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인 척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전화 역할극
어제 씨네엔드 '월간영화인'에서 영화 <비포 선라이즈>(1995)에 관해서 중요하게 언급한 한 장면.
'셀린'(줄리 델피)과 제시(에단 호크)는 카페 안에서 서로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고 받는 역할극을 한다. '셀린'이 통화할 때 '제시'는 '셀린'의 친구인 것처럼 응답하고 반대일 때 '셀린'은 '제시'의 친구인 것처럼 흉내 내어 응답한다. 말하자면 다른 사람의 시선과 입장을 가정한 채로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는 것인데, 대화가 이어지고 난 뒤 통성명을 하고 대화가 깊어질수록 조금씩 속마음을 꺼내 보이는 <비포 선라이즈>(1995)에서 이 장면은 중요하다. 통화의 수신인은 다른 사람인 것처럼 응답하지만 사실상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셀린'은 "사실 나도 그때 같이 내리고 싶었어"라고 말하고, "고개를 돌리면 날 쳐다보는 걔 눈빛이 좋아"라고도 말한다. "우린 모두가 서로의 악마이자 천사라는 말 알지?"라든가, "시간이 지날수록 걔가 점점 더 좋아져." 같은 이야기들도 이 장면에서 나온다.
<비포 선라이즈>는 대화가 플롯을 이룸에도 대화 내용 자체가 중요한 종류의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라든가 "남자들은 멍청해서 여자 마음을 잘 모르거든"처럼 친구의 입장인 척 대화에 화답하는 일이 결국 실질적으로 두 사람이 말하는 '깊은 이야기'의 한 범주라는 점에서 이 일련의 전화 역할극은 상징적이다. 앞선 장면에서 두 사람은 클럽에서 핀볼 게임을 하며 각자의 과거 연애사를 꺼냈고, 그 후 길을 걷다가 "신이 있다면 너와 내 안이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을 거야" 같은 이야기를 했다.
'셀린'을 다시 인용하면, 마법이라는 게 있다면 그건 상대를 이해하고 함께 나누려는 시도 안에 존재할 것이다. 성공하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대답이라는 건 그런 시도 안에 있다. <비포 선라이즈>는 낯선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떤 방식과 과정을 통해 친밀해지고 깊어질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는 모범적인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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