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 속 바나나와 환율 폭등

환율은 통상·외교·내부 정치 리스크의 총체다

by 박대석

냉장고 속 바나나와 환율 폭등: 신뢰의 가격표


냉장고를 열었을 때 바나나 가격표를 보며 놀라는 시대가 됐다. 수입 과일 하나의 가격 변동이 뉴스가 되고,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담합 의혹을 제기하는 상황은 단순한 물가 문제가 아니다. 이는 서민 경제가 환율과 수입 물가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그런데 냉장고 속 바나나가 비싸진 이유를 묻는 사이, 원/달러 환율은 1,420원을 넘어섰다. 이재명 대통령 취임일인 6월 4일 1,361원과 비교하면 불과 4개월여 만에 4.2%나 급등한 것이다. 이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수준에 육박하는 비상 상황이다. 바나나 가격 상승을 걱정하는 사이, 한국의 총 자산 2경 4,100조 원 중 1,012조 원의 가치가 증발하는 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 트럼프 라운드의 가혹한 대가 등 복합적 위기의 거센 폭풍


2025년 7월 한미 관세협상은 극적으로 타결되는 듯 보였다. 당초 25%로 예고됐던 상호관세가 15%로 낮아지며 성공적 협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외환보유액의 84%에 달하는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이라는 가혹한 대가가 숨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미국이 이를 보증이나 대출이 아닌 현금 지분 투자로 선불 집행할 것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관세는 7월 말 타결과 달리 25%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연휴 기간 환율이 1,420원을 돌파한 것은 '심리적 저항선의 붕괴'로 평가된다. 현재의 환율 불안정은 단일 요인이 아닌 복합적인 현상이다. 1997년의 위기가 국내 금융기관의 부실 대출과 단기 외채 과다라는 '내부적 유동성 부족'에서 비롯됐다면, 2025년의 위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국의 정치적 요구에 따른 '강제적 외화 유출 시나리오'가 시장 불안을 촉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섬뜩하다. 환율 불안의 근본 원인이 경제적 요인을 넘어 한미 간 정치 성향 차이에서 오는 마이너스 프리미엄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의해 좌우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재명 정부는 국익을 위한 외교가 무엇인지 냉정하게 되돌아볼 때다.


실제 외화 유출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러한 외교적 압력에 대한 정부의 대응이 '무능하다'라고 시장이 의심한다는 사실이다. 그 공포 심리가 환율을 밀어 올리는 자기실현적 예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재명 정부는 모든 역량을 오로지 민생과 경제와는 거리가 먼 권력 안보를 위한, 그들만을 위한 개혁에만 몰두해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분석처럼, 단기적으로는 강달러 영향이 소비자물가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국내 요인의 영향력이 커진다. 환율 상승은 수입 물가 압박으로 이어지며 물가 안정 목표 달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결국 정부의 대응 능력과 정책 신뢰성이 중장기적 환율 안정의 핵심 변수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한미동맹이 있었고, 2024년 한국의 대미 경상수지 흑자가 1,182억 달러를 기록한 것도 사실이다. 37조 달러의 국가부채와 연간 1조 달러의 이자 비용에 직면한 미국을 동맹국으로서 도와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방법의 문제다. 트럼프 요구대로 선불 투자를 집행하면 달러 수요 급증이 인플레이션을 촉발하고, 3,500억 달러 중 2,000억 달러만 원화로 조달해 환전해도 환율이 급등한다. 딜레마다. 지금 한국의 환율은 통상·외교·내부 정치 리스크의 총체다


▲ 불가능한 삼위일체와 한국의 딜레마


환율이 급등할 때 통화 당국이 취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방어 수단은 기준금리 인상이다. 그러나 한국은행은 이 카드를 쓰기 어렵다. 여기에는 경제학의 고전적 원리인 '불가능한 삼위일체(Impossible Trinity)' 이론이 작동하고 있다. 이 이론은 한 국가가 독립적인 통화정책, 안정적인 환율 유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원리다.


한국은 자본 시장 개방국가로서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독립적인 통화 정책을 추구하면 환율 안정성을 포기해야 하고, 환율을 안정시키려면 통화 정책의 독립성을 포기해야 하는 딜레마에 놓여 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기준금리를 결정할 때 미국 금리와 더불어 국내의 가계 부채 및 부동산 가격이라는 두 가지 추가 요인을 동시에 고려해야 하는 구조적 딜레마에 갇혀 있다. 달러 강세 압력이 높아져 환율을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더라도, 금리를 공격적으로 인상할 경우 이미 한계에 달한 가계와 부동산 시장이 붕괴될 위험이 상존하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통화 정책의 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되었음을 의미한다.


▲ 21세기 해법: 스테이블코인의 역설적 기회

Light Blue Futuristic Technology Project Proposal Presentation.png 박대석 작성

지정학적 리스크와 구조적 국내 약점이 맞물려 원화가 지속적인 약세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전통적인 한미 통화 스와프는 여전히 중요한 외교적 안정장치다. 더구나 3,500억 딜러 선불 현금투자를 하려면 대규모 한미 통화 스와프가 전제되어야 하지만 미국은 거절했다. 엔화 등과 같이 기축통화가 아닌 한국 돈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규모 현금 유출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스와프 이상의 새로운 금융 협력 체계가 요구된다.


흥미롭게도, 돌파구는 디지털 금융에서 나올 수 있다. 미국은 2025년 7월 '지니어스법'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발행자에게 미국 국채 또는 현금을 1대 1로 담보로 보유하도록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이를 통해 미국은 국채 수요를 창출하고 달러의 디지털 패권을 강화하려 한다.


바로 이 지점이 한국이 제안할 수 있는 혁신적 방안이다. KB국민, 신한 등 대형 은행 컨소시엄이 발행 주체가 되고 정부가 지급 보증을 제공하는 정부 보증 달러 스테이블코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발행액 전액은 미국 국채와 달러 현금을 1대 1로 담보로 하여 미국 내 수탁 은행에 예치하는 구조다.


이 방안은 3,500억 달러 현금 투자가 외환보유액의 직접적인 소진으로 이어지는 것을 방지한다. 동시에 스테이블코인 발행액은 그대로 3,500억 달러의 미국 국채 수요로 전환되어, 현금 투자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과 달리 지속적인 수요를 보장한다. 미국은 국가부채 부담 완화와 달러의 디지털 패권을 얻고, 한국은 외환 위기 없이 대미 투자를 이행하면서 아시아 디지털 금융 허브로 도약할 기회를 잡는 21세기형 윈-윈 전략이 될 것이다.


▲ 신뢰의 가격은 1,012조 원


냉장고 속 바나나의 가격표는 민생 경제의 연약함을, 1,420원대를 돌파한 환율은 국가 경제의 취약성을 동시에 대변하고 있다. 이 두 불안은 결국 국가 리더십과 정책적 통제력에 대한 신뢰 위기라는 단일한 주제로 귀결된다. 특히 위기 상황에서의 리더십은 정책 신뢰의 가장 중요한 척도다.


지난 9월 26일 국가정보자원관리원에서 발생한 화재는 국가적 IT 재난 상황이었다. 화재 발생 보름이 지난 10월 10일 현재, 정부 행정시스템 709개 가운데 214개만 복구되어 전체 복구율은 30.2%에 불과하다.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의 연간 예산이 약 5,184억 원임을 고려하면, 장비 등 물리적 피해와 행정 지연에 따른 사회·경제적 피해를 합쳐 수천억 원의 경제 피해가 예상된다. 그런데도 이재명 대통령은 이 위기 상황에서 홍보용 예능 프로그램인 '냉장고를 부탁해' 촬영을 강행했다는 비판을 받는 중이다.


대통령실은 촬영 시점과 전후 일정을 공개하며 반박했으나, 국민적 재난 상황에서 위기관리의 우선순위에 대한 의구심을 남겼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재명 대통령이 풀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차대한 과제는 트럼프를 만나고 설득하는 일이다. 당장 오늘의 환율이 아니라 국가의 앞으로 명운이 달린 문제다.


이 대통령이 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고, 외신 기자에게 탄핵당할까 두려워 미국 안대로 합의 못한다고 뒤에서 푸념할 일도 아니다. 이를 빌미로 오히려 반미 분위기를 조장하는 세력들을 수수방관해서도 안 된다. 이는 외국인 투자자와 국내 시장 참여자에게 안 좋은 신호를 계속 주고 협상 상대자인 미국을 자극하는 일이다.


현재 한국은 25% 관세를 그대로 수출업체들이 고스란히 지불하고 있고, 자칫하면 50% 추가 관세에 대미 투자액도 증가할 수 있다는 경고음도 들리는 형국이다. 일은 대소경중 선후완급(大小輕重 先後緩急)이다. 무엇이 중하고 급한 일인지 따져해야 한다. 정부가 신속하고 지혜롭게, 사심 없이 일관된 정책 대응을 할 수 있는지 모두 주시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바나나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신선 식품으로, 환율이 오르면 그에 따른 달러화 지불 비용 증가가 곧바로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환율 변화에 매우 민감하다. 지난 9월 30일 국무회의에서 이대통령이 왜 바바나 가격이 오르냐는 질문에 해당장관은 환율 때문이라고 설명했지만 "매점매석을 하면 조선시대에는 사형을 시켰다"라고 대통령이 말했다고 한다. 국내 정치는 일순 지지자들의 환호로 보여주기식 쇼(show)로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지만, 경제는 두고두고 축적된 과정과 결과가 숫자로 나타나 속일 수도 없고 지울 수도 없으며 금방 뚝딱 만들 수 도 없다.


바나나 한 송이의 가격이 오르는 이유를 물을 때, 우리는 동시에 국가 신뢰의 가격표도 함께 읽어야 한다. 그 가격표에는 1,012조 원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이것이 2025년 대한민국이 치르고 있는 신뢰 비용의 현주소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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