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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의 Nov 03. 2018

양심과 사람

군대와 전쟁, 인간

  최근에 종교적인 이유로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이른바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최초로 대법원의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사실 2004년 첫 번째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등장 이후 계속해서 지방법원, 고등법원에서는 무죄판결이 가끔씩 나왔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 항상 3년 징역 유죄 판결이 내려졌었다. 그런데 이것이 뒤집힌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영향력은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듯하다. 입법이나 행정기관에서 제도화되거나 제대로 논의를 거치지 않고 사법부에서 판결을 내렸는데 그 판결로 인해 입법과 행정이 논의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법부가 입법부나 행정부보다 더 보수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꽤 이례적인 것 같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양립하고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이 무죄 판결이 의무를 피하는 것일이고 이번 판결은 틀렸다는 의견과 이번 판결이 드디어 인권을 잘 반영한 합리적인 판결이라는 의견이다. 나는 우선 이번 판결이 더욱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생각하는 쪽이다. 이번 판결에 대해 분노하는 이들이 사용하는 말 중에 "그러면 군대 간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군대 갔냐"라는 말이 있다. 사실 이 말은 볼 때마다 어이가 없고, 언어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사실 너무 당연해서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양심적인 이유로 군사훈련과 군대를 거부한 것을 인정했다는 사실이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들을 비양심적이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모든 사람이 같은 양심이나 신념을 가진 것이 아니다. 자신의 양심이나 신념에 군사훈련이라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면 상관이 없을 뿐이다. 하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랐을 때, 군사훈련이 비양심적인 행위인 사람들에게는 군사훈련이 비양심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양심을 따르고자 병역을 거부하며 (얼마 전까지는) 군대 대신 3년 징역을 살아왔다. 그러니 자신의 양심에 따랐을 때, 군사훈련이 비양심적인 행위지만 군대를 갔다 온 사람이라면 비양심적인 사람이라 군대를 갔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번 판결에 대해서 군대 간 사람들이 양심 없어서 군대 갔냐는 것은 부적절하다. 양심이 없어서 군대를 간 게 아니라 대부분은 양심과 딱히 상관이 없어서 국방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한 고마운 분들이니까. 그런데 사실 난 사람들이 군대를 가면서 약간은 양심에 찔렸으면 한다. 그 이유는 이 글을 끝까지 읽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군대 간 사람들은 양심이 없어서 군대 갔냐"같이 선동적인 표현 말고,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있다. 어쨌든 그런 인간의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법전에 국방의 의무 중 하나로 되어있는 병역의 의무를 지지 않으려는 것은 부당하는 의견이다. 

  이런 생각은 의무를 권리에 대한 절대 우위로서 치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천부 인권 시대다.(천부 인권사상의 정당성은 사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안이지만 이 주제는 당장 쉽게 이야기할 주제는 아니고, 대부분 동의할 것이므로 넘어가겠다.) 천부 인권사상에 따라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면 모두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닌다. 당연하게도 양심이란 것도 그중 하나에 포함된다. 스스로의 양심을 지키고 추구할 지유. 물론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무는 분명 중요한 요소이다. 정말로 긴급한 상황이라면 국가의 유지를 위해 국민으로서 이행해야 할 의무를 좀 더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사안은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우선은 지금 전쟁 상황이 아니다. 누군가는 여기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아직 휴전국이라고 말할 테지만 누가 전쟁 적국에 원조를 하고 관광을 하나? 사실상 종전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지금까지 발전해오면서 많은 나라들의 기술력은 너무 강해졌다. 그 얘기는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니라 나라의 기술력이 전쟁의 성패를 결정짓는 요소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군인이 그렇게 많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다. 결국 지금은 의무를 권리보다 강조해야 할 시기나 시대는 아니다. 만약에 진정 그런 시대라면 올림픽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혹은 대학원을 나온 고급인력이라고 해서 군대를 면제시켜줄 수도 없어야 맞다.


  한편으론 이렇게 특정 종교가 있는 사람에게만 병역거부제도가 있는 것은 평등하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 또한 생각이 같다. 하지만 나는 이번 판결이 종교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양심을 인정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권리와 양심에 대해 내린 첫 번째 올바르고 강력한 판결이며, 그러한 양심과 신념을 가장 보여주기 쉬운 종교인에 의해서 첫 번째로 판결이 내려진 것뿐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원하는 사람들만 군대에 가는 모병제를 찬성한다. 그 이유가 바로 종교인만 양심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체 병역제도가 등장하여 종교인들이 대체 복무를 하고, 그다음은 비종교인에서 대체 복무자가 나올 것이고, 원하는 이들만 군사훈련을 받고 나머지는 대체 복무를 하다가, 비로소 원하는 사람들만 군대에 가고 나머지는 원하는 일을 하는 모병제로 이어질 것이며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이 글의 진짜 주제인 양심과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그렇다면 그 양심이라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그 종교인들의 양심이라는 것이 정말 합당한 지에 대해서. 우리는 양심에 찔린다는 것이 어떤 표현인지 알고 있다. 내가 했던 혹은 하려고 하는 행위에 대해서 마음속에서 스스로 이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나 기분이 들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여호와의 증인은 기독교 계열 종교이지만 기독교에서는 사이비 종교라고 한다. 나는 그 종교 자체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이비 종교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고 따라서 무기를 들고 살인하는 훈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된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이라서가 아니라 나도 사람들 죽이고 싶지도 않고, 죽이는 기술을 배우고 싶지도 않다. 그럼에도 내가 군대에 가게 됐을 때 양심에 어긋나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그것이 훈련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실제 전쟁 상황에서 적을 쏠 수 있을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나의 양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적군에 대해서 생각할 때 애초에 그 군인은 아무 죄도 없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우리나라에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죄수들도 사형을 시키지 않는다. 근데 그 상대편의 적군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전쟁터에 끌려와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가, 또 죽어야, 그러니까 내가 죽여야 하는가? 우리나라 군인들이 지뢰를 밟는 끔찍한 사고를 당했을 때, 우리는 함께 슬퍼했다. 적국의 군인이라고 다른가? 그들도 우리도 죄 없는 인간일 뿐이다. 어쩌면 국가라는 거대 집단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당하는 존재들인데 내가 악질 죄수들한테도 쏘지 않는 총알을 박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사실 전쟁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악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와 전쟁을 했는데 십만 명이 죽었고, 적군 이백만 명을 무찔렀다. 무려 20배나 많은 적을 무찔렀다. 와우! 이 날은 파티가 열릴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국군이 십만 명 죽고, 적군이 이백만 명이나 죽었는데 말이다. 전쟁 속에서 우리는 득과 실을 본다, 사람이 아니라. 일단 군복을 입혀놓으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군인일 뿐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듯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누군가의 아들, 혹은 아버지, 가족, 친구... 이다.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이 십만 명, 아니 이백십만 명이 죽었는데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으며, 좋은 일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 이것이 전쟁이다. 가끔 누군가는 우리가 이길 것 같으니 차라리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나는 그들이 군인이 아니라 그 속의, 한 명의 사람을 봤으면 좋겠다. 

  좋든 싫든 이런 전쟁을 대비하고 준비하는 사람이 군인이다. 물론 우리는 나라를 지킨다고 표현하지만 많은 역사적인 상황을 보면 글쎄,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전쟁이 싫고 군대가 싫다는 데 의무니까 권리를 침해받더라도 가야 한다라... 나는 곧 그럴 필요가 없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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