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은 한꺼번에 몰려온다
시간이 흐르자 새로움은 익숙함으로, 설렘은 무뎌짐으로 바뀌어 갔다. 동시에 감흥도 점차 사라졌다. (벌써? 싶겠지만 진짜) 어느 날 '세인트 폴 대성당'에 들렀다. 인터넷으로 좀 찾아보고 이거저거 봐야지 싶었는데, 이게 무슨? 하필 내가 갔던 날에 문이 다 닫혔다. '하... 여기서 또 뭐하나…' 사람들이 계단에 편하게 앉든/눕든 각자 원하는 대로 쉬고 있었다. 나도 기둥에 누워서 잠이나 자볼까 싶은 찰나, 예쁜 외국인이 등장했다. 내가 혼자 온 이유는 묵언수행이 아니라 강제적인 환경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도 좀 붙여보고 교류도 해보고 그렇게 해보고 싶어서였다. 그치만 그때까지 난 한번도 그러지 못했다. 이번에 한번 시도해볼까 싶다가도 '아니다 됐다...' 싶은 찰나에.
- 내 주변에 온거.
- 그리고 주변에 거의 아무도 없는거.(*한국인 특: 민망함)
- 이건 신이 나한테 준 기회다 싶어서 말을 걸었다. (당연히 영어로 말을 걸었지만 번역하자면 이렇다.)
나: 안녕하세요?
외국인: 안녕하세요
나: 누구 찾으세요? 계속 둘러보시길래
외국인: 아 네, 친구 기다리고 있어요
나: 그렇군요,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여행 온 Cosmo 입니다.
외국인: 네! 안녕하세요 저는 SES 입니다.
이름 발음 때문에 잠깐 멘붕이 왔지만, 정신 차리고 대화를 이어갔다. 나는 런던에 여행왔다, 런던은 좋은 것 같다 등등. 얘기해보다가 알게 된 건데, 그분은 17살이었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니 당시 25살인 나와 엇비슷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나이차가 많아서 놀랐다.
무튼 그렇게 시시콜콜한 얘기를 영어로 꽤 길게 했다. 그러다가 그녀의 친구가 와서 인사를 하며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인스타 아이디라도 받을 걸... 그냥 아는 외국인 친구 하나 만들면 어땠을까 싶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생각도 못해서 내 기억 속의 인연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끝났지만, 이 일은 나한테 큰 자신감을 주었다. 나도 뭔가.. 했구나!! 시도했구나!
계속 런던 중심지에만 있다가 토트넘 경기를 보기 위해 꽤 먼 북런던으로 숙소를 옮겼다. 북런던의 에어비엔비 숙소를 갔는데, 호스트가 매우 유쾌하신 아주머니였다. 그동안 목말랐던 현지인 스몰토크를 아주 실컷, 질릴 만큼 했다… 그러나 그 자체로 너무 재미있었다. 숙소를 옮긴 날은 그냥 주변을 둘러보며 분위기 파악을 했다. 그런데 여러 집들과 거리의 모습들이 나에게는 너무 다 비슷하게 생겨서 분간이 안 갔다.
북런던에 숙소를 둔 채로 런던 중심지를 다녀온 날이었다. 런던아이 야경을 보고 싶어서 해가 저무는 시간까지 늦게까지 기다렸다. 동행과 하하호호 하는 사람들을 멍하니 보면서 벤치에 앉아서 기다렸다. 할 것도 없어서 핸드폰을 봤는데, 이런 젠장... 배터리도 얼마 없었다. 보조배터리도 수명을 다했기에 남은 배터리는 딱 집 갈 때 길찾는 용도로만 가능해보였다.
그러다 옆 벤치에 한국인 여성 2명이 앉으셨다. 예쁜 외국인에게도 말을 걸었는데(?) 한국인에게 말 못 걸 이유가 뭐람, 싶었다. 그래서 인사를 했는데 나를 너무 경계하셨다. 낯선 해외에서는 누구든 조심해야 하니까 충분히 이해했다. 그렇게 거리를 둔 채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데 점점 경계를 푸셨다. 나중에는 그분들이 직접 핸드폰을 나에게 쥐어주며 사진도 찍어달라고 했다. 내가 "이제는 저를 경계하지 않으시네요?" 이러니 그쪽에서 "하하 들고 도망가시면 안돼요!". 그렇게 같이 런던아이 야경을 즐기며 재밌게 놀고 북런던으로 돌아갔다.
런던 중심지에서 출발을 늦게 했기에 북런던 도착도 꽤 늦었다. 밤은 깊었고 주변은 어둑어둑했다. 근데 또 핸드폰 배터리가 동네에 거의 다 와서 수명을 다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집들이 다 똑같이 생겨서 정확히 내가 가야 할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오전에 봤던 비슷한 지형, 주차된 자동차 등등 모든 기억을 동원했지만, 그래도 답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가장 비슷하다고 느낀 곳의 문을 두들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당연히 엉뚱한 사람이 나왔고, 절실했던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혹시 철수네 집 어딘지 아세요?”라고 물었다(진짜로 물어봄). 화목한 영국 마을에는 주변 이웃도 당연히 알거라는 나의 희망찬 믿음으로 시도했다. 그러나 그분은 당연히 모른다고 답변하셨다. 위 패턴이 n회 반복되었고 (운이 좋게도?) 호스트 집이 가까워지면서 호스트가 나와서 나를 데리고 가주셨다. 나의 엄마에게 혼나듯 밤 늦게 다니지 말라고 한소리 들었다. 그래도 무사히 돌아왔으니까....ㅎ 지금 생각하면 민폐긴 했는데 나로서는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해 씻고 쉬면서 힘겨운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날은 혼자였지만, 이상하게 덜 외로웠다. 사람을 많이 만났으니까. 그냥 하루가 전체적으로 반짝거렸다. 단어로는 잘 안 잡히는데, 느낌은 확실했다—에너지가 돌았다. 불순한 의도 없이 여행객으로써 나름 용기를 내어 말을 건냈고 다행히 친절함이 돌아와 그 하루를 온전히 즐겼다.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싶지만 마땅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난다. 그냥 에너지를 느낀 활기찬 하루였다.
이전에는 정말 사람 없이 혼자만 다니던 시기였는데, 그날은 또 한꺼번에 여러 인연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눴다. 아무 일도 없다가 갑자기 일이 몰아닥치는 그 리듬. 그게 어쩌면 인생의 숨결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