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삶과 세계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별의 May 25. 2019

운명을 찾아서

데미안을 읽고



    통학길 독서 3번째 책은 데미안이다. 첫 번째 책을 읽는데 3일이 걸렸던 것에 비해, 두 번째 책이 좀 두꺼워서 3주가 거의 끝나가는데 이제야 3번째 책을 다 읽었다. 방금 보니 내가 읽었던 번역본은 많이 팔리는 출판사의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읽었던 것과 조금 다르게 번역된 글을 읽었을 수도 있다. 세 번째 책은 일부러 고전으로 골랐다. 두 번째 책이 가볍에 재미로 읽을 수 있는 추리소설이었는데 읽고 오래 생각해볼 만한 게 없어서 세 번째는 생각해볼 게 많을 고전 중에서 골라보자 하고 데미안을 선택했다. 사실 읽기 전엔 소설이라는 것만 빼고 아무 내용도 몰랐는데, 친숙한 이름 때문에 선택했다. 초반부를 읽고 있을 때 친구에게 니체의 사상과 관련된 책이라는 얘기를 들었고, 그 뒤에 읽으니 확실히 그랬다. 특히 나중에 직접적으로 니체적 내용이 드러난다. 어쨌든 인상적인 내용과 사상인 것 같다. 하지만 책을 기껏해야 20%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무래도 이번에 읽을 때는 내용 위주로 읽게 됬는데 다음 번에 읽을  때는 싱클레어의 빛과 어둠의 세계, 운명, 아브락사스 같은 책의 핵심적인 부분을 처음부터 주의 깊게 읽어보고 싶다.




    이야기는 주인공 싱크레어가 점점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으로 데미안은 니체의 사상을 많이 담고 있는 것 같다. 데미안의 성장도 크게 니체가 말한 낙타, 사자, 아이의 단계를 거치며 변화한다. 아주 어린시절, 다른 가족들이 살고 있는 빛의 세계에 속했을 때의 싱클레어는 감성적이고 신앙심도 가지고 있는 낙타같은 상태이다. 싱클레어는 이런 기독교적 도덕을 올바르며 자신이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하고 따르려고 노력한다. 사실 싱클레어가 그 밝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것이 행복하고 낭만적인 편안함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어린 싱클레어에게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그냥 편안함의 문제야. 편안한 것에 푹 빠져서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결정권을 잃은 사람이 바로 남이 금지해 놓은 대로 따르는 거야. 그런 사람은 쉽게 살아.


이 책의 초반부는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이 많이 드러난다. 위 인용도 데미안이 기독교적 가치와 규율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물론 종교를 따르는 것도 단순히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믿음의 과정에서 의심들이 떠오르기도 하고, 지켜야할 사항을 실수로 어기고 죄책감에 괴로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갈등은 일시적인 갈등이다. 어쨌든 진심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다면 용서를 해준다. 그래서 더욱 강한 믿음을 가지며 더욱 잘 규칙을 지켜내면 그 갈등은 해소될 수 있다. 하지만 데미안이 말한 편안함은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판단할 필요 없이 그저 나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규율을 따르기만 한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나의 행동을 어떻게 해야할 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싱클레어의 경우 가족으로부터 배운 것들이 가장 비현실적이고 자신을 억압한다고 느낀 건 성적 충동이었다. 혼인 전 교도들의 성적 충동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기독교적 규율에 따라 싱클레어는 자연스러운 성적 충동을 금지된 추악한 것으로 여기며 배척하고 거부해야했다. 어른들도 모두 싱클레어가 그런 충동이 생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싱클레어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게 돕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려는 노력을 도왔을 뿐이다. 어른들과 싱클레어의 이런 노력은 정말로 이런 것들이 사악한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사악하다고 믿도록 강요하고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는 행위다. 그래서 이들이 편안함에 빠져있다는 뜻이다. 


아, 이제야 나는 안다.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길로 나아가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더 하기 싫은 일이 없다는 것을.


하지만 그러한 도덕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며 자신의 답을 찾고자 하는 사람은 더 어렵게 산다. 위의 생각은 싱클레어가 크로머에 의해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을 때, 데미안 덕분에 그곳을 벗어난 후에 한 말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 덕분에 그 세계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데미안의, 자기 자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었다. 밝음의 세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것은 쉽지 않다. 자신의 길을 걷는 이들에게는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누가 정해주거나 따라야할 것도, 따를 것도 없다. 자신의 내면 속에서 수없이 갈등하면서 자신의 길, 운명을 찾아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실타래를 따라가며 이윽고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 각자가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의무와 운명이었다.


    자기 자신을, 운명을 찾아내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싱클레어가 견진성사를 끝낸 뒤, 기존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고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원래 다른 가족들처럼 밝음의 세계에서 순응하며 살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그 밖으로 빠져나왔다. 하지만 밝음의 세계에서 이제 막 빠져 나온 싱클레어는 방황하며 혼돈 속에서 괴로워 한다. 그래서 다시 밝음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은 모습도 몇 번이나 보인다. 그렇게 하루하루 무의미하게 살아가다가 베아트리체를 만난다. 싱클레어는 그녀를 길거리에서 몇 번 마주첬을 뿐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다. 베아트리체라는 이름도 그저 자신이 붙였을 뿐이다. 하지만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싱클레어는 다시 교회도 나가고, 열심히 살아보려 한다, 무너져 내린 인생의 폐허 위에 밝음의 세계를 다시 짓기 위해서. 싱클레어는 성인을 목표로 했다. 그런데 베아트리체의 그림을 그려보다가 그 그림 속에서 데미안과 자기자신의 운명을 발견해낸다. 비록 싱클레어의 혼자만의 짝사랑이었지만 베아트리체 덕분에 그는 운명의 방향을 찾아낼 수 있었다.

    후반부로가면 추상적이던 사상이 하나의 신앙적 형태로 나타난다. 구도자로서 피스토리우스를 만나고, 아브락사스라는 신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솔직히 말해서 이 신과 관려되서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기독교적 신에 대해 세상의 반 뿐인 밝음에 대해서만 표현하는 반쪽 짜리 신으로 평가하며 아브락사스는 그게 아니라 이 세상의 밝음과 어둠을 모두 포함하는 총체적인 신, 신적이며 또한 악마적인 존재라고 서술했다. 밝음의 의무적인 세계를 강요하는 게 아니라 모든 세계의 신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따를 수 있도록 하는 걸까. 어쨋든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를 통해서 아브락사스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다.

    데미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만나고부턴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들의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카인의 표식은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 했던 이야기다. 데미안이 싱클레어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던 카인의 표식을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이야기게 끝나갈 때쯤,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들의 힘과 능력, 세계 속에서의 운명적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들은 전쟁이 일어나길 원치 않았다. 사실은 데미안과 싱클레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원하지 않으면서도, 전쟁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면서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기면서 받아들였는데 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자신에게로의 길, 스스로의 운명을 따라가겠다면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주장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의 추측으로는 이들은 전쟁이 벌어지고 자신들의 운명은 전쟁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의 저자인 헤르만 헤세는 1,2차 세계대전 모두 반대했다고 한다.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바로 사랑은 증오보다, 이해는 분노보다, 평화는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것뿐이다.



혹시 이런 생각으로 그들은 그런 선택을 한 건가 생각해보지만 여전히 완전히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후반부에 카인의 표식을 가진 자들만이 특별한 사람인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러면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 없는 걸까? 그런데 그 카인의 표식이라는 것은 정말 어떤 타고난 표식이라기 보다는 싱클레어가 데미안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볼 때, 단순히 빛의 세계속에서 그것만을 보며 사는 게 아니라 빛과 어둠이라는 세계를 세계로서 인식한 게 카인의 표식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싱클레어의 가족들에게 이 세계 전체는 빛의 세계, 유일한 세계, 이 세계 전부이다. 하지만 싱클레어는 빛의 세계도 그저 이 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을 최소한의 조건, 그걸 카인의 표식으로 표현한 것 같다.


    데미안은 세계에 던져진 하나의 존재가 인간이 되어가는 이야기다. 책의 뒷 표지에 '우리는 모두 데미안이라는 일기장을 가진 적이 있다'라고 써 있다. 데미안을 읽으면서 나도 나의 삶의 흐름을 떠올려봤다. 우리 집은 기독교를 믿는 집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집에서나 착한 행동, 해야하는 것, 지켜야하는 것들에 대해서 듣고 자랄 것이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 대부분 이해가 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가끔씩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궁금한 걸 물어봤는데 말대꾸를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말대꾸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게 왜 하면 안되는지를 물었지만 "그게 말대꾸야"라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아, 그러면 안되는 구나'라고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한 적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행동은 어른들의 말을 따랐다. 나는 대부분 말을 잘 듣는 아이였었다. 뭐, 물론 한 편으로는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적어도 들은 항상 말을 지키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내가 나의 삶으로 운명을 찾아 나선 건 얼마 되지 않는 듯 하다. 고등학교 때, 의지를 발휘하면서부터 나는 나와 세계를 보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나 또한 싱클레어처럼 아무것도, 어떻게 해야할 지 알지 못했다.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내가 스스로 생각해낼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며 최선을 다하자고 생각하며 살았다. 오래 전, 나에게도 베아트리체가 있었는데 그때, 나의 삶도 싱클레어처럼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제는 나의 세계를 찾아서, 나의 운명일지도 모를 끄트머리를 잡고 천천히 걷고 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몸부림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관점의 탄생과 진리의 종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