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이야기부터 하면 좋겠다. Misbehaviour. 본래 나쁜 행실이나 잘못된 행동, 실수, 비행 등을 뜻하는 단어가 이 영화의 제목이 된 이유. <미스비헤이비어>(2020)는 1970년 '미스 월드' 대회에 반대하는 일종의 시위를 감행한 '샐리 알렉산더'(키이라 나이틀리), '조 로빈슨'(제시 버클리), 그리고 처음으로 '미스 그레나다'가 된 '제니퍼 호스텐'(구구 바샤-로)을 주역으로 한 실화 기반의 영화다. 그러니까, 이 제목은 중의적으로 쓰인 말일 것이다. 여성의 행동 혹은 행실을 '규정'하고 억압한 것에 대해 반기를 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과 '미스(Miss) 월드'라는 대표적인 여성 상품화에 반기를 든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점. 결국 둘은 하나의 이야기다.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스틸컷
<미스비헤이비어>의 필립파 로소프 감독
<미스비헤이비어>를 연출한 필립파 로소프 감독은 영국 아카데미상을 3회(감독상 2회, 관객상 1회)나 수상한 베테랑 연출가다. 특히 성범죄의 피해자가 된 세 여성 청소년 이야기를 다룬 [쓰리 걸즈](2017), 1950년대 동부 런던을 배경으로 간호사와 수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콜 더 미드와이프](2012), 그리고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일대기를 그린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2017, 시즌2 5화와 6화를 연출) 등에 이르기까지 필립파 로소프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언제나 여성들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었으므로, <미스비헤이비어>는 감독이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이야기라 해도 되겠다. 그는 <미스비헤이비어>를 통해 성 상품화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대중적인 화법으로 던지면서도 "유쾌하게 춤을 추면서 환호성을 내지를 수 있는 축제 같은 영화로 기억되기를 바란다"라고 연출 의도를 설명하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한 결심
여기에 각각 "성 상품화가 만연해 있는 세상에 내 딸을 둘 수 없다"라고, "가부장제라는 시대의 장벽을 허물고 싶다"라고, "불평등에 맞설 때 이 영화의 이야기가 무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생각하며 출연을 결심한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시 버클리, 구구 바샤-로의 연기가 더해져 <미스비헤이비어>의 이야기는 여성 연출, 각본, 주연, 제작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F등급'이라는 용어를 2014년 바스 영화제가 벡델 테스트 등을 통해 영감을 받아 처음 고안했다고 한다.) 유쾌한 대중영화이면서 시대를 초월한 날카로운 메시지를 담은 <미스비헤이비어>는 그렇게 탄생했다.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스틸컷
"여성은 물건이 아니며, 장식품도 아닙니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해 있는 존재도 아닙니다." -샐리 알렉산더
<미스비헤이비어>는 대표적인 성 상품화와 성적 대상화의 상징처럼 비판받아온 '미인 대회'에 반기를 든 인물들의 이야기를 담으면서 동시에 반기의 주역이 아니었던 다른 여성들의 서사도 입체적으로 담아낸다. 가령 구구 바샤-로가 연기한 제니퍼 호스텐은 카리브해에 있는 영연방 군주국 '그레나다' 출신으로는 처음 '미스 월드'에 참가했고 그는 흑인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겠다는 포부와 방송언론인을 향한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대회 참가를 결심했다. 만약 미스 월드 대회에 반기를 든 사람들만을 주역으로 삼았다면 '제니퍼' 같은 여성들의 이야기는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미스비헤이비어>는 미스 월드 대회의 사회를 맡은 유명 코미디언 '밥 호프'(그렉 키니어)의 아내 '돌로레스 호프'(레슬리 맨빌), 미스 월드 대화를 창시한 '에릭 몰리'(리스 이판)의 아내 '줄리아 몰리'(킬리 호위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 '샐리 알렉산더'의 어머니인 '에블린 알렉산더'(필리스 로건) 등 연령과 배경은 다르지만 동시대 여성들의 서사를 대변하는 다양한 조연 캐릭터를 안배한다. 여성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목소리가 있을 수 있음을, 그리고 똑같이 성 상품화에 반대한다고 해도 사회 풍조를 변화시키기 위해 각기 다른 방법론을 취할 수 있음을 <미스비헤이비어>는 놓치지 않는다.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스틸컷
1970년대 실화인 <미스비헤이비어>가 2020년대에 유효한 이유
미인대회 하면 무엇을 떠올리겠는가. 수영복만 입은 여성들은 앞뒤와 좌우로 훑으며 그들의 신체 부위 사이즈를 전자 제품의 스펙처럼 계량화 하고, 그들의 몸을 '평가'하는 대회. 좋은 심사를 받기 위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여성 참가자들을 상품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놀랍게도 1970년 미스 월드 대회는 달 착륙이나 월드컵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미스 월드 대회의 주최 측은 사업적 수완을 발휘해 이를 패밀리 엔터테인먼트로 적극 포장했다.
물론 5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여성의 사회적 권리에 있어서도,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참정권 등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얻는 데 초점을 두었던 1세대 페미니즘, 문화 등을 비롯한 사회 전반의 사적 영역에서 여성의 해방을 촉구한 2세대 페미니즘, 다양한 인종과 연령, 사회 계층으로 확대한 3세대 페미니즘에 이어 여전히 여성들의 목소리는 세계적으로 이어지고 확산되고 있다. 한 사회가 전면적인 변화를 이룩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그 사실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한다.
이러한 시대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연출 방식이 영화 <미스비헤이비어>의 후반부에 드러난다.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한 '샐리 알렉산더'의 얼굴과 실제 '샐리 알렉산더'의 얼굴을, 그리고 제시 버클리와 구구 바샤-로가 연기한 '조 로빈슨'과 '제니퍼 호스텐' 그리고 실제 '조 로빈슨'과 '제니퍼 호스텐'의 얼굴. 영화 말미에 이르러 <미스비헤이비어>는 성 상품화에 반기를 든 주역들의 얼굴을 포개어놓는다. 1970년대의 얼굴과 2020년 현재의 얼굴을. 미스 월드 대회 이후에도 각자의 길을 걸으며 꾸준히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해 온 실제 인물들의 발자취를 <미스비헤이비어>는 존중하면서도 동시대 관객이 포용할 수 있는 대중적인 화법을 통해 유의미한 메시지를 담아낸다.
영화 '미스비헤이비어' 스틸컷
무엇보다 <미스비헤이비어>가 마음에 들었던 건, 이들이 미스 월드 대회를 비판하고 대회 현장에서 일종의 소란을 일으켜 전 세계 언론 지면 1면을 장식한 이 사건 자체에만 주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사건의 여파로 진행된 법정 공방에 주목하거나 이러한 행동 자체의 영향에 대해 설명하느라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그러나 <미스비헤이비어>는 '샐리'와 '조'가 대회 방해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나서도 뜻을 함께한 동료 여성들에게 박수와 환호를 받는 모습을 놓치지 않는다. 또한 사학을 전공하고 미디어 등을 활용한 온건한 방법으로 변화를 꿈꾼 '샐리'와 메시지를 담은 그라피티를 그리는 등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변혁을 촉구한 '조'의 서로 다른 입장이 마침내 여성의 연대로 향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담아낸다.
106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미스비헤이비어>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전한다. 특히 후반부 화장실에서 나누는 '샐리'와 '제니퍼'의 대화 내용에 주목할 것. 행동으로 자발적 선택을 한 여성들, 생존하고 꿈을 펼치기 위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여성들, 그리고 직접 행동하지는 않았지만 변화의 물결을 지지하고 묵묵히 응원의 시선을 보탠 또 다른 여성들. <미스비헤이비어>는 특히 올해 상반기 개봉한 <작은 아씨들>(2019),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 그리고 <라라걸>(2019) 등을 비롯한 여성 영화의 계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만한 작품이다.
'샐리 알렉산더' 역의 키이라 나이틀리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은 아직 바뀌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성적 대상화는 여전히 존재하며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풍조도 남아 있어요.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은 임금을 받는 분야는 모델 업계 밖에 없습니다. 3세대 페미니즘의 흐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평소 생각해왔던 것들에 질문을 던지며 더 많은 논의를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