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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학의 시작, 드리미소지기

롯데시네마(드리미)+CGV(미소지기)

by Cosmo

[목차]

휴학하자마자 느낀 감정

단기 알바로는 역부족

드리미 광탈

미소지기 입성기

세상 경험 중, 먹고살기 힘드네요

'드리미소지기'가 될 운명




휴학하자마자 느낀 감정

1학기 종강과 동시에 휴학을 시작했다. 서류상으로는 9월부터 이지만, 내 진짜 자유는 7~8월 여름방학부터였다. 그 시간은 대외활동과 여행을 다니며 평온하게 리프레쉬했다.

그러고 9월이 되자, 너무 허한 느낌이 들었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나만 정지 화면처럼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그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적이 있던가? 지금 보니 인생 최초로 ‘소속감’ 없이 지낸 시기였다. 휴학 후, 온전히 나의 모든 시간을 갖게 되면 마음껏 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너무 많은 시간을 가진 탓일까... 오히려 능률은 더 떨어졌다.



단기 알바로는 역부족

그저 시간이 흘러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알바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목적이 돈 벌어서 유럽여행 다녀와보는 거였으니까.

알바 공고 사이트를 보고 여럿 지원했는데 막상 또 알바가 잘 구해지지 않았다. 한편으론 휴학 자체를 알바에만 힘을 다 쏟으며 보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자체적으로 공부해보고 싶은 것들에도 시간을 쏟고 싶었다. (나란 인간... 참 복잡한 놈...)


참 아이러니하게 아래의 생각들이 돌고 돌았다. 명쾌한 답도 없이 스트레스만 받는 상태였다.

- 잊지 말자, 내가 휴학한 이유는 '하고 싶은 걸 해보기' 위해서야.
- 내가 해보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해
- 돈을 벌려면 알바를 해야 해
- 근데 또 알바로 시간을 다 뺏기고 싶진 않아...
(도돌이표)


그래서 시도해 본 것이 단기 알바였다. 시간을 좀 적게 쓰면서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오전 5시까지 삼성역 코엑스에 가서 행사 지원하는 알바를 했다. 그쪽에서 점심값 아끼겠다고 알바 종료 시간도 애매한 오전 시간으로 잡았다. 밥도 못 먹고, 돈도 못 벌고, 몸만 고달팠다. ‘효율성’이란 단어를 땅바닥에 떨어뜨린 기분이었다. 이런 방식이 지속되니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드리미 광탈

그래서 정기적인 일자리를 찾아보고자 했다.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 공부하고 싶은 것과 연계되면 너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영상에 관심이 많은 상태였고 한 번쯤 해보고 싶었던 영화관 알바를 도전했다.

그때 처음 알게 된 사실은 롯데시네마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드리미', CGV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은 '미소지기'라고 불렀다.

집 주변에 롯데시네마가 있고 마침 공고가 올라왔길래 '드리미'로 지원했다. 영화관 알바는 회사 입사하듯이 자소서를 길게 쓰고 인터넷으로 제출해야 했다. 어쩌다 면접까지 갔는데, 내가 지금껏 본 면접들과는 성격이 달랐다. 실제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답변하는 시뮬레이션형 면접이었다.

당연히 광탈했다. 나중에 건너 건너 듣기로 당시에 내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진짜 답변을 잘했어도 내 것이 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면접관: 손님이 음료 맛이 이상하다고 한다면 어떻게 응대하실 건가요?
나: 직접 마셔보고 별로면 바꿔드릴 거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니까 답변이 하...)
면접관: 하하하 재밌네요.
나: (오? 나 잘했나?)
면접관: (넌 탈락이야)




미소지기 입성기

이후에 '나는 영화관 알바를 평생 하지 못하는 사람인가 보다' 자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집에서 조금 더 멀리 있는 CGV에서 공고를 올린 것을 발견했다. 거기 또한 인터넷에 자소서 제출이 필수적이라 동일하게 했다(=문제의 시작). 서류 제출 후 얼마 뒤에 문자를 받았다.

면접은 1시입니다.
여유롭게 10분 전까지 로비에 도착해 계시면 담당자가 안내드릴 예정입니다.


당연히 여유롭게 갔는데, 이런 젠장 처음 가보는 동네라 길을 헤맸다. 그래서 나는 귀신같이 1시에 딱 맞춰서 로비에 도착했다. 물론 나만 늦었고 다른 사람들은 최후의 1인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도착하니 다 같이 면접에 들어갔다. 면접도 나쁘지 않았고 결과도 최종 합격됐다. 물론 내가 인터넷에서 예상 질문 찾아보고 준비를 좀 더 하긴 했다.

참 신기한 게 각자만의 분위기와 편안함을 느끼는 곳이 있는 거 같기는 하다. 롯데시네마는 뭔가 되게 불편하고 어색했다면, CGV는 처음부터 뭔가 내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 경험 중, 먹고살기 힘드네요

진상 손님도 진짜 많았다. 온갖 인류애가 떨어지기도 했다. 신입교육 OT때 응대 예절 및 교육을 해줬는데

직원: 손님이 늦게 도착해서 영화가 시작하고 10분 뒤에 입장했습니다. 상영 종료 후 그분이 나와서 다음 상영 시작하면 "보지 못했던 초반 10분만" 보고 나오겠다고 하시면 뭐라고 응대해야 할까요?
나: (뭐 저런 사람이 있겠어? 너무 예시가 극단적인 거 아니야?)


어느 날, '저런 사람'이 내 앞에서 똑같은 멘트를 치고 있었다. (이거 왜 진짜...?) 예시로 봤던 상황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나 정말 놀랐었다. 이를 비롯해 진상썰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생겼다.

그렇게 8개월간 힘들지만 재미있게 일했다(2018.09~2019.04). 동료들끼리 으쌰으쌰 하면서 힘차게 에너지 받고 즐겼던 나날들인 거 같다. 어쩌면 지금 내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것 같다.

미소지기들은 유니폼에 본인이 지정한 문구가 달린 배지를 달 수 있었다. 나는 휴학 중에 해보고 싶었던 온갖 경험을 해보고 싶은 상태였다. 따라서 내가 선택한 배지 문구는 이랬다: "세상 경험 중, 먹고살기 힘드네요"

그림1.png




'드리미소지기'가 될 운명

그렇게 퇴사가 결정되고 근무일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CGV매니저: 아 Cosmo님 원래 안 뽑으려고 했는데~~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나: 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CGV매니저: 롯데시네마 자소서 복붙한 거 아니에요? 마지막에 '드리미'라고 써놨던데?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로 ‘설마요~’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집에 와서 확인해 봤는데 진짜였다 ㅋㅋㅋㅋㅋ. 너무 귀찮은 나머지 내용을 안 바꾸고 그냥 제출했던 것이었다.

그러고 마지막 근무날 매니저님에게 가서 여쭤봤다. 진짜 다행인지 점장님이 나를 좋게 봐주셔서 기회를 얻게 된 것이었다.

나: 근데 왜 저를 뽑으신 거예요?
CGV매니저: 자소서 보고 바로 서류 탈락시키려고 했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ㅋㅋㅋㅋ. 점장님께 웃자고 말씀드렸더니, 점장님께서 "재밌는 놈이네. 한번 면접이나 봐보라고 해봐" 하셨어요.


인생을 돌이키면 참으로 신기한 일이 많다. 어떤 건 정말 애쓰는데 되지 않는 것도 있고, 힘을 빼고 했을 뿐인데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있다. 어쩌면 나에게 CGV는 후자가 아니었을까.

알바 혜택으로 공짜 영화를 보며 영상 공부도 했다. 고객 응대하면서 사람을 대하는 법도 자연스레 익혔다. 무엇보다, 유럽 여행을 위한 자금도 마련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롯데시네마의 '드리미' + CGV의 '미소지기', 나는 이 둘이 섞여버린 '드리미소지기', 참으로 별종이다. 인생은 때론, 실수한 자소서 한 줄에서 시작되기도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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