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사건, 뮤지컬 그리고 부러움
런던에 도착하고 4일이 지난 이후부터는 두려움 없이 잘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임페리얼 공대를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외국인이 나를 붙잡고 말을 걸었다. "혹시 OOO으로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물론 영어로)" 나는 내심 내가 현지인처럼 보였나 싶어서 기뻤다. 답변은 담백하게 "Sorry… I’m here for the first time." 아주 사소한 문장 한 줄이었는데, 그게 통했다는 게 묘하게 짜릿했다.
여행이 30박 31일이다 보니까 빨래도 신경 쓸 거리 중 하나였다. 적당한 주기에, 적당한 숙소 환경에서 빨래를 하고 말리고 다시 챙기는 순환 구조 시스템을 챙겨야 했다. 어쩌면 물리적 독립에 대한 사전 경험인 것 같기도 했다. (사실 원래도 신경 써야 되는 건데,,, ㅎㅎ;;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는 한국에서 뮤지컬을 보고 너무 좋았던 기억을 가졌었다. 그런데 또 영국 뮤지컬이 마침 유명하다길래 <위키드>를 보았다. 뮤지컬 공연 당일 아침의 어느 시간대에 가면 잔여석 느낌으로 조금 더 싸게 살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일찍 길을 나서서 돈을 절약하기 위해 현장에서 티켓을 구매했다. 그날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한 푼이라도 싸게, 체험은 끝내주게.
그렇게 티켓을 잘 예매하고 시간이 좀 남아서 '프레 타 망제'라는 곳에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웠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화장실에 들렀다. 일을 마치고 변기를 내리려는데 도저히 내 눈에 그 레버가 보이지 않았다. 오직 내 눈앞에 기다랗게 내려온 하나의 줄만 또렷하게 보였다. ‘그래… 영국은 이렇게 하나 보지’ 하고, 별 의심 없이 줄을 당겼다. 그랬더니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너무 당황해서 일단 자리를 피했다.
밖에 나와서 상황을 보니 이랬다. 워낙 바쁜 시간대라 직원들도 정신없는데 일단 사이렌 소리는 울렸으니, 어떤 선임이 신참에게 "야! 화장실 뭔 일 났나 봐. 얼른 네가 가봐!" 소리치고 있었다. 멋쟁이라면 유창한 영어로 당당하게 상황을 설명했을 텐데, 나는 어버버버... 하면서 미안함과 민망함의 감정으로 상황을 설명했다. 다행히 큰일은 없이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나의 처참한 영어 실력에 실망했던, 영어 회화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경험이었다.
무튼 뮤지컬은 시간에 맞춰 무사히 잘 보았고, 내용도 잘 못 알아듣긴 했지만 그냥 그 감정과 느낌, 전율이 느껴진 경험 자체로 충분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립박수도 해봤다.
그렇게 좀 돌아다니다 보니 잡념이 조금 생겼다. 외국인들을 보면 부러움 투성이었다. 외적으로 다 모델 같이 멋있고, 그 나라의 지형도 부럽고, 모든 게 다 타고난 것 같아서 부럽기만 했다. 한마디로 모든 방면에서 금수저로 느껴졌다. '그들은 전혀 고민도 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려나?' 싶은 마음...
그러던 어느 날, 프림로즈힐을 같이 간 동행 + 자연사 박물관에서 만난 현지 한국인 무리에게서 공통적으로 들은 말이 나를 놀라게 했다.
"여기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격차가 존재해요. 각자의 길이 정해져 있달까? 넌 공부해야 되는 사람이야. 넌 몸을 쓰는 직업을 해야 하는 사람이야 등등. 사람이 쓰는 단어, 말투, 악센트, 심지어 이름을 듣자마자 그 사람의 사이즈가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내 눈에는 모든 게 아무 걱정 없어 보일 뿐이었는데, 뭐든 화려한 이면에 다른 혹독함이 있구나… 싶었다. 당시 나에게 인생에서 큰 일은 수능과 대입밖에 없었기에 그걸 비추어 생각해 봤다. 우리나라도 나름의 격차가 있어도 진짜 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도서관을 가든 EBS를 듣거나 등등 기본적인 것을 제공하는 환경을 이용해 자신의 계급 사다리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주지 않는가? 그동안 너무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내가 가진 특권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한마디로 '나 또한 희망을 품을 수 있는 환경이었구나' 느꼈다.
19.05.11 (당시 작성한 메모)
지금은 16:51 맥도널드에서 저녁을 먹고 쉬고 있다.
영국에 와서 기쁜 건지,
맥도널드에서 한 끼에 15,000원 쓰면 당연히 기쁘지 않을까…
하면서 외롭기도 하면서 복잡 미묘해지는 순간.
결국은 마인드차이. 더 나아가서는 <자존감>의 문제인 것 같다.
패션 센스는 낮아도 훌륭한 하드웨어로 커버하는 이들은 도대체…
조상들이 세상을 주름잡아서 훌륭한 환경과 위치. 많은 특권을 가진 이들.
근데 또 반대로 태어날 때부터 한국의 학벌처럼 1차 거름망을 지니고 태어나는 이들.
지금 한 4일 됐나... 5일 됐나... 느낀 건 얘네도 사람이구나. 그냥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