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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Jul 25. 2020

좋아하는 것에 시간과 마음을 바쳐 몰입하는 일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19)

"고대 지구인들의 마지막 희망 일랜시아로의 여행 (...) 마의 근원인 마족들과의 전쟁, 폐허 속에서 희망을 찾기 위해 700년 전 일랜시아를 건설한 고도의 지적 생명체 가이아의 모체인 神프로토타입의 전언을 가슴에 품고 머나먼 저 편 희망의 미래를 찾아 떠나는 것으로 일랜시아로의 여행시작됩니다."


1999년 출시된 넥슨의 온라인게임 '일랜시아'의 홈페이지에는 위와 같이 게임 소개 글이 적혀 있다. 여행. 모험. 여정. 세계. 이런 키워드들이 주는 감정은 대체로 호기심과 설렘에 해당한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미지의 공간에서 내 분신 같은 캐릭터와 함께하는 시간들은 마치 미숙한 채로 태어나 세상의 여러 위협과 환경 변화 속에서 살아남는 성장의 과정과도 같다. 예컨대 NPC가 하는 말 한마디를 유심히 살피고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를 단서를 찾고 때로는 너무 강한 상대를 만나 벽에 부딪히는 일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삶을 영원히 살 수 없는 것처럼 게임도 영원히 할 순 없다. 게임이 '망해'서 서버가 문을 닫지 않아도 학업이나 취업 등과 같은 사용자 본인이 처한 상황 변화로 게임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는 일도 잦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여유 시간을 어렵사리 마련해볼 수는 있겠지만, 유년 혹은 청소년기에 걱정 없이 빠져 있던 그 경험은 다시는 반복될 수 없다. PC게임보다 모바일 게임 위주로 판도가 재편되고 긴 시간 공을 들여야 하는 게임보다 순간의 재미와 몰입감을 중시하는 캐주얼 한 게임들이 주류를 이루는 건 단지 스마트폰으로의 중심 이동만이 원인이 된 현상은 아닐 것이다. 놀 시간이 줄어들고 이동하는 시간이 많아진 사람들의, 그러나 게임을 하고 싶은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어떤 게임에서는 '자동사냥'과 같은 기능을 아예 적극 지원하기도 한다.


요즘의 게임 이용 양상은 다소 다를 것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게임들. 오랜 시간을 함께한 게임들은 하나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불편하게, 헤매면서, 시행착오와 실패로 가득한 가운데 시작하고 겪었다. 온라인게임의 경우라면 그러던 중 게임 안에서 만난 다른 사용자들과 공동의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교류가 쌓이게 되었던 것이고. 16년 차 '일랜시아' 유저이기도 한 박윤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2019)는 일랜시아라는 게임을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관객이라 해도 각자가 좋아하고 몰입했던 애정의 대상과 존재들을 하나씩 떠올리게 만든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 스틸컷


많은 시간을 바쳐 관계를 맺고 진정으로 즐기고 몰두했던 것들. 작은 일 하나에도 이 세상이 뒤집힐 것처럼 울고 웃었던 순간들.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서버가 문을 닫아도,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아도, 거기 쌓여간 시간, 경험, 관계들은 의식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그 순간들을 추억하는 건 돌아가고 싶어서도 현실을 부정해서도 아니고 단지 그때가 좋은 시절이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마음속에서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들이 있다는 것. 영원하지도 않고 쓸모도 없을지 모를 것들에 시간과 정성을 바치는 건 그게 물질적으로 남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그 경험들이 마음 바쳐 어떤 것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임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정도와 그 게임에서 경험하는 정도가 서로 다르지 않다.


아직 <내언니전지현과 나>에 대해 할 이야기는 훨씬 더 많이 남았다. 예컨대 세상은 어떻게 바뀔 수 있는가에 관하여.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그것을 더 나은 방향으로,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하여.


인디포럼에서

2020년 7월 25일, 인디포럼 '신작전 장편' 관람 @인디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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