자율성이 어떻게 갑자기 터져나왔는가와 그 자율성이 짧은 시간이나마 어떻게 유지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와 고민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자율성이 개인의 목숨을 건 용기가 아니라, 소심하고 비겁한 개인들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주는 것은 그것을 든든하게 지켜주고 지지해주는 특정한 '세력'이기 마련이다.

책의 제목인 '학생에게 임금을' 거기에서 임금이라는 것도 자본과 세력과 노동자 세력이 서로에게 교셥력을 발휘해서 임금을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일을 시키면 당연히 돈을 주어야지'라는 관념 자체가 오랜 시간 동안 노동자 세력이 자본가 세력과 싸워서 만들어온 것이다. 역사 속에서 노동자에게 일을 시키고 자본가가 임금을 주기 시작한 것은 매우 최근의 일이다. '공부도 당연히 학습노동이니 돈을 주어야지'라는 관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학생들이 임금(기본소득이든, 소득보전이든, 집제공이든, 무상교육이든..)을 받아내기 위해서는 교섭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력이 필요하고, 싸움도 필요하다. 주장만으로는 얻어낼 수 있는 있을지 모르겠지만(장학금처럼), 요구하는 것을 획득 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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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이런 '세력'은 학생운동이다. 일본은 전공투 이후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학생운동이라는 것이 사라졌다. 한국의 민주화세대(이들은 학생운동세대라고도 볼 수 있다.)가 그들의 과거를 추억하면서 권력을 획득하는 것처럼, 일본의 전공투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그것을 추억하고 이야기하는 정도로만 남아있다. 이들은 심지어 일본의 모종의 정치역사적배경으로 이들은 권력을 획득하거나, 세력이 되지 못했고 그 영향을 이어갈 수 없었다. 그 많고 강성했다던 전공투세대 이후에 일본에 도래한 것은 전체주의에 가까운 극우였다. 극우정치를 펴고있는 일본의 제1여당과 제1야당의 의석수만 비교해보아도 그 씁쓸한 역사를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전통적인 의미에서 학내에서 운동을 만들어나가고 재생산을 이어가는 학생운동은 '지거국'이나 '인서울'의 거대 대학들이 아니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줄어들때로 줄어든 학생운동은 청년담론을 지지대 삼아서 청년유니온과 같은 청년노동문제 조직으로 나아가거나, 진보적인 학자집단이 되거나, 진보정당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이제 '대학'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세력화를 시도해서 대학본부와 사학재단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학생운동은 상당부분 쇠퇴하였다. 이런 상황은 한강밑으로 내려와서 지역에 있는 대학들로 내려오면 더욱 극심해진다. 부산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는 학생들에게 예비 취업교육을 시킨다고 사원증 같은 것을 주고 모든 수업을 취업교육으로 변경해도 그것에 대해서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창구 자체가 없는 학교도 있다.

한국 거대 학생운동의 마지막 흐름이었던 한대련은 반값등록금투쟁으로 역사를 한번 크게 긋고서 작렬하게 사라졌다. 그 이후에도 대학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찌만 그 흐름은 약해져만 간다. 그와는 다른 흐름으로 대학 외부에서 청년 공동체나, 대안대학, 청년문화연구소 등지의 모습으로 대학생들의 삶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들이 요즘은 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연대하는 공간은 늘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대학'속에서 '대학'의 의제들을 이야기하는 것 역시 중요한 무게로 다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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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어떻게 사유하고 전유할 것인가는 어려운 문제다. 이것이 어려운 문제는 사유하고 전유할 '세력'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규정하는 힘은 자본과 대학본부가 가지고 있다. 대학은 질적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만, 그 양적으로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지 않다. 위기를 맞이 한다해도 그 위기에 대한 대학의 해법을 우리는 일방적으로 받아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최근에 '유행하는' 저항의 방식은 대학 외부의 '진지'들을 만드는 것이다. 대안대학, 청년공동체 다양하고 많은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다.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고,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늘 사회에도 이롭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자유인들 마저 대학의 내부에서 빠져나가고 나면 대학의 내부의 저항성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민족문제, 노동문제, 생태문제 '대학 내부의 문제'를 제외한 모든 문제들에 세상 사람들이 관심이 많다. 심지어, 그 문제에 가장 격렬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대학내부의 대학생들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 속에서도 서울에 있는 '스카이서성한의 대학'이 아니라 이름없는 대학이라면 그 저항의 가능성은 더욱더 줄어든다. 스카이서성한이 아닌 소위 '지잡대' 에서의 저항은 어떤 방식이어야할까 고민이다. 대학외부로 떠나가는 것 말고, 내부에서 진지를 만들고 확장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세력'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떤 사람과, 어떤 주제로, 어떤 네트워크와, 어떤 조직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길은 포기하는데에 있지 않고, 천천히라도 글을 읽고 쓰고 작은 모임이라도 시도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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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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