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일의 기록 _ 프립소셜클럽 '영화가 깊어지는 시간' 1기(아카데미 시상식과 영화 이야기) 4회차 모임 때는 넷플릭스 영화 <아이리시맨>을 다뤘다. <그린 북>(2018), <블랙 팬서>(2018), <문라이트>(2016)를 거쳐 <아이리시맨>(2019)에 이르기까지. 네 번의 모임을 진행하는 동안 인종 문제와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화두로 시작한 이야기는 돌고 돌아 각자의 취향을 거쳐 다시 '영화'가 과연 무엇인지로 돌아왔다. 그건 어떤 영화가 상을 받고 못 받고 아카데미 시상식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이 영화이고 무엇은 영화가 아닌가. 셰익스피어가 『오셀로』에서 말한 '바다와 육지에서의 감동적인 사건들'에 관하여. 극장과 극장 바깥에 관하여, 기술과 매체에 관하여.
결국 정답을 내릴 수는 없겠지만 '시네마'가 무엇이고 '이야기'란 무엇인지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되새기는 과정이 있어야만 우리의 이야기는 더 깊어질 것이다. 함께 영화를 보는 대신 각자의 영화를 보고 만난 우리가 무엇에 관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에 있어 호스트로서도 새롭고 고마운 경험이 되었다.
(프립소셜클럽 2기 모임은 8월 말 혹은 9월 초부터 시작할 예정으로 일정 및 커리큘럼 준비 중에 있습니다.)
(...)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필요한 구성 요소는 단지 그런 사건과 인물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고 어떤 방법으로 담아내는가 하는 데 있다. 딱 지나가던 행인들이 목격할 수 있을 만한 정도의 거리를 두고 <아이리시맨>의 카메라는 ‘프랭크’의 투박하고 거친 폭행을 한동안 지켜본다. 그건 곧 관객의 시선이기도 하다. <아이리시맨>은 스코세이지 감독의 20세기 역작들과 달리 활력과 카리스마보다는 쓸쓸함과 씁쓸함을 가득 풍긴다.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프랭크’는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지나며 자신이 몸담았던 일이 그 중심에 있었음을 회고하지만 정작 ‘프랭크’는 진정한 주인공이 아니라 말단 행동대원 정도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조직의 2인자 같은 인물이 되기는 했지만 그는 시종 수동적이고 견해를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점이 <아이리시맨>이 말하고 싶은 바를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그 이면에 담긴 것이 다를 수도 있는 것. 이것도 시네마의 한 역할일 것이다. (...) (2020.06.19.)
(이메일 영화리뷰&에세이 연재 [1인분 영화] 6월호 아홉 번째 글 '무엇이 영화였고, 영화이며, 영화일 것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