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 속을 사는 개인들에게
진리의 추구는 철학이 시작되고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시작됐다. 고대 아테네에서 활동했던 소피스트들은 진리의 회의주의, 진리의 상대주의를 주창했다. 절대적인 진리는 없고, 진리는 모두에게 상대적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실 진리나 생각 자체가 어떤 가보다는 타인에게 논파, 혹은 설득을 해냈는지가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사람들은 소피스트라는 그 시대의 선생님들에게 토론과 웅변을 배웠다. 그런 소피스트의 생각에 소크라테스는 반대했고, 결국 죽고 만다. 그리고 플라톤은 마침내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에는 오랫동안 절대적인 진리의 시대였다. 그 대상은 고대, 중세 신의 시대, 이성의 시대를 거치는 중에 진리가 무엇인지 그 대상 자체는 계속 변해왔지만 항상 "모두가 따라야 할 절대적으로 옳은 무언가"가 있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만 하는 올바른 목표가 시대 속에 주어진 세계였다. 그것을 잘 지키며 산다면 바람직한 삶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세계대전이 두 차례 일어나고 인간의 존재를 너무 도구적으로 보는 시대에 대한 경각심 때문인지 감정의 중요성을 느낀 건지 그제야 인간은 의무를 벗어날 수 있었다. 한 명 한 명의 인간 자체를 중요시 여기고 존중하는 실존주의 시대에서 인간은 주어진 진리와 의무로부터 벗어났다. 만인 존중과 인권사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의 패러다임을 이루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어쨌든 의무적인 진리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제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없다. 이 세계에선 저 사람의 의견이 나와 맞지 않아도, 저 사람이나 내가 틀렸다기보다는 그저 그와 나의 관점이 "다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상은 고대 소피스트의 사상과는 어떻게 다를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존중이다. 소피스트들의 세계에서 사상이란 정당화, 타인 보다의 우위, 설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상의 내용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떻게 설득하느냐, 얼마나 더 잘 설득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이 우월한 것으로 인정됐다. 하지만 현대 만인 존중 사상에서는 내 것이 상대방의 것보다 더 설득력 있고 우월한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우리는 사상을 비교하여 우위를 정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이 안내견과 함께 차를 탈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률을 심의한다고 생각해보자. 당연히 시각장애인은 정상인에 비해 훨씬 소수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각 장애인들도 차를 탈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정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잖아, 개가 차에 올라타면 무섭기도 하고 털도 날리고 정상인들이 겪는 피해가 훨씬 더 큰데 시각장애인들이 불편하더라도 참아야지"라는 생각과 "우리 시각 장애인들도 가끔 밖에 나가도 보고 싶다고요, 그런데 안내견도 없고 차도 없이는 제대로 다닐 수가 없어요, 저희는 안내견이 필요해요!"라는 생각이 있다고 하자. 아, 추가적으로 정상인들에게는 첫 번째가,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두 번째가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고 생각하고 보자. 그렇게 되면 소피스트들의 세계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설득적인 첫 번째 의견에 따라 그것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져 시각장애인들의 생각이 무시되기가 쉽다. 하지만 만인 존중의 시대에서는 두 생각 다 맞는 말이다. "나는 첫 번째가 더 맞는다고 느낄 뿐이고 저 사람에게는 두 번째가 더 맞는다고 느낄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 그 두 생각에 옳고 그른 건 없다. 때문에 저렇게 소수를 위한 법도 충분히 허용될 수 있고, 실제로도 조금씩 그렇게 되고 있다.
이런 존중 사상으로부터, "관점의 시대"가 열린다. 모든 사람은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살아가며 어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관점과 차이만을 비교할 수 있을 뿐 그 가치를 비교할 수는 없다. 물론 어떠한 관점을 취한 것으로써는 다른 관점에 대해서도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 그 말은 쉽게 말해서 "나는 A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내가 보기에 B라는 관점은 이상해"라는 건 허용된다. 하지만 그냥 "B는 잘못됐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플라톤 시대에 "B는 잘못됐어!"가 가능했던 이유는 플라톤의 철학이 진리였기 때문에, 그게 근거해 비판을 한 것은 당연히 올바른 진술이었다. 어쨌든 이 시대에는 그런 건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 이유는 모든 가치 판단은 관점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어떤 관점들에 대해 가치적인 우위를 매길 때, 어떠한 것에 얼마큼 가치를 부여하느냐 자체가 이미 하나의 관점이다. 그래서 관점을 통하지 않은 비판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관점을 통한 비판은 "그건 너의 관점으로 봤을 때 그럴 뿐이고 이러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B는 하나도 틀릴 게 없어."라고 한다면 그만이다. 결국 어떤 사상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관점의 시대에서는 어떠한 사상도 어떤 것보다 우월하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것도 정답이나 진리란 건 없다. 물론 그 관점 자체에 내부적으로 논리적 모순이 있지 않는 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라도 관점이나 사상에 대한 평가는 이루어진다, 다수의 관점을 통해. 현시대의 진리는 실질적으로는 소피스트들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다수의 의견이 옳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관점을 설득하는 것을 중요시 여긴다. 어쨌든 이러한 다수의 관점조차도 소수의 것보다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마찬가지다. 심지어 소수의 관점이 설득을 통해 다수가 되는 것도 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그래도 모든 관점이 바른 건 아니잖아, '아무나 사람을 죽이고 다녀도 된다' 같은 생각들은 틀린 게 맞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왜 아무나 사람들 죽이고 다니면 안 되는지를 관점을 통한 가치판단 없이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저게 안 되는 이유는 사람에 대해 커다란 가치를 매기는 관점을 취하고 있어야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당연하다고 우리는 배워왔다. 그리고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은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동의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이코패스라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특히 저런 생각에 동의할 근거를 대는 것은 더 어려울 것이다.
혹자는 사실 플라톤 시대에 특정한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냥 "B는 틀렸어!"라고 말한 게 허용된 것은 그저 그 시대 사람들이 모두 플라톤의 관점을 취해서일 뿐, 현재와 다르지 않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플라톤의 생각을 "관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고도 올바른 "진리"였다. 하지만 현재 시대의 사람이 플라톤의 철학을 믿고 따른다고 해도 그는 그것이 보편적이고 당연한 "진리"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관점"이라는 것, 아무도 올바름을 보장하지 않고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어떠한 사상에 대해서도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 우위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진정으로 더 옳은 지도 판단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무엇을 따라가며 살까? 크게 3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종교를 자신의 관점으로 선택하며 절대적 가치(물론 스스로에게)를 따라가며 사는 삶이다. 사실은 꼭 종교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플라톤의 관점을 자신의 사상으로 삼는다고 해도 절대적 가치를 따르며 살 수 있을 것이다. 둘째는 실존주의적이고 자기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중요시하며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사는 삶이다. 이 시대의 패러다임이 그렇다.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생각은 개인에게는 굉장히 유혹적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것 같다. 세 번째는 굳이 그런 거 생각 안 하고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돼도 보통은 두 번째처럼 된다. 그건 시대적 패러다임의 영향력 때문이다. 어떤 삶을 택하든 궁극적으로 자신이 따르고 있는 것이 옳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현시대의 개인들에게는 두려운 일인 것 같다. 나는, 나의 관점으로는 이 시대의 사람들이 너무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만, 그리고 조금은 이런 두려움을 가지고 잘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