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쉼표
런던에 계속 있자니 애매하고, 바로 맨체스터 가기엔 애매했다. 그래서 중간 기착지로 '버밍엄'을 택했다. 딱히 특별한 목적도 없었다. 그냥 ‘멈춤’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나마 꼭 하나 해봤으면 한 것은 공원에서 낮잠 자는 거였다. 다행히 주변에서도 낮잠을 자는 분위기라서 나 혼자만 튀는 느낌은 아니었다. 햇살 좋고 푸릇푸릇한 잔디에 내 몸을 맡기며 온전히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있을 수 있었다.
낮잠과 더불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사색에 잠겼다. 문득 들었던 한 생각, "결국 지금의 나는 내가 해온 선택들의 합성물인가 보다. 잘한 것도, 못한 것도." 따라서 이 순간에 진득하게 나의 과거 회상을 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까지 흘러왔나...
그렇게 회상해 보니 인생이 참 우연이자 운명인가 싶기도 했다. 과거의 순간순간마다 조금이라도 다른 상황이었다면, 내가 다른 결정을 했더라면, 지금의 나와 똑같은 결과물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고...
회상도 할 만큼 하고, 시점을 현재로 돌렸다. 뭔가 기분이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돌이켜보자. 그토록 유럽에 가고 싶었을 때, 그 타지 땅을 밟아보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했으면서, 카페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만 해도 좋겠다면서… (=그게 지금인데) 무뎌져서 그런가 봐... 도대체 왜 이럴까?
이전의 해외여행을 갔을 때는 다 신나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다녔는데, 지금은 왜 이렇게 신나지는 않지? 다른 유형의 여행이라 그런가… 길이가 너무 길어서 그런가…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이르지만 한국 돌아가서 뭐 할지에 대한 고민까지 다다랐다. 그렇게, 확신도 없고 자신도 없는 나를 마주하게 됐다. 한참 여행 중에 시기상조지만 답답한 마음에 자꾸 생각이 났다.
혼자라서 참 좋다가도, 좋은 광경이아 좋은 음식 모두 ‘좋은 사람’과 같이 해야 의미가 더 커지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회상하다가 어느 순간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 하고 싶은 대로 편하게 즐기다 오는 것이 흔치 않은 기회일 수도 있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마침 여행이 조금 루즈해지고, 의미를 잘 못 찾던 무렵이기도 했다. 아직 여행이 많이 남았으니 지금 순간에 주어진 저 상황을 온전히 만끽하며 지내보자고 다짐했다.
그래도 이 모든 생각들을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가 멈춰있는 덕분일지도 모른다. 다들 여행하러 바쁘게 다닐 때,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 중. 그런 하루가 한 번쯤은 필요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