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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의 Nov 07. 2018

자유의 날개엔 깃털이 있을까

  당신은 자유로운가? 이 질문을 처음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매일매일 가기 싫어도 학교나 직장에 나가야 하는 자신의 처지? 동물원에 갇혀있는 동물들?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자유를 빼앗긴 채 누군가의 재산으로 살아가던 노예들? 아마 첫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기본적으로, 형식적으로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하고 싶은 게 있음에도 못하는 게 더 많으니 그다지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아요"와 비슷할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런 자유가 아니다. 점심 메뉴로 짜장면과 짬뽕을 택할 수 있는데 당신은 오늘의 기분에 따라 짜장면을 선택했다면 그 선택은 자유로운가? 와 같은 것이다. 짜장면과 짬뽕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하다니 당연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꽤나 영리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 선택의 자유의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것은 자유의지라는 개념과 매우 닮은 측면이 있다. 하지만 정확히 같다고는 못하겠다. 

  자유의지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강도가 총을 겨누며 돈을 주지 않으면 쏘겠다고 말한다. 이때 나는 돈을 주고 싶지 않지만 돈을 준다. 이런 경우가 일반적으로 자유의지가 없는 경우라고 불린다. 길가다가 거지를 만났다. 나는 나 스스로의 판단으로 기꺼이 나의 돈을 나눠주었다. 이런 경우가 자유의지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자유의지의 따른 자유로운 행위라고 불린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강도에게) 나는 돈을 주고 싶지 않지만 돈을 주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돈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목숨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두 개의 선택지 중에서 내가 더 원하는 행위를 어찌 보면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다. 결국 나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임은 다르지 않다. 이 두 가지 경우에서 차이는 강도의 경우에는 한 가지 선택지가 일반적으로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 중 하나라는 점 정도이다. 그러나 그 사실이 제한된 선택지 중에 더 원하는 것을 택한 경우라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는 강도에게 돈을 다 주고서라도 살고 싶었다. 그런데 강도는 나를 그냥 쏴버렸다. 혹은 나는 점심에 짜장면을 먹고 싶었다. 그런데 친구가 맘대로 짬뽕을 주문해버렸다. 이렇게 선택에 대한 나의 판단 혹은 의사가 있을 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는 분명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이렇게 명백하게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앞의 경우처럼 "자유로운 선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판단에 있어서, 위와 같이 나 자신이 판단한 선택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여 얻어내면 그것을 자유로운 행위라고 생각한다. 내가 첫째로 묻고 싶은 것은 이러한 "판단"이 정말 자유로운 것인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판단을 할까? 


"오늘은 왠지 매운 게 먹고 싶네, 나는 짬뽕"  
"아 돈이 없는데 짜장면이 천 원 더 싸네 짜장면 먹어야지." 

"나는 아무거나 상관없는데 동전 던져서 결정할래" 

"야 내 것도 좀 골라줘." 


아마 이 사람들의 판단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에서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주로 이용한 판단을 했다. 우리가 굉장히 자주 사용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고 싶은 거, 끌리는 걸 택하는 판단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훨씬 위에서 언급했던 강도 사건에서 결국은 "더 원하는 행위"를 택했다는 부분의 더 원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강도 사건의 경우에는 감정적으로 끌린 것 만이라기보다는 이성과, 감정(본능적 두려움) 등을 복합적으로 모두 고려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택했다는 의미이다. 더 원하는 행위는 꼭 감정적으로 그게 더 끌리지 않아도 이성적인 측면을 고려하면 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네가 저 사람을 쏘면 천만 원을 줄게." 나는 감정적으로 쏘기 싫다. 하지만 천만 원은 좋다. 그래서 쏜다면 감정적으로 끌리지 않아도 더 원하는 행위를 택했다는 의미이다. 물론 이성이란 감정과 따로 똑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는 이해할 것이다.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우리는 이렇게 감정적인 판단을 즐겨 사용한다. 이번엔 두 번째 사람을 보자. 이 사람은 자신에게 짜장면이 주는 감정보다는 돈을 중심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물론 돈을 위한 것이 감정을 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돈은 어쨌든 미래의 다른 무언가로부터의 만족을 위함이지 지금 당장의 감정을 고려한 선택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성적인 판단은 우리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더 원하는" 게 있을 때의 보편적인 선택과정이다. 아마 둘 중에 더 원하는 것이 있다면 저 방법대로 판단할 것이고, 나머지 두 가지는 딱히 그런 게 없는 경우다. 세 번째 사람은 얼핏 보기엔 선택을 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이 사람은 선택을 했다. 짜장면과 짬뽕이 있다고 우리의 선택지가 짜장면, 짬뽕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먹기 싫어서 굶을 수도 있고, 배고파서 둘 다 먹을 수도 있고, 친구들을 강제로 붙잡고 빠져나와 다른 식당을 찾을 수도 있다. 세 번째 사람은 "코인 토스로 나온 걸 먹는다"를 택했을 뿐이다. 네 번째 사람은 친구에게 조언을 구해서 결정하는 것을 택한 것이다. 사실 나는 아까 앞의 두 가지 경우가 "더 원하는 것"을 택한 경우라고 했지만 본질적으로 뒤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뒤의 두 사람 또한 자신에게 떠오른 선택지 중에 "가장 원하는 것"을 택한 것이기에. 

  내가 의문이 드는 것은 이것들이 자유로운 선택인가이다. 자 감정적으로 끌린 걸 고른 건 자유로운 선택인가? 내가 하고 싶은 거 골랐는데 당연히 자유로운 거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른다. 근데 왜 내가 짬뽕이 끌렸는지 아는가? 당신은 의식하지 못했겠지만 식당을 찾는 동안 스치듯이 봤던 매운 떡볶이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고 매운 음식을 택했던 건 아닌가? 어렸을 때, 며칠 동안 아팠다가 먹었던 맛있는 짬뽕의 기억이 나도 모르게 영향을 줬던 건 아닌가? 고작 그런 게 나의 선택에 이렇게나 내가 알아채지 못하게 영향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당신의 선택을 결정해버리기에 충분히 강력한 요소들이다. 혹은 나는 원래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 나는 천성적으로 매운 걸 좋아해.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있다. 자신의 타고난 경향에 의한 것이라면 물론 방금과 같은 경험의 영향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당신의 경향과 천성은 당신의 선택의 결과인가? 당신은 매운 걸 좋아하게 태어나고 싶어서 선택해 태어났나? 결국 경향과 천성에 의한 감정적 끌림은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성적 선택은 어떨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따르면 인간만의 능력인 이성을 이용한 선택은 자유로운 선택일까? 이성적 판단이 자신의 자유라는 것은 얼핏 보기에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뭐 어떻게 생겼을지도 모르는 기분에 의한 것도 아니고 내가 이성을 활용하여 논리적으로 판단했는데 당연히 자유로운 판단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자. 아까 감정은 이성과 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 위의 사람은 가격을 이성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런데 "나는 짜장면을 먹었을 때의 만족감이 짬뽕보다 클 것 같아."라고 말하며 짜장면을 택하는 사람을 이성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혹은 "짜장면이 싸기는 하지만 짜장 소스 관리하는 곳을 보니 좀 꺼림칙해. 나는 짬뽕 먹을래."라고 말하는 사람은 어떨까? 이성적 판단에는 기준이 있다. 무엇을 이성적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가는 자신의 모든 행위에 대해서 일관적인가? 아마 모든 사람이 그렇지 못할 것이다. 결국에는 이성적 판단 또한 내가 선택하지 못하는 커다란,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되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는데, 자신이 이성적으로 판단할지 감정적으로 판단할지는 자신이 선택했나? 아마 이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성적으로 분석하여 판단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왜? 자신은 여러 가지 방법 중에 이성적인 분석방법을 쓰고 있을까. 타고난 천성이 논리적이라서?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사고를 많이 경험하고 학습해서? 천성이나 경험이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위에서 이미 언급했다. 결국 이성에 따른 판단 또한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것 같다. 

  뒤의 남은 두 가지는 다를까? 마찬가지이다. 애초에 동전을 던지는 방법이 짜장면을 먹을 때, 나의 선택지 속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도 나는 선택한 적이 없다. 그리고 그 많은 선택지 중에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에 나의 어떠한 의지가 있었을까? 지금까지 이 글을 읽으면서 "당연히 살면서 선택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면 나의 의견이 올바르게 전달되지 못한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과연 정말 우리가, 내가 선택했다는 게 있기는 할까?" 이니까.



  이런 게 다 뭐가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실 어떤 의미로 생각하면 이런 건 아무 의미도 없고 쓸모도 없는 논의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이다. 이 질문의 답은 아래 질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천성을 똑같이 가지고 태어난 아이에게 당신이 지금까지 겪어온 것과 꼭 똑같은 경험을 주었을 때, 그 개체는 당신의 선택 상황에서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만약에 나라는 존재에게 자유란 것이 있다면, 그 어떤 무언가라도 내가 택하여 바꿀 수 있는 게 있다면 이 상황에서 저 개체는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천성과 경험이 어울려진 운, 혹은 운명일 뿐이고, 사실은 그게 꼭 "나"라는 존재가 아니라 나의 천성을 가지고 나 대신 태어났을 내 친구여 도 마찬가지라는 뜻일 테니까. 그러니까 이 문제가 중요한 이유는 사실 나는 무엇인가, 당신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라는 것을 그저 타고난 천성과 살아온 경험의 총체라고 한다면 그건 이 세상에 물리적으로 고유할 테니(모르겠다 신체의 모든 기관을 완전히 똑같이 복제할 수 있다면 다를지도), 위 질문의 대답이 부정이라도 문제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에 내가 삶에서 아무것도 선택할 수 있는 게 없다면 확실히 나와 인간의 특별함은 많이 많이 줄어들 것 같다. 이 문제의 심오함에 비해 나는 아직 너무 부족하기에, 지금 이 글은 나의 자유라는 주제에 대해서 마치 서문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삶과 세상을 더 많이 겪어보며 언젠가는 답을 찾아내고 싶다, 물론 이 바람이 진정한 나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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