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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Apr 26. 2018

나는 '존재하는 것'이다

책 <숨은 신을 찾아서>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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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신을 찾아서>를 읽었다. '읽었다'는 말은 내가 이 책을 따라갔던 기억과는 잘 맞지 않다. 내 생각에 읽었다는 것은 지식이나 정보를 습득하기 위해서 저자와 이야기를 객관화한 것이다. 난 이 책을 그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일반적인 책을 읽는 것처럼 만날 수 없었다.

책의 저자는 강유원이다. 이전에 '달인'이라는 책을 통해서 알게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과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해주고 들려주는 것을 삶의 목표쯤으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유투브에 있는 영상에서 보면 백발의 긴 머리를 뒤로 묶은, 신기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는 철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고, 전공은 헤겔이다. 직접 만나보거나 하지 않았지만 그가 쓰는 책만 봐도 그가 셀 수 없이 많은 고전들과 소통하고 연구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연구하고 알려주는 삶을 살고 싶은 나에게 롤모델 같은 사람이기도 하다.

내가 꿈꾸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도 두려움, 후회, 불안 공포가 있을까. 아마 있을 것이다. 그가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들의 글을 읽고 사유를 하고 글을 써도 해결할 수 없는 물음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주제에 있어서는 무기력할 만큼 인간은 아는 것이 없다. 그것은 한 번도 죽었다가 살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며, 그 누구도 죽음의 세계를 묘사하거나 분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이성이나 사유의 영역이 아니다. 불안이나 공포 무기력의 영역이다. 평소에 우리가 쓰는 말로 표현하면 '신'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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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강유원이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고, 위안을 얻기 위한 믿음을 찾는 사유의 과정을 보여준다. '결국엔 죽는다.' '모든 것은 먼지다.'는 무겁고, 무서운 진리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해소하기 위해서 책을 읽고, 교회도 갔지만 그는 거기서 '믿음'을 가지지 못한다. '신'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같은 삶을 살다가 '신'을 만나고 믿음을 가졌던 고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그 모든 것의 '뜻'이자 의미였던 신에게 귀의한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신'에게 두려움을 가지고 무기력하게 투항한다., 근대의 시작을 열고, 신과의 단절을 시도했던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신이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억지적 사유를 하면서 버텨보지만 결국 신에게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강유원은 이 셋의 이야기에서 스스로 신에게 귀의하는가, 사유의 끝에서 만난 절대적 존재에 무기력하게 투항하는가, 억지를 부리면서 까지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신에게 기댈 것인가 하는 참으로 슬프고 우울한 선택지와 마주한다.

그는 이 셋 중에서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 책의 이야기들은 어떤 선택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저 본인의 세계와 삶의 궤적을 한 번 돌이켜보기 위한 것이다. 그는 하나의 신, 하나의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수 많은 원칙과 대립, 현실과 이상의 괴리, 삶과 죽음에 대한 불안 속에서 이리저리 타협했던 기억들 모두가 그를 구성하고 있다.

나는 무엇에 의거하여 살고 있는가. 내 삶의 근거는 무엇인가. 거창하게 물을 것 없이 내 삶에서 내가 훼손하고 싶지 않은 원칙이 있는가. 인류가 보편적 원리로서 받아들이는 것들, 이를테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와 같은 것은 한때는 보편적이지 않았다. 지구에 살고 있는 단 한 사람의 머리 속에도 그 명제가 떠오르지 않은 세월이 떠오르는(또는 떠올라야만 하는) 세월보다 훨씬 길었다. 이것은 이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원리이지만 언젠가는 그의 삶은 이러한 원리들로 지탱된다. 원리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유한한 인간이요 우주의 티끌에 불과하니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병이 난다면 그대로 누워서 죽음을 기다리지는 않을 것이다. 세상사라는 게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반드시 성취된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뭔가 잘되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할 마음은 없다. 신이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하는 일까지 주재한ㄷ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과학적 원리에 따라 이루어지는 일이 대체로 옳다고 여기기는 하여도 과학이 인생의 모든 일을 해결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그저 때를 기다리다보면 이루어지는 일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정신일도 하사불성'같은 허무맹랑한 정신주의에 매몰되어 있지도 않으며, 매사가 항상 잘되는 것만은 아니어서 달도 차면 기울듯이 때가 되면 집착을 버리고 물러서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원칙들은 엉켜있다. 그렇다고 해서 맹신으로 보일 만큼 하나의 종교적 원칙에 맞추어 정돈할 생각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자연과학이라는 확고부동한 원리에 따라 이 모든 것을 재단하고 싶지도 않다. 그렇게 되어가는 대로, 크게 세상사와 사람들과 어긋나지 않는 한 두어두되, 뭔가 묹겠다 싶으면 이리저리 재어보고 이것저것 따져보고 지킬 건 지키고 고칠 건 고치려 한다. 아주 오랫동안 변함없이 지켜온 것은 사실상 없다. 무엇이 나의 정체성을 유지시켜주는 것인지를 규정할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은 뚜렷하게 내놓을 수 없고,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그저 '나는 존재하는 생물'이라는 것 뿐이다.(책 P140~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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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선택했던 계기가 있다. 어렸을 적 부터 '죽음'에 대한 불안이 컸다. 내가 어떤 일, 어떤 삶을 살아도 삶이 끝나는 순간 모든 것은 사라졌다. 그것이 무서웠다. 어릴 시절에 어떤 '진리'와 마주했던 것이다. 그 뒤로 주기적으로 무기력해졌다. 책에서 나오는 파스칼이 <팡세>에서 서술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리 고민하고 노력해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결론은 하나 였다. '나는 죽는 존재다.' 이 명확한 진리는 신조차 구원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고 싶을 때도 있었다. 뇌의 전기신호가 질량보존의 법칙에 따라 우주 어딘가에 남아서 내 정신이 영원의 시간동안 존재할 것이라는 황당무게한 생각도 했다. 그만큼 무서웠다.

어떤 기회로 종교를 공부하게 되었다. 기독교의 인격신과 마주하고, 코란의 자비롭고도 무자비한 신과 만났다. 인격신이 아닌 원리 그 자체로서의 신도 만났다. 수행하고 움직이는 우리 자체가 신이라는 것도 있었다.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어차피 죽으니 살아있는 동안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하자'는 어설픈 삶의 동기만 만들었다. 그것은 근원적으로 내 불안을 잠재워주지 않았다. 난 계속 내 삶과 죽음, 죽음 이후로 연결되는 하나의 연결고리 사고체계 삶의 모습을 꿈꿨다.

이 책과 만나고서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꿈꾸던 그런 일관된 나는 없다. 강유원이 스스로 밝히는 자신의 모습처럼, 온갖 모순과 대립과 정합이 내 정신과 몸 속에 가득하다. 아침에 일찍일어나는 나와 하루종일 잠만 자는 나는 하나의 정합된 존재다. 그저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끊임없이 대립하고 부정하고 합일 될 것이다. 그게 삶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내가 꿈꾸던 삶의 뱡향이나 모습도 찾아나설 것이다. 삶이 원래 그런 것이라 생각하고 살기로 했다. 죽음이외에 또 하나의 삶의 진리는 어떻 모습이든 간에 '이것은 나이다.'는 것이다. 자신의 에 대한 수용이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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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서 책을 '읽었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이유는 읽기보다는 '공감'했기 때문이다. '공감'보다는 몸에 새겨지는 이야기였다. 나의 일기장을 훔쳐보고 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대목도 있었고, 나와 텔레파시로 정신을 공유하는 사람의 이야기같기도 했다. 이는 그가 나와 같은 부류의 인간, 아니 그냥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책을 통해 강유원의 삶과 사유의 궤적과 만나서 행복했다. 위로도 받았다. 투박한 내 삶을 '존재'라는 이름으로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강유원이라는 사람과 그의 세상에 더 흠뻑빠지게 될 것 같다. 얼른 강유원과 또 만나고 싶다. 작은 욕심일 수도 있지만, 내가 수용한 나의 세계를 강유원에게 들려주고 싶기도하다. 그는 어떤 느낌을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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