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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Apr 14. 2020

단지 '실화 기반'이 아니라
역사 자체가 되는 영화

영화 '라라걸'(2019) 리뷰

Based on a true story


영화의 각본이 실제 이야기를 기반으로 각색된 것일 때, 대부분의 영화에서 'Based on a true story'라든가 'Inspired by true events' 같은 말이 서두에 쓰인다. 영화의 원작이 연극이나 소설 등 다른 매체일 경우에도 그건 마찬가지인데 이 '실화'라는 말에는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지금 당신이 보는 이 이야기는 픽션이 아니라 실제 일어났던 일을 기반으로 한다.' 


물론, 다큐멘터리라 할지라도 연출자와 작가의 의도가 더해지므로 온전히 사실 그대로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건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무리다. 앞에서 말한 문구들이 쓰인 영화에도 크레딧 말미를 잘 보면 일부 인물이나 에피소드, 장소 등은 가공되었다는 이야기가 반드시 붙어 있다. 실화 기반이라 할지라도 스토리텔링의 기본은 어떻게 하면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하므로 영화를 볼 때 'Based on'이나 'Inspired by' 같은 단서가 붙는 것이다. (살짝 본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여담: 굳이 따지자면 나는 이런 단서를 반드시 덧붙여야 한다고 생각지는 않는 편이다. 영화가 이야기를 떠먹여 주는 게 아니라 관객이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하며 받아들이는 태도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야기로 말하자면 이건 어떤 물건의 사용설명서에 '먹지 마세요' 같은 문구가 쓰이는 것과 같다고 할까.)


영화 '라라걸' 스틸컷

A True Story


지금 소개할 영화 <라라걸>(2019)은 내가 본 실화 바탕 영화 중에서는 이례적이게도, 'a true story'라는 심플한 자막이 쓰인다. '실화에 기반함'도 아니고 '실화임'이라니! 어떤 이야기는 그게 정말 픽션인가 싶을 만큼 넘치는 현실감으로 당혹감을 느끼게 될 때가 있는데, 이것도 그런 의도를 담은 텍스트일까! 하면서 며칠간 생각한 <라라걸>의 이야기를 되새긴다.


영화 '라라걸' 스틸컷


영화의 주인공 '미셸 페인'(테레사 팔머)에게는 형제자매만 아홉이 있다. 어머니는 '미셸'이 어릴 적 세상을 떠났고 말 농장을 가진 '페인' 가족 구성원의 대부분이 말을 돌보고 관리하는 일을 하거나 기수가 직업이다. 그러니까 '미셸'이 오늘의 직업이자 정체성을 갖게 된 건 가정환경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가족 구성원이 많아서인지 어쩔 수 없게도 주인공인 미셸 본인보다 (스티비를 비롯한) 가족들에 무게 중심이 일부 기울어 있다. 98분이라는 짧은 상영시간 내에 '미셸'의 이야기를 다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라라걸>의 이야기, '미셸 페인'의 이야기는 98분을 훨씬 뛰어넘어 긴 시간 늘어놓아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의 인생사를 갖고 있다. 수천 번의 대회에 나가 열여섯 번이나 골절상을 입고 일곱 번 낙마했던, 무엇보다 수없이 '여자는 힘이 부족해'라든가 '여자는 우승할 수 없어' 같은 말을 들어야만 했던, 그런 '미셸'의 이야기. 모두가 '여자다운' 것을 요구할 때 '미셸'은 그 누구의 정의('Like a girl')도 따르지 않고 스스로 정해놓은 길을 멈추지 않고 추구했으며 마침내 그 길에서 결승선을 만났다.


영화 '라라걸' 스틸컷


'멜버른컵 155년 역사상 첫 여성 우승자가 된 인물의 실화' 정도로 <라라걸>의 이야기를 축약하기엔 '미셸 페인'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대단한 역사다. 어디까지나 본격적인 메시지와 화두를 던지는 작가주의적 영화라기보다 상업 영화이자 대중 영화의 틀 안에서 흔하고 예상 가능한 이야기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중의적 제목이기도 한 'Ride Like a Girl'이 '여자답게' 같은 부정적 프레임이 아니라 '나답게'가 되는 순간을 테레사 팔머(주연)와 엘리스 맥크레디(각본)와 레이첼 그리피스(연출)는 생생히 '보여준'다.


영화 '라라걸' 스틸컷

스스로에게 배팅하고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주인공 '미셸'의 친오빠인 '스티비'가 본인 역을 맡은 것도 탁월하지만, 실제 미셸의 경기 장면 영상들을 알맞게 활용한 것도 돋보인다. 물론 제작비나 제작 환경 등 여러 여건을 고려한 선택이겠지만 영화 내내 '미셸 페인'과 '테레사 팔머'는 하나로 겹쳐 보인다. 영화 시작부분과 끝부분에서 거의 비슷한 두 개의 장면이 각각 반복되는 구성, Sia'의 'Alive'와 같은 대중적이면서도 가사의 내용에 신경 쓴 사운드트랙 선곡들, 이런 요소들과 맞물려 테레사 팔머의 연기 장면과 미셸 페인의 실제 경기 장면은 이물감 없이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미셸 페인이 2015년 멜버른 컵에서 우승할 당시 그에게 매겨진 배당률은 무려 100배였다고 한다. 이는 물론 '미셸'의 당시 경기력이나 진가가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이어서' 우승 확률이 그만큼 낮게 점쳐졌기 때문이다. 전신마비의 위기를 겪었던 '미셸'과 마찬가지로 그가 당시 탄 말인 '프린스 오브 펜잰스' 역시 중대한 부상을 겪었던 말이기에 그 확률은 낮게 평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셸'은 자신의 가치를 자신만이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음을 입증했고, 입증하고 있다.

('Based on'이 아니라 그 자체로) <라라걸>의 이야기는 진행형이다. 어떤 이들의 이야기는 그 존재만으로 타인에게 영향을 준다. 피부색이 어떻든 직업이 무엇이든 나이가 몇 살이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바로 네가 할 수 있다고, 네가 해낼 것이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기꺼이 배팅해야 한다. <라라걸>은 수많은 부정적인 말들 사이에서 '내가 진짜 해낼 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던 이들에게 전하는 영감과 응원의 이야기다. 이 영화가 전체 관람가인 것도 어쩌면 그래서일 것이다. "세상에게 이겼다"라고 말한 미셸 페인의 우승 소감이 여전히 맴돈다.



영화 '라라걸' 국내 메인 포스터

<라라걸>(Ride Like a Girl, 2019), 레이첼 그리피스 감독

2020년 4월 15일 (국내) 개봉, 98분, 전체 관람가.


출연: 테레사 팔머, 샘 닐, 스티비 페인, 소피아 포레스트, 아넬리세 앱스, 제네비에브 모리스 등.


수입/배급: 판씨네마(주)


영화 '라라걸' 스틸컷

*시사회 관람 (2020.04.09. CGV 용산아이파크몰)

*<라라걸> 예고편: (링크)



*프립소셜클럽 [영화가 깊어지는 시간](링크)

*매월 한 명의 영화인을 주제로 다루는 영화모임 '월간영화인': (링크)

*원데이 영화 글쓰기 수업 '오늘 시작하는 영화리뷰'(링크)

*원데이 클래스 '출간작가의 브런치 활용법'(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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