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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14. 2020

창작과 참고의 경계

글쓰기에 관하여

가공된 이야기를 다루는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를 보면 대부분 "인물, 지명, 장소, 사건 등은 창작된 것이며 실제와 유사성이 있다 해도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히는 문구가 있다. 이 문구가 쓰인 주 목적은 물론 실화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서이지만, 내 경우 이건 마치 식품이 아닌 상품에 '먹지 마세요'라고 쓰인 것과 비슷한 의미라고도 생각하는 쪽이다. 만약 누군가 그걸 실제라고 착각한다 해도 그건 영화의 책임이 아니라는 말이다. 창작자가 모든 수용자를 일일이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니라 수용자의 주체적, 비판적 감상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실제와 유사성이 있다 해도 우연에 의한 것'이라는 내용은 다르게 볼 필요도 있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게 언제나 완전히 새롭고 전에 없던 것인 건 아니어서, 경우에 따라서 정말로 허구인데 실제이거나 경험담처럼 다가오는 경우가 있어서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 실제와 허구를 구분 짓는 것은 세부 자체보다 그 세부들이 어떤 맥락을 가지고 얼마나 서로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에 있겠다. 몇 개가 비슷할 수는 있지만 많은 면에서 그 비슷함의 정도가 일정 이상을 넘어선다면 누군가는 의심할 것이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특정한 대화를 나누었거나 특정한 일을 같이 경험한 당사자나 주변인이라면, 의심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게 될 테다.

일상의 어떤 대화는 작품에 직, 간접적인 영감이나 단서를 줄 수 있다. 삶의 갖가지 경험은 작품에 직, 간접적인 영감이나 단서를 줄 수 있다. 취재를 하거나 다른 창작물에서 소재나 사건, 캐릭터 등을 참고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영감이고 단서이며 참고인 것이지,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되면 영감과 단서와 참고의 정도를 넘어선다. 출처를 밝히거나 당사자 혹은 관계자의 동의 혹은 허락을 얻은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임의로 가져오는 건 문제가 된다.

영화에 관한 글로 말하자면 예컨대 특정 장면이나 소재에 대해 비슷한 견해를 나와 누군가 함께 가질 수 있다. 평상시라면 어떤 작품에 대해서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리뷰나 비평 등을 통해 읽는 일은 오히려 적극 필요하며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는 일을 금기하거나 멀리할 것은 아니라고도 생각하는 편이다. 그건 어디까지나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같을 수 없어서다. 얼핏 유사해 보이는 의견이나 생각, 해석, 느낌 등은 각자의 삶과 가치관에서 나오는 고유한 언어들로 고유하게 존재한다.

평상시라면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견해를 접하는 일은 항상 필요하지만, 나만의 무엇인가를 다듬고 쓰는 작업을 하는 그때만큼은 좀 다르다. 특정한 생각에 관한 다른 이의 특정한 서술 혹은 그 전후 맥락으로부터 가능한 직접적 영향을 잠시 받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국내외 여러 리뷰나 비평 등을 상시 읽다가도 내 글을 쓸 때만큼은 인터뷰나 보도자료 정도를 제외하면 (쓰기와 읽기가 동시적으로 행해질 수 있는지 여부를 떠나) 읽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멈춘다. 같은 영화를 다루는 다른 글을 내가 그 영화를 다루는 글을 쓸 때만큼은 잠시나마 내려두는 것이다. 그래서 쓰는 순간에는 거의 음악만이 함께이게 된다.

전에 표절로 마음앓이를 한 지인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그의 글과 문제가 된 다른 사람의 글을 나란히 대조해 몇 번씩 읽어보았던 적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스스로 더 미약한 글력을 갖고 있다고 여겨, 단지 당사자의 고충과 기분을 헤아리려 노력하고 새삼 창작의 어려움을 실감하는 정도였다. 영화나 드라마 혹은 다른 책과 같은 '기댈 구석/글감'이 명확히 있는 글을 쓰는 내 조건은 그나마 조금 나은 것이라고도 생각했었기도 하고. (지금도 나는 픽션을 쓰는 걸 배우기 전에는 못할 것이라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나 주말 동안 이 일을 접하고는 나 역시 사소한 것 하나에도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게 사소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중대한 것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번 일이 문제제기를 한 당사자가 수긍할 수 있고 더 상처받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좋겠다.



인스타그램: @cosmos__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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