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용어 중에 '핍진성'이라는 게 있다. 이 개념에 대해 소설가 김연수의 산문 『소설가의 일』에는 "서사적 허구에 사실적인 개연성을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수용하는 관습화된 이해의 수준을 충족시키는 소설 창작의 한 방법으로, 구체적으로는 동기 부여나 세부 묘사 등의 소설적 장치를 들 수 있다."라고 그 의미가 언급된다. (문학동네, 2014) 이는 개연성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말이다. '그럴 수 있는' 정도와 '정말 그런' 정도는 다르기 때문. 한자(逼眞性)로도 영문(verisimilitude)으로도 어렵게 다가오는 이 말이 영영사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The appearance of being true or real."
(김연수 산문에서도 핍진성의 개념을 달리기를 예로 들어 비슷하게 풀이한다.) 삶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어떤 일을 "이제부터 할 거야"라고 말할 때 개연성이 있는 말이지만 핍진성이 있는 말이라고는 하기 어렵다. 반면 어떤 일을 10년쯤 행한 사람이 "어제도 그 일 했어"라고 말한다면 이 말은 개연성은 물론 핍진성도 갖춘 말이 된다. 핍진하다는 건 진실에 가깝다는 뜻이고, 내 방식대로 말하자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진실한 것은 글을 쓰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글을 멈추지 않고 쓰는 것이다.
개연성을 지나 핍진성으로 향하는 다리에는 '계속 (말)하기'가 놓여 있다. 계속하다 보면 개연하기만 한 게 아니라 핍진해진다는 건, 단순히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게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어떤 뜻과 가치에 따라 임하는지를 포함하는 말이다.
그간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떤 것을 지속하는 일이 그 자체로 대단한 무언가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해왔다. 앞으로도 생각은 멈추지 않겠으나, 지금은 일단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무언가 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는 건 핍진한 삶을 만드는 일이고 그 뜻은 곧 '나다움' 혹은 '진실함'에 이른다. 계속하면 언젠가 진실한 것에 다가갈 수 있겠다는 믿음이자 각오 같은 것이다. (2020.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