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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골 넣으면, 통한다

축구 하나로 연결된 낯선 도시의 기억

by Cosmo

맨체스터에 도착해 숙소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돈을 내려고 동전지갑을 꺼냈다. 이상하게 돈이 잘 잡히지 않았다. 2초만 늦어져도 눈치 보이는 한국인이라 나는 서두르려고 했다. 그런데 기사 아저씨가 여유롭고 환한 미소로 "Take your time."이라고 말씀해 주셔서 너무 따뜻했다. 이렇게 맨체스터는 출발부터 좋았다. 2박 3일을 머물렀는데 1박은 시내에서 에어비엔비, 1박은 올드 트래포드의 호텔풋볼에서 지냈다.




첫날은 도착이 늦어서 에어비앤비 숙소에 짐을 풀고 잠깐 늦은 오후를 즐기다 저녁 먹으면 끝났다. 짐을 정리하고 식당을 찾으러 가는 길에 넓은 공원(알렉산드라 공원)이 보였다. 막연히 이 영국 땅에서 현지인들과 축구 한판 해보면 진짜 좋겠다는 내 버킷리스트가 떠올랐다.

그러던 순간, 눈앞에 내 또래의 백인 남자 2명이 축구공을 들고 걸어가고 있었다. 동네축구 n연차 짬밥으로 보았을 때 저 복장과 걸음걸이 모두 친구들을 만나서 축구하러 가는 모습이었다 (진짜 세상 다 똑같구나 느낌 ㅋㅋㅋ;;). 그때 든 생각, 나도 같이 껴달라고 말해볼까?

그들을 따라갔지만 예상과 달리 여럿이 아닌 그들끼리 간단한 리프팅과 패스를 하는 정도였다. '내가 껴서 뭐 하나? vs 그래도 말해볼까?' 갈등했다. 나한테 말을 걸어주기를 바라며 계속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냥 돌아섰다.




다시 식당을 찾기 위해 공원 중앙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그런데 꼬깔콘을 세워두고 여럿이서 풀코트로 축구를 하는 흑인 아저씨들이 보였다. 한쪽에 짐을 모아두고 꼬깔콘으로 골대를 만드는 것은 전형적인 축구인의 모습이다. 이번에도 같이 해보고 싶어서 골대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막 도착한 그들의 일행 한 명이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나는 뛰고 있는 선수 숫자를 세어 보았고, 그분과 내가 같이 들어가야 짝수가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건 하늘의 주신 기회다 생각해 용기를 내서 골키퍼 아저씨한테 말을 걸었다. "Can I join with you?" 아저씨가 내 모습을 위아래로 스캔하더니 하시는 말은 "그 상태로 뛸 수 있겠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스포츠 복장에 축구화, 나는 여행객이니까 청바지에 스니커즈였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나는 코웃음 치며 아무렇지 않게, "No problem!" 그렇게 같이 축구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는 나름 큰 용기였다. 소중한 전 재산(?)이 담긴 가방을 짐이 모인 곳에 방치한다는 사실이 마음 한편에선 조마조마했다. 근데 뭐, 뛰다 보니 그런 생각도 안 들 정도로 몰입하고 재밌었다.

경기장에 들어갔는데 초반에는 사람들이 나에게 패스를 주지 않았다. 그러다 한두 번 공을 받았는데, 내가 사이드에서 메시처럼 안쪽으로 파고들어 슛을 해서 2골을 넣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갑자기 나한테 말을 걸면서 친한 척을 했다. 너무 정신없이 재밌게 15분가량 했던 거 같다. 너무 정신없이 뛰고 놀다 보니, 사진은 결국 못 찍었다. 남은 건 공원 사진 두 장뿐...

어쩌면 다들 나이도 있으신 분들이고 거칠게 하지 않은 분위기라 가능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에서 오랫동안 축구를 했었던 내가 거기서도 통하는 것을 몸으로 실감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진짜 이제는 실력만 있으면 전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는 세상이구나 느꼈던 거 같다.

축구했던 공원 모습




다음날 기쁨이 가시지 않은 상태로 호텔 풋볼로 떠났다. 길 찾기를 해보니 걸어가나 버스를 타나 시간이 엇비슷했다. 돈을 아낄 겸, 이 기쁜 상태를 더 만끽할 겸 무거운 배낭을 메고 약 1시간을 걸어서 갔다. 만끽한 시간은 최대 20분이었고 그 이후부터는 너무 덥고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그렇게 호텔 풋볼에 도착했다. TV로만 보던 올드 트래포드를 눈앞에서 마주한 순간, 진짜라는 감각이 몰려왔다. 잠깐 멍하게 서 있다가, 짐을 맡기고 경기장 투어를 예약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엔 RED CAFE에서 밥을 먹었다. 별거 아닌 메뉴였는데도... 그 순간만큼은 꿀맛이라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어쩌면 내가 1시간을 걸어왔기에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그래도 시간이 남았고 눈앞에 플레이스테이션 축구 게임을 무료로 할 수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유분방하게 누군가 옆에 와서 1:1 대결을 하는 방식이었다. 내가 먼저 앉았고 얼마 뒤에 어떤 흑인 젊은이가 와서 같이 축구 게임을 시작했다. 나로 말하자면 학창 시절 축구게임에 미쳐서 엄마에게 "그 정신으로 공부를 하면 서울대를 가겠다!"라고까지 들었던 사람이다. 따라서 결과는 나의 압도적인 실력으로 승리했다. 상대방이 슬퍼하는 눈빛을 보았지만... 미안, 이건 승부니까. 나는 한국에서 수백 판을 했다고...

너무 집중한 나머지 축구 경기장 투어 출발 시간대에 늦었다. 헐레벌떡 뛰어가다가 문이 있길래 열었는데 사이렌이 울렸다. 그곳은 VIP들이 즐기면서 경기를 볼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우연찮게(?) VIP 공간을 직관(?)했고, 얼마 뒤에 경비원들이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렇게 투어에 늦참했지만 볼 거는 다 봤다. 경기장 입구를 지나 터널을 딛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TV로만 보던 그 풍경이 진짜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으로도 울컥했다. 내가 이 공간에 있구나라는 감정을 몸소 느꼈다.

호텔 창가뷰, 투어 모습




짧게는 이 맨체스터 일정을 돌이켜보니, 인생이란 참 알게 모르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내가 공들고 간 백인청년 2명을 따라가지 않았다면?

- 알렉산드라 파크에 갔을까?

- 그곳의 축구하는 흑형들을 만났을까?

- 내가 OT까지 50분 넘게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 RED CAFE에서의 식사가 그렇게까지 맛있었을까?

- 4성급 호텔이 이만큼 좋은 거구나 확연히 느꼈었을까?


어쩌면 인생도 이런 원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스스로 과거/미래의 자신에게 말해주었다. "지금 많이 힘들지? 근데 그 힘듦으로 인해 맛볼 성공의 달콤함이 더 클 거야."

이렇게 약 10일간의 영국이 끝났다. 다음은 프랑스 파리. 공항 의자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며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나는 어디론가 흘러간다…그리고 거기서도 뭔가, 골 하나 넣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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