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의 기회인가, 외교적 고립의 서막인가
2025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 경주 화백컨벤션센터에서 21개 회원국 정상과 6,000여 명의 대표단이 참석하는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한국은 2005년 부산 이후 20년 만에 세계 GDP의 61%, 교역량의 49%를 차지하는 아시아태평양 최대 경제협력체의 정상회의를 주최한다. 그러나 이 화려한 무대 뒤편에는 한국 외교가 직면한 냉혹한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중국 내부 권력투쟁 상황 등은 시진핑의 경주 불참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2024년 7월 20기 3중 전회 이후 군권이 장유샤에게 넘어가면서 시진핑은 베이징을 비우는 것 자체를 정치적 리스크로 인식하고 있다. 중앙군사위원회 제2부 주석 허웨이둥의 실종설과 먀오화 상장의 낙마 속에서 장유샤 세력이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했다는 분석이 중화권 언론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 또 한국에서 트럼프를 만나는 게 부담스럽고 들러리만 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미국, 중국, 북한, 러시아, 일본이라는 5대 핵심 행위자 모두가 한국을 주변부로 밀어내려는 지금, 경주는 축제가 아닌 한국의 생존 전략을 시험하는 장이 될 것이다. 문제는 이재명 정부가 이 위기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대응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한마디로 우려스럽다.
외교는 국내정치처럼 지지세력이 무슨 일을 해도 무조건 환호하지 않는다. 힘을 바탕으로 이익만 탐하는 자리기 때문에 지난 한미협상처럼 쇼잉만 했다가는 한국 위상은 수직으로 추락할 상황이기 때문이다.
시진핑의 경주 불참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게 김상순 동아시아평화연구원/이사장 등 전문가들의 관측이 지배적이다. 중국 입장에서 득실을 따지면 답은 명확하다.
첫째, 트럼프와 김정은이 주인공인 무대에서 시진핑은 들러리에 불과하다. 브릭스나 상하이협력기구처럼 자신이 주도하는 무대가 아닌 곳에서 조연으로 서는 것은 스포트라이트를 즐기는 시진핑의 성향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둘째, 차이나 패싱의 악몽이 재현될 것이 뻔하다. 김정은 정권은 2013년부터 2019년까지 4차례 핵실험을 사전 통보 없이 강행하며 중국을 무시했다. 문재인 시절 판문점·싱가포르·하노이 회담에서도 중국은 철저히 배제당했다. 경주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언어 장벽과 즉흥 외교의 부담이다. 영어 구사 능력의 한계와 원고 의존도가 높은 시진핑에게 즉흥적 외교가 펼쳐지는 국제무대는 치명적이다.
넷째, 국내 정치 불안정으로 북경을 비울 수 없다.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인 장유샤가 미국 국가안보보좌관 제이크 설리번과 단독 회담을 가졌고, 2024년 9·3 열병식에서 1선에 서며, 2025년 5월 전군 훈련장 건설 행사를 주재하는 등 군부 실권 장악의 신호가 명확하다. 2025년 3월 양회 폐막식에서 장유샤가 퇴장하는 시진핑에게 대놓고 등을 돌린 장면이 포착되면서 중국 군부 내 이상기류설이 돌고 있다. 베이징을 비우는 것 자체가 쿠데타 리스크를 높인다는 우려가 당 내부에 팽배하다.
다섯째,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한 이슈 카드가 없다. 김정은과 트럼프 이슈에 묻혀버리는 상황에서 한국에 와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차라리 '트럼프, 북경으로 와라'며 불러들이는 것이 자신의 안방에서 유리한 협상을 할 수 있다.
중국이 리창 총리나 더 낮은 서열을 보낸다면, 이는 한국을 외교적으로 격하하는 명백한 신호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한국 홀대가 아니라, 미중 전략경쟁 심화 속에서 APEC과 같은 다자주의 플랫폼 자체의 가치가 중국에게 하락했음을 의미한다.
중국은 이미 BRICS, SCO 등 자신이 주도하는 플랫폼으로 외교 무게중심을 옮기고 있으며, 이는 미국의 '프렌드쇼어링' 전략에 대응하는 중국의 전략적 선택이다. 미국이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을 구축하려는 움직임 속에서, 중국은 APEC 내에서 이러한 미국의 전략에 반발하기보다는 별도의 경제 블록을 통해 대응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다만 시진핑이 한국에 온다면 무조건적으로 북미협상을 지원(핵 보유 선언 등 포함)한다는 통 큰 선심을 보여주는 일이 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달 말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순방을 계획하고 있는데, 우선 26∼28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월 푸르에서 열리는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같은 달 27∼29일 일본 방문을 조율하고 있으며 이를 감안하면, 트럼프 대통령의 행선지는 말레이시아(26, 27일)→일본(27~29일)→한국(29일 입국) 순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 어려운 만큼 APEC 정상회의 개막일인 31일까지 한국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것이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최소한의 일정만 소화하고 귀국길에 오르는 '당일치기 방한'이 이뤄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가 한국에 오는 이유는 단 하나, 김정은이다. 한국도 시진핑도 아니다. CSIS의 빅터 차 한국석좌는 트럼프가 북한을 인도, 파키스탄과 나란히 언급하는 것은 북한도 '사실상 핵보유국'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신호이며, "이는 트럼프가 멍청해서가 아니라 상당히 영리한 전략"이라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취임 직후 김정은을 "핵 보유국(nuclear power)"이라 지칭했고, 김여정은 2025년 7월 성명을 통해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보유국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라고 못 박았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으로 경제적 지원과 군사 기술을 확보했고, 핵무기를 헌법에 명시하며 협상 카드로서의 가치를 포기했다. 이제 북한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핵 보유국 인정'이다.
트럼프의 시나리오는 명확하다. 경주를 빌미로 평양이나 판문점을 전격 방문하고, 김정은과의 4차 정상회담에서 '사실상 핵 보유국 인정'과 대북제재 완화를 맞바꾸는 빅딜을 성사시킨다. 그 대가로 노벨평화상을 거머쥔다. 2018년 싱가포르, 2019년 하노이와 판문점에서 문재인을 배제했던 경험을 학습한 트럼프는, 이번에도 김정은과 단독 회담만 원한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미국 의회와 외교 관료 집단의 반발에 부딪칠 가능성이 높다. 공화당 내에서도 북한 핵 인정에 대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고, 민주당은 더욱 강경하다. 트럼프가 독단적으로 밀어붙일 경우, 국내 정치적 반발이 거세질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2기 우선과제로 '노벨평화상'을 공언한 만큼, 의회를 우회하거나 압박하는 방식으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게 더 위험한 것은 한미 관세협상과의 연계다. 트럼프는 3,500억 달러 선불 방위비 분담금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는 이재명에게 이렇게 제안할 가능성이 높다. "내가 김정은과 만날 때 아무 소리 하지 마라. 북한 핵 보유국 인정에 동의하라. 그럼 방위비는 깎아줄게. " 이는 한국의 30년 비핵화 원칙과 경제적 이익을 맞바꾸는 악마적 거래다.
가장 우려되는 시나리오는 트럼프가 한국에서 정말 "나는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을 만날 것"이라고 깜짝 발표하는 것이다. 2019년 6월 30일, 트럼프는 G20 오사카 정상회의 직후 판문점에서 김정은과 만났다.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사진 촬영에는 참여했지만, 본격적인 회담에서는 배제됐다. 비하인드 스토리에 따르면, 문재인이 회담장으로 들어가려 하자 미국 경호원들이 앵글 밖으로 밀어냈다는 증언도 있다.
트럼프는 이 경험을 통해 '한국 배제 전략'이 효과적임을 학습했다. 이번에도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경주 APEC에서 트럼프와 이재명이 형식적인 정상회담을 하고, 그 직후 트럼프가 "나는 내일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과 만난다"라고 발표하면 어떻게 될까. 한국은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회담에서 또다시 왕따가 된다.
김정은 역시 '통미봉남' 전략에 충실할 것이다. 김정은은 2023년 12월 50년 통일정책을 전격 폐기하며 한반도 관계의 근본적 변화를 예고했고, 2024년 10월 헌법에 한국을 "적대국"으로 명시했다. 김여정은 한국을 "화해와 협력의 파트너가 될 수 없다"라며 대화 의사가 전혀 없음을 천명했다. 한국은 철저히 무시하고, 미국과만 직거래하는 전략이다.
둘의 공통적인 목적은 한국이 됐든 중국이 됐든 배제하고 단둘이 만나는 것이다. 트럼프는 평양 방문이나 판문점 회담을 원하고, 김정은은 이를 던질 것이다. 여기서 결정적인 한 마디가 나온다. "핵 보유국 인정." 김정은은 노벨평화상을 미끼로 트럼프로부터 이 한 마디를 받아낼 것이다.
김정은의 자신감은 러시아에서 나온다. 2024년 6월 푸틴과 김정은이 체결한 포괄적 전략동반자 조약은 냉전 종식 이후 최대 군사동맹으로, 일방이 공격받으면 타방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즉각 군사 지원을 제공하도록 명시했다. 북한은 2024년 900만 발의 포탄과 100기 이상의 탄도미사일을 러시아에 제공했으며, 총 14,000명 이상의 북한군이 러시아에 파견했다. 기존 벌목인력까지 최대 5만 명이라는 분석도 있는데 북한군은 약 천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2025년 봄 로이터 조사에 따르면 북한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에서 사용하는 포탄의 절반 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한국 국정원은 2025년 4월 러시아가 북한에 방공 미사일, 전자전 장비, 드론, 정찰위성 발사 기술을 제공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핵탄두, 재진입 기술, ICBM 청사진까지 제공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북한은 전장 실전 데이터를 확보하며 무기 체계를 고도화하고, 러시아로부터 첨단 군사기술을 이전받으며, 연간 수억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이는 단순한 무기 거래가 아니다. 김정은은 쿠르스크 지역 전투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위해 평양에 기념비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우크라이나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귀환한 북한군 14,000명은 한반도에서 가장 전투력이 높은 부대가 될 것이다.
러시아가 제공한 정찰위성 기술의 의미는 결정적이다. 북한이 한반도 전역을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되면, 한국의 '킬체인' 전략이 무력화될 수 있다. 북한이 한국의 선제타격 준비 징후를 조기에 포착하고 대응한다면, 한국군의 첫 타격 효과는 크게 감소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자전 장비다. 러시아의 전자전 기술을 확보한 북한은 한국의 지휘통제 시스템과 정밀유도 무기를 교란시킬 수 있다. GPS 신호 교란, 통신망 마비, 레이더 무력화 등이 현실화되면 한국군의 첨단 무기 체계는 무용지물이 된다.
경주에서 트럼프가 김정은과 핵 보유국 인정 딜을 성사시키면, 배후에는 러시아가 있다. 푸틴은 북한을 키워 동북아에서 미국을 견제하는 전략 자산으로 활용하고, 북한은 러시아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얻어 한국과 일본을 압박하는 카드로 쓴다. 중국도, 미국도 통제할 수 없는 북러 밀월이 한반도 안보를 근본부터 흔들고 있다.
그러나 김정은 체제의 내부 상황도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이 '통미봉남' 전략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만성적인 경제난과 정권 안정성 문제가 있다.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으로 외화를 벌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주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기는 어렵다. 실제로 러시아에게 병력과 무기제공에 따른 대가가 미흡하여 김정은이 불만스럽다는 보도도 있다. 따라서 김정은의 핵 보유국 인정 요구는 단지 외교적 계산만이 아닌, 체제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전략임을 이해해야 한다.
일본은 경주 APEC을 조용히 지켜보며 한국의 외교적 실패를 확인할 것이다.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한미일 정상회담으로 제도화된 3자 협력 체계는 좌파정권인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 이재명의 친중, 대북 유화 노선과 역사 문제 재점화 움직임은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과의 안보 협력 강화에 회의적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일본 역시 한국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최우선으로 하며, 미국은 한미일 3자 협력을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축으로 본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과의 안보 협력 필요성을 인식하면서도, 한국의 외교적 방향성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쿼드(미국, 일본, 호주, 인도) 협력 강화로 방향을 틀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미국의 신국방전략이다. 트럼프는 대만 침공 시 북경 폭격까지 언급하며 대만 방어 의지를 명확히 했지만, 한국에 대해서는 주한미군 철수를 "2기 우선과제"로 언급한 바 있다. 미국이 곧 발표할 신국방전략에서 '제2의 애치슨 라인'을 설정할 경우, 한국이 포함될지가 최대 변수다.
1950년 1월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국을 제외했고, 이는 6·25 전쟁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됐다. 2025년 신국방전략에서 일본과 대만은 포함되지만 한국이 배제된다면, 이는 주한미군 감축과 방위비 폭증으로 이어질 것이다. 3,500억 달러는 시작에 불과하다. 매년 방위비 협상이 한국 외교의 최대 난제가 되고, 국방 예산의 상당 부분이 미국에 상납되는 구조가 고착화된다.
이재명 정부가 직면한 딜레마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대북 확성기 중단이나 대중 관계 개선 시도는 야당과의 갈등, 국민 정서를 고려한 정치적 선택이었을 수 있다. 좌파 정권의 평화 지향적 정체성을 고려하면 유화책은 예상된 행보였다. 국내 정치적 제약 속에서 이재명 정부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택했을 뿐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하다. '피스메이커'를 자처하며 대북 확성기를 중단하고 북한에 손을 내밀었지만, 북한은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하며 냉대했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반미 시위는 방치하면서 반중 시위는 단속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지만, 중국은 경주에 시진핑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는 더 심각하다. 3,500억 달러 방위비 분담금 요구에 대한 명확한 입장도 없이, "협상 중"이라는 애매한 말만 반복하고 있다. 트럼프가 북한 핵 보유국 인정 압박을 가할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미국이 주한미군 감축을 들고 나올 때 어떤 카드를 꺼낼 것인지, 구체적 대안은 전무하다.
경주 APEC 준비 과정도 의문을 남긴다. 서울 신라호텔 숙소 예약이 취소되고 경주로 변경된 것은 시진핑의 불참 가능성을 고려한 격 낮추기로 해석된다. 6,000여 명 대표단을 수용할 인프라도 부족한 경주를 고집한 것은 '경주의 문화유산을 세계에 알린다'는 명분 뒤에 실질적 외교 성과에 대한 전략이 보이지 않는다.
둘째, 북러 군사동맹의 한반도 위협. 러시아가 제공한 전자전 장비, 정찰위성 기술, ICBM 재진입 기술이 북한의 대남 타격 능력을 비약적으로 향상하면, 한국의 미사일 방어 체계는 무용지물이 된다. 2024년 북러 상호방위조약으로 한반도 유사시 러시아 군사 개입 가능성이 현실화됐고, 우크라이나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북한군이 귀환하면 이들은 한반도 최정예 부대가 된다.
셋째, 주한미군 감축과 방위비 폭증. 신국방전략에서 한국이 애치슨 라인 밖으로 설정되면 주한미군 감축이 현실화되고, 남아있는 주한미군에 대해서는 더 많은 비용 분담 압박이 가중된다.
넷째, 북중러 3각 동맹의 대한 포위망. 러시아는 북한에 군사기술을 제공하고, 중국은 북한의 핵 보유를 묵인하며, 북한은 양국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압박한다. 유엔 안보리는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으로 무력화됐고, 대북 제재는 사실상 붕괴됐다. 그러나 중국의 입장은 복잡하다. 북한의 군사적 도발이 동북아시아의 불안정성을 높여 중국의 지역적 이익을 훼손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북한을 지원하면서도 동시에 통제하려는 이중 전략을 구사한다.
다섯째, 남북관계의 영구적 단절. 북한이 한국을 "적대국"으로 헌법에 명시한 상황에서 트럼프-김정은 직거래가 성사되면 남북관계는 영구적으로 단절된다. 이산가족 상봉, 경제 협력, 통일 논의 등 모든 것이 불가능해진다. '통미봉남'의 완성이다.
여섯째, 외교적 신뢰 추락. 경주 APEC에서 한국이 아무런 역할도 못하고 왕따만 당하는 모습이 전 세계에 생중계되면, 한국 외교의 위상은 추락한다. 중견국 외교, 글로벌 중추국가 같은 구호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한국은 강대국 게임의 체스판 위에서 타의에 움직이는 하나의 말로 전락한다.
경주 APEC까지 한 달도 남지 않았지만, 지금이라도 방향을 전환하면 최악은 막을 수 있다. 다만 이는 단순한 '친미 일변도' 선언이 아닌, 전략적 균형과 결단의 조화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한국은 중국, 미국, 일본을 비롯한 주변국들에 지켜야 할 레드라인을 분명히 정하고 선언해야 한다. 한반도 비핵화 원칙, 한미동맹의 근간,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 영토주권 침해 불가 등 협상할 수 없는 핵심 가치를 명확히 천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의 선명성이야말로 오히려 상대국들의 이해와 존중을 받을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주권국가로서 양보할 수 없는 선을 분명히 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강함의 표현이며, 다른 나라들도 이를 존중하게 된다.
둘째, 한미동맹 강화와 경제적 상호의존 심화. 이재명은 경주 개막 전 트럼프와의 단독 정상회담을 확보하고, 공급망 재편에서의 한국 역할, 첨단 반도체·배터리 기술 협력, 쿼드 플러스 참여 의사를 명확히 하되, 이것이 중국과의 경제 관계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동시에 강조해야 한다. 한국 수출의 25%를 차지하는 중국 시장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실용이라는 투트랙이 현실적 대안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반도체 공급망에서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되, 중국 시장을 겨냥한 소비재, 화학제품, 문화콘텐츠 분야에서는 중국과의 경제 교류를 유지하는 전략이 가능하다. 또한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제3국을 통한 우회 전략도 고려할 수 있다.
셋째, 비핵화 원칙 고수와 자체 억제력 강화 병행. 트럼프가 북한 핵 보유국 인정 압박을 가하더라도, 한국은 NPT 체제 수호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북한 핵 인정은 한국의 자체 핵무장 논의로 이어질 수밖에 없으며, 이는 동북아 전체의 핵 도미노를 촉발한다"는 논리로 미국을 설득해야 한다. 동시에 확장억제 강화, 즉 미국의 핵우산 공약을 더욱 구체화하고 제도화하는 협상을 병행해야 한다. 한국 내 핵무장 지지 여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전문가들은 북한이 한국의 핵무장을 방지하기 위해 선제 타격을 감행할 가능성을 경고한다. 따라서 공개적 핵무장 선언보다는 전술핵 재배치나 핵잠수함 도입 논의를 카드로 활용해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을 강화하는 전략적 접근이 현실적이다.
넷째, 한미일 3자 협력 복원과 NATO 협력 확대. 과거사 문제는 별도 트랙으로 관리하되, 안보 협력만큼은 강화하는 투트랙 접근이 필요하다. 경주에서 한미일 3자 회담을 성사시키고, 북한 핵·미사일 정보 공유, 공동 대응 훈련 등을 약속해야 한다. 일본을 적으로 돌리면 미국도 한국을 포기한다는 냉정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과거사 문제를 다루는 실질적인 방안으로는 '미래지향적 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역사 공동 연구 위원회' 같은 실질적인 소통 채널을 제안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북러 군사동맹에 대응하기 위해 NATO와의 협력도 강화해야 한다. 북한군이 유럽 안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한국은 NATO 파트너십을 활용해 러시아의 대북 무기 이전을 차단하는 국제 공조를 주도해야 한다. 한국과 NATO의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지점이 생긴 것은 위기이자 기회다.
다섯째, 대북 메시지의 전환과 실질적 압박 수단 복원. 일방적 유화책은 북한의 조롱만 샀다. 확성기 재개, 대북전단 살포 허용 등 실질적 압박 수단을 복원하고, "대화는 열려있지만, 도발에는 강력히 대응한다"는 명확한 원칙을 세워야 한다. 김정은이 한국을 무시하는 이유는 한국이 만만하기 때문이다. 강경한 태도를 보여야 비로소 대화 테이블로 나온다. 다만, 확성기 재개 등 실질적 압박 수단은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이끌 수도 있지만, 동시에 우발적 군사 충돌 가능성을 높일 수도 있다. 이러한 에스컬레이션 리스크에 대한 면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여섯째, 국민에게 솔직하게 소통하라. 이재명은 경주 APEC이 한국 외교의 위기임을 국민에게 솔직히 말해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고, 잘못하면 고립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응하겠습니다"라고 진솔하게 소통해야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다. 야당과의 초당적 협력도 필수다. 국가 안보는 여야를 떠난 최우선 과제임을 명확히 하고, 핵심 외교 안보 정책에서만큼은 정쟁을 중단해야 한다.
이 모든 전략의 근간에는 '원칙 있는 실용주의'가 자리해야 한다. 미국에게는 한미동맹이 우리의 생존선임을 분명히 하되, 과도한 방위비 요구나 북핵 인정 압박은 수용할 수 없다는 레드라인을 명확히 해야 한다. 중국에게는 경제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되, 사드 보복이나 한미동맹 이간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해야 한다.
일본에게는 과거사 문제의 진정성 있는 해결을 요구하되, 안보 협력은 별개 트랙으로 추진한다는 명확한 메시지를 보내야 한다. 이렇게 원칙을 세우고 일관되게 지켜나갈 때, 오히려 주변국들도 한국을 예측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는 파트너로 인식하게 된다.
위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APEC 정상회의는 한국이 아세안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기후변화, 디지털 경제, 공급망 재편 등 글로벌 이슈에서 논의 주도권을 확보할 기회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과의 양자 회담을 통해 경제 협력을 심화하고, '중견국 연대'를 강화하는 것도 한국 외교의 폭을 넓히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APEC 플랫폼을 활용해 '아시아 디지털 경제 이니셔티브'를 제안할 수 있다. K-디지털 플랫폼, 핀테크, AI 기술 협력 등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과의 경제 통합을 심화시키고, 한국이 아시아 디지털 경제의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또한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녹색기술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해 한국의 재생에너지, 배터리 기술을 공유하는 방안도 고려할 수 있다.
또한 경주는 한국의 문화 외교를 세계에 알릴 절호의 기회다. K-문화의 소프트파워를 활용해 한국의 긍정적 이미지를 확산시키고, 경제·문화·기술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공고히 해야 한다. 외교가 안보와 경제만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줄 때다.
경주 APEC은 이재명 정부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대한 엄중한 경고음이다. 시진핑은 오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는 김정은을 만나러 온다. 한국은 자국 영토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회담에서 또다시 왕따가 될 위기에 처해 있다. 한반도는 위화도 회군 후 우리 자력으로 우리 운명을 결정한 적이 거의 없다는 지정학적 냉엄한 현실을 되돌아봐야 한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중국의 지원으로 국내 권력 놀음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평화'라는 추상적 구호와 '쇼잉'에 그친다면, 우리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외교적 고립을 피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힘의 균형과 국익에 기반한 냉철한 외교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이는 맹목적 친미도, 순진한 균형외교도 아닌, 한국의 생존과 번영을 최우선으로 하는 실용 외교다.
정부는 국민에게 현재의 위기를 투명하게 설명하고, 야당과의 초당적 협력을 통해 국가 안보라는 최우선 과제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 국민도 외교 안보 문제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것을 멈추고,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줘야 한다.
경주가 '한국 외교의 치욕의 장'이 될지, 아니면 '위기를 기회로 바꾼 반전의 시작점'이 될지는 이제 정부의 결단과 국민적 지혜에 달려 있다. 쇼잉이 아닌 생존, 축제가 아닌 전략. 이것이 경주 APEC의 진짜 본질이다. 시간이 없다. 48시간이 한국의 운명을 가른다.
칼럼니스트 박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