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역 뒤에 숨어서는 진짜 변화 없다
대한민국 공공부문 임직원은 약 220만 명이다. 공무원 115만 명, 군인 50만 명, 경찰 13만 명, 소방공무원 4만 4천 명, 공공기관 임직원 40만 명, 공립학교 교원 50만 명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 일하고 있다. 이들에게 지급되는 인건비만 연간 110조 원, 전체 국가예산의 15%에 달한다.
그런데 이 막대한 인적 자원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매년 1조 4천억 원. 2024년 중앙정부와 공공기관이 각종 용역에 쏟아부은 혈세다. 전체 정부 예산의 0.2%에 불과해 보이지만, 초등학교 1,400개를 지을 수 있는 거대한 규모다. 더 심각한 것은 이 수치가 매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이 잘 되려면 대통령이나 정치인 몇 사람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공직자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 핵심이다. 그런데 지금 이들은 정책의 설계자가 아닌 단순한 예산 집행 관리자로 전락했고,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과 책임감은 실종됐다.
행정안전부 자료에 따르면 중앙부처 과장급 이상 공무원의 평균 재직기간은 1년 6개월에서 2년에 불과하다. 복잡한 정책을 이해하고 전문성을 축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이런 구조적 문제가 용역 의존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정책 과제를 마주하면 내부 역량으로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용역부터 발주한다. 그 결과 악순환이 시작된다. 공무원은 용역 관리만 하고, 정책 전문성은 더욱 퇴화되며, 다음에도 또 용역에 의존하게 된다.
실제로 용역 담당 공무원들이 토로하는 말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업무는 저희가 충분히 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급자가 용역을 원하시니까요." 이런 현실이 바로 용역만능주의의 실체다.
고양시 사례에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최근 3년간 주요 용역 예산이 2022년 14억 원에서 2024년 25억 원으로 급증했다. 그런데 2025년 예산 심의에서 벌어진 일은 충격적이다.
도시기본계획 재수립 용역 5억 원이 4년 연속 삭감됐고, 원당역세권 종합발전계획 3억 원은 3년째 표류하고 있다. 법정계획조차 정치적 논리에 휘둘려 핵심 정책이 무산되는 기형적 상황이다. 용역에 의존하다 보니 의회의 예산 삭감 한 번에 필수적인 도시계획마저 중단되는 위험한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용역예산 없으면 공무원 역할도 없다는 말인가?
복지재단 설립 타당성 검토 용역을 추진할 때 담당 공무원이 털어놓은 말이 현실을 보여준다. "관련 조례와 타 지자체 사례만 검토하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위에서 용역을 하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추진하는 거죠."
필자가 고양시에서 직접 체험한 바에 따르면, 많은 공무원들이 새로운 일을 기피한다. 새로운 정책이나 사업이 제기되면 "이건 우리 소관이 아니다", "법적 근거가 없다", "선례가 없다"라며 온갖 이유를 들어 회피하려 한다.
한글로 쓰인 11개 조항의 2페이지짜리 옥외행사 조례를 두고도 관련 부서들이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같은 조례를 보고도 "우리 부서 소관이 아니다"라며 서로 떠넘기는 실랑이가 벌어진다.
일을 입체적으로 보고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규제와 제약 사항만 찾아내려는 소극적 자세가 몸에 배어 있다. 이런 조직 문화에서는 복잡한 정책 과제가 나올 때마다 "용역을 주자"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당연하다. 이러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시대에 공무원들이 선도는커녕 따라가지도 못하는 실정이다.
인구 팽창시기에 만들어진 규제 일변도의 각종 법과 제도를 인구 감소시대에도 그대로, 아니 다양한 감사사례를 적용하여 더 강화하여 규제에 집중하는 현실이다.
순환보직제와 용역만능주의가 만든 전문성 부족 문제는 국제무대에서 더욱 심각하게 나타난다. 독일 주재 한국 대사를 역임한 모씨는 "완벽한 전문성으로 무장된 외국 외교관들과 비전문적인 데다 언어도 달리는 사람들이 협상무대에 서면 결과가 뻔하다"며 "외국의 경우 대사들은 3~4번 대사 경험이 있는 노련한 외교전문가들인데 우리는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을 요직에 앉히는 경우가 많다"라고 지적했다.
최근 2025년 7월 한미 관세 협상이 대표적 사례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협상 과정에서 한국과 일본 간의 경쟁 심리를 교묘히 이용했다. 그는 CNBC 방송에서 "한국이 일본의 합의를 읽을 때 한국의 입에서 욕설이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일본이 먼저 합의한 상황에서 한국의 조바심을 협상 카드로 활용했다.
결국 한국은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3,500억 달러+1,000억 달러 규모의 투자 약속을 해야 했다. 단순한 관세 협상이 막대한 투자 약속을 전제로 한 '거래'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역에 의존하는 관행은 더욱 위험하다. 실제로 2006년 한미 FTA 협상 당시 외교통상부가 44명의 전문가를 긴급 충원해야 했던 것 자체가 기존 통상 전문인력 부족을 보여준다. "법률가들의 전쟁"으로 비유되는 협상에 대비해 6명의 국내 변호사와 4명의 미국 현지 변호사들을 특별 채용했다는 것은 평상시 공무원 조직 내 전문성이 부족했음을 의미한다.
용역 보고서로는 상대방이 실시간으로 구사하는 고도의 협상 기술에 대응할 수 없다. 통상협상은 복잡한 국제 규범과 경제학적 지식, 산업별 특성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한 고도의 전문 영역인데, 1-2년마다 부서를 옮기는 순환보직 시스템 하에서는 이런 전문성을 축적할 수 없다. 그 결과 상대방의 전문성과 협상 기술에 밀려 국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중복 용역 문제다. A부처에서 "○○정책 효과성 분석"에 5억 원을 쓰고, B부처에서 "○○제도 개선방안 연구"에 3억 원을 쓰며, C기관에서 "○○분야 해외사례 조사"에 2억 원을 쓰는 식으로 결국 10억 원을 들여 비슷한 결론을 세 번 얻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한 중앙부처 과장은 이런 현실을 털어놓았다. "다른 부처에서 비슷한 용역을 했는지 확인할 시스템도 없고, 설령 알아도 '우리 상황은 다르다'는 이유로 또 용역을 줍니다. 솔직히 기존 자료만 잘 활용해도 새로운 용역의 70-80%는 필요 없을 겁니다."
정부는 정책연구관리시스템(PRISM)을 운영하고 있지만 형식적 검토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한 공무원은 "프리즘 시스템에서 검색해 보고 '유사한 연구가 없다'라고 적어내면 그만"이라며 "실제로는 제목만 다르고 내용이 비슷한 용역들이 부지기수"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다. 현재 고급공무원단 중 석사 이상 학위 소지자가 75%, 박사 학위 소지자가 15%에 달한다. 학력과 경력 면에서 이미 선진국 공무원들과 견줄 만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비공개를 전제로 털어놓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상당한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다. 한 시청의 기획담당 주무관은 "해외사례 조사나 통계 분석 같은 건 인터넷만 있으면 며칠이면 끝나는 일인데, 꼭 수천만 원 들여서 용역을 줘야 하나 싶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해외사례 조사는 AI 번역 기술의 발달로 언어 장벽도 크게 낮아진 상태다. 경상남도의 한 주무관은 "독일 지방정부 사이트에서 직접 자료를 받아서 번역 프로그램 돌려보니까, 예전에 3천만 원짜리 용역으로 받았던 보고서와 거의 똑같은 내용이 나왔어요"라며 실제 경험을 증언했다.
분석 결과, 현재 정부 용역의 상당 부분은 공무원이 자체 수행 가능하다. 단순 현황조사와 통계 취합, 기존 정책의 성과 측정, 법령과 제도 검토, 해외사례 벤치마킹 등은 지금 당장이라도 공무원이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이다.
실제로 선진적인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 모시의 한 과장은 "우리 팀에서 직접 만든 주민참여예산 분석 보고서가 용역 결과물보다 훨씬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었습니다. 현장을 잘 아는 공무원이 직접 하니까 더 좋은 결과가 나왔어요"라고 증언했다.
핵심은 공무원들에게 연구할 시간과 환경을 제공하고, 실패를 용인하는 조직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한 중앙부처 사무관은 "용역 발주하면 3-4개월 걸리는 일을 우리가 직접 하면 1개월이면 끝날 수 있는데, 혹시라도 실수할까 봐 무조건 용역으로 돌리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생성형 AI의 등장은 용역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해외 정책 사례 수집과 번역, 기초통계 분석과 시각화, 설문조사 설계와 분석 등은 이미 AI가 충분히 지원할 수 있는 영역이다.
서울시의 한 팀장은 실제 경험을 공유했다. "ChatGPT 활용해서 해외 스마트시티 사례를 조사하니까 예전에 1억 원짜리 용역으로 했던 일을 일주일 만에 끝냈습니다. 이제 굳이 용역 줄 필요가 없는 일들이 정말 많아요."
공직자 한 명 한 명이 AI를 활용해 전문성을 발휘한다면 그 파급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단순히 용역비 절감을 넘어 정책의 질적 향상, 국민 서비스 개선, 행정 효율성 증대 등 다방면에서 혁신을 이룰 수 있다.
물론 모든 용역을 '악'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인공지능·바이오·원자력 등 첨단기술 정책, 대규모 인프라 설계, 환경영향평가·교통영향평가 등 법정 자격 필요 분야, 갈등지역 조사 등 중립성이 요구되는 분야, 브랜딩·마케팅 등 창의적 기획 등은 반드시 외부 전문가가 필요한 영역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분야에서는 오히려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해서라도 최고 수준의 외부 전문가를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조건적인 용역 축소가 아니라 꼭 필요한 분야에 선별적으로 집중하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영국은 정부 과학청을 통해 정책연구의 60%를 내부에서 수행하고 있고, 독일은 각 부처별 전문 정책연구기관에서 대부분의 기초연구를 처리한다. 프랑스는 국립행정학교 출신 엘리트 공무원들이 전문분야에서 장기 재직하며 정책연구를 직접 수행하는 체계를 구축했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공무원의 전문성을 키우는 데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외부 용역은 정말 필요한 분야에만 선별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우리도 이런 모델을 벤치마킹해 점진적으로 내부 역량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공직자의 전문성 강화를 위해서는 '전문분야 트랙제'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 통상, 국제협력, 복지, 환경 등 전문 분야별로 별도의 승진 경로를 마련하고, 해당 분야에서 최소 5년 이상 근무한 공무원들에게는 전문성 평가를 통한 특별 승진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또한 '팀 기반 연구 활동'을 장려하여 개별 공무원의 부담을 줄이면서도 조직 차원의 전문성을 축적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부서 내에 정책연구팀을 구성하고, 이들이 용역 대신 내부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다.
체계적인 개혁을 통해 5년간 총 3,500억~5,000억 원의 예산 절감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1-2년 차에는 명백히 내부 수행 가능한 업무들을 중심으로 자체 수행률을 현재 25%에서 30%로 높여 연간 700억 원을 절감하고, 점진적으로 40%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현실적인 목표다.
더 중요한 효과는 공직자들이 정책에 대한 주인의식과 전문성을 회복하게 된다는 점이다. 자신이 직접 기획하고 연구한 정책은 애정과 책임감이 다르다. 김밥집 사장이 직접 개발한 메뉴에 자부심을 갖고 끊임없이 개선해 나가듯, 공무원이 스스로 만든 정책에 대해서는 현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지속적으로 보완해 나갈 수 있다.
공직자의 내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한 창의적 정책 개발 역량이 확보되고,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과학적 정책 결정이 일상화되면 대한민국 정부는 진정한 혁신 정부로 거듭날 수 있다.
매년 1조 4천억 원의 용역비가 모두 낭비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당 부분이 공무원들의 전문성 부족과 책임 회피로 인한 불필요한 지출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의 잠재력은 이미 선진국 수준이다. 연간 110조 원의 인건비를 받고 있는 220만 공직자들이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한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시스템이다.
공직자는 이제 용역 뒤에 숨지 말고 전면에 나서야 한다. 정치인이나 대통령 몇 사람이 잘하는 것이 아니라, 공직자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 대한민국이 잘 되는 핵심이다.
공직자의 전문성이야말로 대한민국의 진짜 경쟁력이다. 용역만능주의를 끝내고 공직자의 전문성 혁명을 통해 진정한 전문 정부를 만드는 것, 이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핵심 과제다.
앞서 언급한 고양시 공무원의 말처럼,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외부에 맡기는 관행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변화는 이미 현장에서 시작되고 있다. 이제 시스템이 따라와야 할 때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이 글은 2025.08.03 FN투데이에 필자 명의 칼럼으로 게재되었다.
https://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9294
참고문헌 및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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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특례시, 「시정백서」, 각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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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령 및 제도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
「국가재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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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연구관리시스템(PRISM) 운영 현황
언론 보도
고양신문, "고양특례시의회, 2025년도 예산 201억 삭감", 2024.12.20
경기일보, "고양시, 2025년 예산 3조 3405억 편성해 의회 제출", 2024.11.21
아시아타임스, "고양시 원당역세권 종합발전계획 '예산 삭감'에 3년째 표류", 2024.12.24
마이고양, "일산 포함 고양시 16개 구도심 지구단위계획 용역 전액 삭감", 20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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