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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석 Feb 06. 2022

[박대석 칼럼]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과 태백산

② 제주 4·3 사건, 윤·이 후보와 김대중·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 비교

이 글은 대선 전인 2월 5일 윤석열 후보가 제주에 방문한 다음날 썼다. 그리고 두 달이 채 못되어 윤석열 당선인은 약속을 지키고 오늘 제주 4.3 추념식에 방문했다.

https://www.yna.co.kr/view/MYH20220403004400038

들어가며


제주 4·3 사건, 여수·순천 반란과 조정래 작가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3 가지는 함께 생각해야 한다. 공통점은 모두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공산주의 통일을 원하는 좌익이 일으킨 비극이다.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벌어진 제주 4·3 사건은 제주도민들이 자발적으로 일으킨 폭동이 아니었다. 남로당의 지령에 따라 남한의 선거 반대,반미,공산 적화통일을 목적으로 일으킨 좌익폭동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반란을 일으킨 제주도의 남조선노동당 무장대와 미군정, 국군, 경찰이 충돌하였고 그 이후 서북청년단으로 대표되는 폭력 테러를 진압 및 초토화 작전에서 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여수·순천 반란은 제주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하여 여수에서 대기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1개 대대가 인사계 지창수 상사 등 좌익 세포인 40여 명이 장악하여 여수와 순천을 장악하고 나아가 보성, 광양, 하동, 남원, 구례, 곡성까지 점령하며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뉴스타운 TV 동영상 캡처

조정래의 유명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여순 반란사건의 잔당 1,000여 명이 정부의 진압을 피하여 태백산맥에 입산하여 전남 보성군 벌교읍을 주 무대로 하여,1948년 10월 28일부터 6·25 전쟁 과정을 지나 1953년 7월 휴전협정 직후까지를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쓴 이야기다.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지만 공산주의자 좌익의 폭력과 반란 활동을 미화하여 청소년들에게 사상의 정체성에 많은 혼란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등 정치 지도자는 공산주의자인 좌익이 일으킨 사건에 대하여 원인을 과정을 정확하게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그리고 사건 발생 및 처리 과정에서 국가를 위하여 순직한 군인 및 경찰, 민간인 등 애국선열에 대하여 우선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난 후 무리한 진압 및 토벌 과정에서 발생한  무고한 희생자에 대하여 추모하고 적정한 보상을 하는 것이 순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선열을 폭도로, 무고한 양민 희생자는 물론이고 반란군, 폭도 그리고 이들에게 적극 가담 한자를 열사 같이 대우를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런 현실이 문재인 정권에서 벌어지고 있고  좌익세력들이 역사를 왜곡하며 호도하고 있다. 다음 달 새로 탄생하는 우익, 보수정권이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 제주 4·3 사건에 대하여 이재명 후보, 윤석열 후보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을 비교해보자. 사상에 따라 보는 관점이 확연하게 다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5일 제주시 봉개동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해 참배를 마친 후 취재진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2022.02.05. /뉴시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5일 제주도를 방문해 4.3 평화공원을 찾아 제주 4.3 사건 희생자에 참배했다. 윤 후보는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양민이 무고하게 희생된 것에 대해 그 넋을 기리고 추모하고 모든 국민이 따뜻하게 보듬고 위로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이고 의무"라며 "그것이 인권과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평화와 국민통합을 이루는 길"이라 말했다.


“얼마나 해드린다고 해도 충분치 않겠지만 제가 차기 정부를 맡게 되면 (희생자와 유족에게) 합당하게 보상이 이뤄지도록 최대한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적정한 발언이다. 당연히 무고한 희생자에 대하여는 국가가 고인과 유족을 위로하고 상응한 보상을 해야 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2021.4.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폭력을 바로잡는데 공소시효가 있을 수 없다"라며 "진실을 규명하고, 끝끝내 사과하지 않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고, 희생자에게 마땅한 보상을 하는 일은 국가공동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대원칙의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73년이다. 매해 4.3을 기억할 때마다 그 영겁의 세월에 놀란다"며 "국가가 국민을 향해 총칼을 휘둘렀다. 7년에 걸쳐 제주 인구 10분의 1이 학살당했다"라고 비통한 심경을 전했다. 사건을 일으킨 원인 및 좌익 폭도들에 대한 언급 없이 모두  국가 폭력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11,23 CNN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제주 4·3 사건은 공산폭동으로 일어났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많으니 진실 을 밝혀 누명을 벗겨 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억울한 희생이 있었지만 공산세력에 의한 폭동이라는 사건의 성격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과 달리 제주 4·3 사건 추념사에 연이어 참석해 “먼저 꿈을 꾸었다는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다”는 등 공산폭동 자체를 정당화하려는 의도의 발언을 하고, 군과 경찰에게 무릎을 꿇고 사죄하는 행위를 하게 했다.


이같이 제주 4·3 사건을 일으킨 폭동 자체를 의로운 항쟁으로 미화하거나 진압한 군인과 경찰을 학살자로 규정하는 것은 대한민국 건국을 방해하기 위한 공산 세력 제주 남로당 폭동을 정당화하는 셈이고,위험한 반 대한민국적 행위다.


대통령 등 정치지도자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려는 사상을 가졌는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상을 가졌는지에 따라, 반란과 폭동이 항쟁으로 둔갑하고 폭도와 반란군은 투사가 된다.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국가의 무리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무고한 희생자와 유가족은 위로하고 상응한 보상을 해야 하지만 폭동을 일으킨 좌익의 행태는 철저하게 밝혀야 한다. 다음 달 새로 탄생할 정부가 할 일이다.


▲ 제주 4·3 사건의 성격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와 맞닿아 있다.

제주도 한라산 왕관바위 / 출처 제주도청

무고한 희생자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논쟁의 핵심은 그 주동지들의 폭동이 정당하냐? 아니 면,그 폭동을 진압한 것이 정당 하냐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은 주동자는 공산폭동이라며 나쁘다고 보았고,윤석열 후보는 국가가 무고한 희생자를 추모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처럼 사건이 국가 폭력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반면에 문재인 대통령 은 반란군은 먼저 꿈을 꾼 자라며 좋게 평가했고 진압군을 학살자로 평가했다.  이재명 후보는 사건이 국가 폭력인 것처럼 오도하고 있다.


이 논쟁의 핵심은 대한민국 체제로 통일할 것 이냐? 북한 체제로 통일할 것이냐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왜냐하면 제주  4·3 사건을 기획하고 주동자인 좌익의 폭동을 정당화하면 한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북한 체제에 동조하는 것이고, 반대로 좌익 폭도들이 일으킨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희생자의 보상 등에 방점을 두면 대한민국 체재를 수호하는 일이다.


지금 제주 4·3 사건을 둘러싸고 대한민국 세력과 대한민국 체제를 무너트리려는 반체제 세력 간에 마지막 치열한 역사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따라서 제주 4·3 사건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국민들이 정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 왜 제주도인가?


제주 4·3 사건은 지금까지도 사건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란이 심하다. 해방 이후부터 6·25 전쟁 이전까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하필이면 왜 제주에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을까?


제주지역은 해방 이후 좌익 성향이 특히 강했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미군정은 제주도에 늦게 들어온 데다 좌익세력이 강해 조선인민공화국이 만든 인민위원회를 폐지하지 못했는데,주요 행사 때 경찰서장과 인민위원장이 함께 단상에 올라가 축사를 하곤 했다.


오랜 좌익 행정조직의 영향 등으로 좌익사상이 제주도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4·3 증언자료집 인 '이제야 말 햄 수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해방 당시에는 옳은 일이라는 생각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건준(건국준비위원회)이나 인민위원회에 들어갔소. 우리는 이것을 정식 우리 정부 라 생각했고, 합법 정부라고 생각했지.”


제주도민들은 이러한 속에서 자연스럽게 좌경화되었고, 그 비율이 전 주민의 80%에 이르렀다는 주장도 있다. 특히 좌익사 상에 투철한 좌익 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조천중학교 등 제주도 내 학교 교사들은 공산주의 이론·자본론 등을 공공연히 가르 치며 좌익사상을 확산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좌익폭동을 주도하는 역할도 했다.

 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로당 군사부 총사령관 김달삼(제주 대장정 사회과 교사) 등 지도부의 상당수도 교사 출신이었다.


● 제주 4·3 사건의 성격과 발생 배경


첫째,제주 4·3 사건은 1948년 5·10 총선(최초, 제헌 국회의원 선출, 200명)을 방해하기 위한 목적의 사건이다. 좌익세력은 제주 4·3 사건의 기원을 1947년 3·1절 행사 때 발생한 경찰의 발포사건이라고 하나,억지 논리다.


이는 제주 4·3 사건을 경찰의 탄압에 맞선 민중의 저항운동으로 만들려는 고의적인 짜 맞추기다. 제주 4·3 사건의 핵심은 5·10 총선거 반대, 단독정부 구성 반대로서 이다. 제주 4·3 사건은 단독정부 반대를 위한 1948년 일어난 2.7 사건의 연장 선상에서 일어났다.  


2.7 사건은 단독선거 논란이 일자, 박헌영의 남로당은 남한 단독선 거의 책임을 이승만과 미군정에게 돌리면서 전국에 산재한 좌익들에게 단독정부 반대를 위한 폭력투쟁을 전개토록 지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어난 것이 1948년 2·7 사건인데 경기·인천 일대를 비롯하여 경남북 일대,전남북·제주도 에 이르기까지 거의 전국적인 규모의 폭동과 파업이 발생했다


둘째,남로당이 주도해 일으킨 좌익폭동사건에서 출발한 것이다. 딩시 주한미군 사령부의 보고서(1948.6)는 “경찰이 1.22 남로당(제주)조천 지부 불법 회의장을 급습하여 노획한 문건에,공산주의자들은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키라’ 그리고 '경찰간부와 고위 공무원을 암살하고,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라고 기술하였다.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 씨가 1973년부터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남로당 중앙당의 폭 동지령에 의해 4·3 사건이 발생했다”라고 증언하여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제주도 남로당 총책임자 김달삼은 4·3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빨치산 부대인 야산대(500여 명)를 구성하여 국방경비대에 침투 한 남로당원들이 빼낸 무기와 탄약,일본군이 긴급히 철수하면서 한라산에 매몰해 놓은 무기와 탄약으로 무장하여 게릴라 훈련까지 실시하였다.


● 제주 4·3 사건의 발생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과 제주지역의 89개 '오름’ (기생화산)에서 일제히 봉화(횃불)가 오르는 것을 신호로, 1,500여 명의 좌익세력으로 구성된 빨치산(무장대, 공비)이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제주도 내 총 15개 경찰지서 중 14개 지서가 이들의 습격을 받아 불에 타거나 파괴되었으며,경찰관 13명이 살해되었다.


빨치산들은 경찰관 이외에도 서북청년단·대동청년단·독립 촉성 국민회 등 우익단체 인사들의 명단을 가지고 집을 찾아다니며 학살하기도 하였다. 4·3 사건 때 남로당이 요구한 내용은 “미제는 물러기라”,‘미 제국주의 타도”,‘단독선거 단독정부 결사반대”,“신탁통치 찬성”,“이승만 매국 도당 타도” 등이었다.


● 제주 4·3 사건으로 2군데 선거구 무효


제주 4·3 사건은 남로당이 5·10 선거 방해를 위해 일으킨 것이었다. 그래서 선거업무 담당자 테러,선거사무실 습격,선거서류 탈취 등이 빈번히 일어났다. 또한,남로당원들은 주민들이 투표소에 가지 못하게 방해했다.


이러한 남로당의 집요한 선거 방해 행위로 제주도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북제주군, 갑과 을)가 투표자 미달로 무효가 되었다. 제헌국회는 200명의 국회의원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198명으로 출범할 수밖에 없었 다. 제주도에 관한 한 남로당의 집요한 방해로 대한민국 건국이 부분적으로 무산된 셈이었다.


● 제주 4·3 사건 진압과정

제주 4.3 사건 바로잡기 대책회의는 2014. 4. 20일 오전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가졌다. /출처  뉴데일리

제주 국방경비대는 인원도 적은 데다 내부에 침투한 남로당원들이 작전계획을 빨치산에게 누설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다. 미군정에 이은 이승만 정부는 총선 직 후인 1948년 5월 15일부터 새로 군부대로 토벌대를 편성하여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나섰다. 토벌대는 수원· 대구·대전 등 지에서 급파된 군부대가 기존 제주도 군대를 흡수해 편성하는 방식이었다.


토벌대가 본격 적인 토벌작전에 나서자,제주도 남로당 총책임자인 김달삼은 남로당원으로 국방경비대에  침투해 있던 문상길 중위에게  지령을 내려 새로 부임한 유능한 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암살했다.(1948.6.18).


박진경 연대장 암살사건을 계기로 수사를 개시하여 범인이 문상길 중위임을 밝혀내고 남로당 프락치들을 일망타진하였다. 김달삼은 박진경 연대장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수사망이 좁혀오자,8월 초 남로당 주동자 5명과 함께 제주도를 빠져나가 월북했다. 월북 명분은 황해도 해주에 서 1948년 8월 말(8.21-8.26) 개최되는 인민 대표자대회 참석이었다.


주동자 일부는 체포를 피해 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하기도 했다. 그래서 당시 일본에 있는 친북 한인단체인 조련(1955년 조총련으로 확장)에는 제주도 출신이 유난히 많았다고 한다. 토벌대의 가장 큰 고민은 빨치산과 주민을 어떻게 분리시킬 것 인가의 문제였다.


왜냐하면,빨치산들이 한라산 중산간에 사는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투쟁했기 때문이다. 토벌대는 시행착오 끝에 토벌작전과 함께 귀순하도록 설득하는 선무(선전·위무) 활동도 병행하고,귀순하는 자들에게는 구호물자 배급,귀향 허용 등 시혜를 베풀었다.


이 작전이 효과를 거두어 1949년 5월 에는 빨치산들이 재기 불능 상태까지 갔다. 그러나 6·25 전쟁 이 일어나 토벌에 고삐를 늦추자 다시 준동하였다. 완전히 소탕된 것은 6·25 전쟁이 끝난 뒤인 1953년 5월이었다. 1954년 9월 한라산이 전면 개방되었다. 4·3 사건은 수년 동안 1만 명 이상의 많은 인명 피해를 낸 뒤 종결되었다.


● 폭동이 장기화된 이유와 민간인 피해가 많았던 이유

제주 4·3 평화공원 / visitjeju.net 홈페이지 캡처

빨치산들이 장기전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한라산 중산간 지역에 있는 마을 주민들이 그들의 배후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빨치 산들은 상당수가 산촌 주민들과 친인척이어서,군·경찰의 토벌작전에 비협조적인 경우가 많았다.『해방전후사의 인식』에 기록된 제주 4·3 사건 당시 남로당 선전부원이 되어 빨치산 활 동을 한 한 학생의 증언을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산에 가니까,나는 선전부에 배치를 받았지. 등사기로 전단도 만들고 … 하루는 밤에 선전활동을 하러 북촌으로 갔지. 마이크로 골목골목을 다니면서 ‘아버지 어머니 안녕하십니까? 우 리는 여러분의 자위대 자식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을 도와주십시오’라는 등의 선전을 하고 다니는 거였지. 그리고 나면 그 동네는 난리가 나지. 우리들을 잡아들이지 않았다고 경찰이 난리를 피지. … 어떻게 신고를 하겠어 모두 자기들의 아들, 딸 인걸. 그때야 경찰이 잡으러 오면,‘어느 집에 가서 숨어라’ 하고 오히려 숨겨주었지....”


토벌대 입장에서 보면,산촌 주민들이 빨치산 혐의자나 협조자로 생각할 여지가 많았다. 주민들 입장에서 보면,빨치산의 선동에 의해 자발적으로 지원한 경우도 있었지만,빨치산들과의 지연' 혈연적 관계로 불가피하게 지원한 경우가 많았고, 협박·처단에 대한 두려움으로 지원하기도 했다.


제주 23개 마을 중 토벌대로부터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북촌 리의 집단처형도 북촌리를 지나가던 군인들이 빨치산의 기습을 받아 2명이 사살당하자, 살아남은 군인들이 보복적 차원에서 가한 것이었다. 바탕에 깔린 것은 마을 사람들이 빨치산을 지원하는데 대한 강한 불신이 있었다. 북촌리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까닭이라는 것은 산사람(빨치산)을 마을에서 옹호한다고 해서 그랬지. 뭐 다른 일은 없어”라고 언급한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1954년 2월 한라산 정상부에 고립된 잔존 유격대원 수는 5명이 되었다. 이 들 5명은 은신을 깊이 하여 경찰에 발각되지 않다가 1956년 4월부터 경찰에 발각되어 사살되거나 생포되었으며, 마지막 남은 1명의 유격대 원은 1957년 4월 토굴에 은신하고 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건국을 저지하고,건국된 대한민국을 허물기 위해 제주도 좌익, 공산세력이 전개했던 4·3 폭동 후 반란으로 이어진 사건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참조한 책 / 필자 촬영

※ 제주 4·3 사건은 이희천 지음 '반대세 / 반 대한민국 세력의 비밀이 드러나다'와 양동안 지음의 '대한민국 건국 전후사 바로 알기'를 참고하였다.


나가며


제주 4·3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선열과 무고한 희생자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 글은 '① 좌익 '용어 프레임'을 깨야 제대로 보인다. / 보수와 진보가 아니다. 좌파가 아니라 좌익이다.'에 이은 두 번째 글이다. ①회 글에서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보수와 자유주의, 아니면 좌익과 우익으로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좌익이 아니면 진보가 아니라 중도라고 구분해야 한다고 하였다.  3월 9일 대선 전까지 좌익 등의 지난 행태와 검은 의도를 독자와 함께 제대로 알고 정권교체, 정치교체, 대한민국 체재 수호를 위한 투표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다.


https://brunch.co.kr/@cosmobig/294


다음 ③회부터 좌익과 우익, 그리고 좌익들의 용어 프레임에 다룬다. 그리고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와는 다른 자유민주주의 안에 있는 유럽식 사회주의 이른바 '사민주의' 등에 대해서 연속하여 다룰 예정이다.

 


칼럼니스트 박대석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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