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8개의 장
'여왕의 여자'. 국내 개봉용으로 부제가 붙음으로써 어쩌면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2018)는 관람 전부터 이미 영화의 관계도가 좀 더 명확히 그려지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영화를 막상 보고 나면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전작들을 통한 학습효과로 기대할 법한, 충격적인 세계관이나 작중 설정 등이 그리 두드러지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따라서(?) 감독의 전작들보다 조금 더 대중적으로, 혹은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라는 평들이 적잖이 보이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이 영화가 단지 흔한 '삼각관계' 같은 키워드로 축약할 만한 영화는 아니라는 궁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 나름의 해답을 다름 아닌 영화의 총 8개로 구성된 '장'(Segment)에서부터 찾아보기로 했다. 1장부터 8장까지 각 장에는 해당되는 파트의 대사로 등장하기도 하는 말이 소제목으로 붙어 있는데, 그것이 누구로부터 발화되는 말이며 누구를 향하는 말인지, 요점은 그것에 있다.
(*짧은 글을 읽고 싶다면:
-3월 9일 영화의 일기: 정확하고 우아하고 균형 잡힌, 세 사람의 두 이야기: (링크)
-3월 11일 영화의 일기: 영화의 구조 자체가 훌륭한 이야기가 되는 경우: (링크)
-3월 12일 영화의 일기: 재관람을 부르는 영화, 때로는 '덕질'을 위한 영화: (링크))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의 결정적인 내용에 대한 언급이나 스포일러는 하지 않는 글이지만,
관람 전 일부 내용조차도 알기를 꺼린다면, 관람 후에 읽어주세요.
쇠락한 귀족 가문 출신의 '애비게일'(엠마 스톤)은 먹고살 궁리를 하기 위해, 사촌지간인 '사라'(레이첼 바이스)가 있는 왕궁을 찾는다. 배경은 18세기 초. 영국 여왕 '앤'(올리비아 콜먼)이 집권한 시기, '사라'는 직접 의회 정치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여왕의 막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앤'과 '사라'의 관계는 그 기원이 명확히 다뤄지지 않지만 두 사람의 대화로 미루어 어릴 적부터 친밀하게 지내온 사이로 추측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은밀히 애정을 나누는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 궁에, '애비게일'이 찾아온다. 마차를 타고 오던 중 어떤 남자의 못된 짓으로 인해 하필이면 진흙 바닥에 몸과 옷을 더럽히게 된 '애비게일'. 그는 궁에서 하녀로 일하게 된다.
물론 '사라'를 만나기 전 궁의 계단을 지나면서 하녀에게 하는 말인 "흙에서 악취가 나네요"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는 더럽고 냄새가 난다는 뜻이지만, 관계가 시작되게 하거나 혹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를 생각하면 하나는 현재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음을, 혹은 다른 쪽으로 바꾸고 싶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애비게일'은 하녀로 머무를 생각이 없다. 신분 상승을, 혹은 귀족이었던 자신의 지위를 다시 되찾기를 꿈꾼다. '애비게일'에게 진흙탕은 벗어나야 한다고 여기는 곳이다. 자신의 상태를 인식하고 어딘가로 이동을 꿈꾸는 일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수많은 유산과 사산을 겪었을 뿐 아니라 통풍과 고혈압 등 병환을 달고 사는 '앤'은 늘 각종 치료와 그에 따르는 고통이 곧 일상이다. 어느 날 '애비게일'은 궁 바깥에서 약초를 구한 뒤 몰래 '앤'의 침실로 들어와 그의 다리에 약초를 바르고, 이 일로 인해 잠시 회초리를 맞게 되지만 실제로 '앤'의 통증이 호전되면서 '사라'의 신임을 얻는다. 며칠 후 '사라'는 자신의 사격에 '애비게일'을 동행시키고, 비둘기를 쏘는 대신 실제 장전을 하지 않고 총성만 울리게 하여 '애비게일'에게 겁을 준다.
이 시점은 야당 당수 '할리'(니콜라스 홀트)가 '애비게일'에게 '앤'과 '사라'의 정보를 빼내 달라는 요청을 하고 난 뒤인데, '애비게일'은 처세를 위해 '사라'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고, 아마도 '사라'는 총 이야기를 하면서 "헷갈려서 사고 칠까 봐 걱정이야"라는 말을, '애비게일'에게 이를테면 "네 주제를 알고 처신하라"는 정도의 뜻을 담아서 했을 것이다. 또 하나, 새로운 관계가 조우의 과정을 거쳐 어떤 진전을 이룰 때 누군가는, 혹은 두 사람 모두, (여기서는 그 관계를 사랑으로 한정하자면) 지금의 이 관계가 어떤 것인지 명확히 정의할 수 없어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궁 안팎과 여왕의 침실을 드나들면서 '애비게일'은 '할리'와 절친한 사이인 듯 보이는, 군인인 '마샴'(조 알윈)을 마주친다. '애비게일'은 '마샴' 역시도 자신의 신분 상승을 이루기 위한 발판의 하나로 판단한 듯하다. 관계의 양상으로 보자면 상대의 알지 못했던 면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경탄의 표현일 테지만,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에서 대부분의 남성 캐릭터들은 마초적인 인물이지도 않고 여성에게 지위적인 우위를 점하는 인물이 되지도 못한다.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며 힐을 신는다. "옷이 멋지네요"라는 말 역시 실제로 '애비게일'이 '마샴'의 외모를 칭찬하는 말이라기보다는 '마샴'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도록 만들기 위한 유도 혹은 꾐의 하나에 더 가깝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세 여인 사이의 이야기 외에도 당시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언급되며 의회에서의 휘그당과 토리당의 여야 간 견제 역시 다뤄진다. (그러나 당쟁의 구체적인 형태나 국외에서의 전투가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이는 현명한 취사선택이다.) '앤'은 자신의 권력 유지에 여야의 밀고 당기기를 적극 활용하고 '사라'는 총리이자 여당 당수인 '고돌핀'(제임스 스미스)와 서로 일치하는 이해관계에 놓여 있는데, "큰 문젠 아니에요"라는 말은 야당 당수 '할리'의 의회에서의 어떤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다. 혹은, '애비게일'이 조금씩 '앤'에게 접근해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적어도 그 시점까지는 '사라'가 큰 의식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말은 중의적으로 볼 여지도 있겠다. ('사라'는 자신이 "약자에게 약하다"라는 말을 하는데 작중 캐릭터로 미루어 그 말은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8개의 세그먼트 소제목 중 유일하게 여왕 '앤'의 말이다. 진흙 목욕을 하는 신에서 '앤'이 '애비게일'에게 하는 이 말은 어쩌면 '사라'와 '애비게일' 사이에 놓이게 된 '앤' 자신의 현재 상태를 인식하는 말처럼 다가온다. 그는 기르는 토끼의 숫자처럼 열일곱 번에 이르는 유산과 사산, 악상(惡喪,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경우를 이르는 말)을 겪으며 몸과 마음 모두 지쳐 있고, 실제로 수많은 질병을 앓았기에 국정 운영 면에서는 '사라'에게 많은 의지를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는 무능력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는, 그리고 '사라'와 '애비게일'에게 휘둘리는 군주로 단순히 묘사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여왕으로서의 지위와 위치를, '사라'와 '애비게일'이 자신보다 아래에 있음을 그들에게도 매번 주지시키는 인물이다.) 진흙 목욕 중 "잠들어서 여기 빠지면 어쩌지?"라는 말은 변덕적이고 히스테릭한 인물처럼 보이고 한편으로는 아이 같아 보이는 순간도 있는 '앤'의 캐릭터를 잘 대변하는 말로 다가온다.
'차가운 진수성찬을 꼭꼭 씹어 먹는 여왕은
제 자식이 자라서 병사가 되고
문밖을 파수하다 임종을 맞는 순간을
몇백 번이나 지켰습니다'
김상혁, '여왕은 좋은 친구였습니다' 부분,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 (문학동네시인선 086)
작중 어떤 일을 겪게 된'사라'는 '메이'(제니 레인스포드)라는 인물과 잠시 만나게 되는데, 그는 사창가로 보이는 곳에서 사는 인물이다. "곪으면 큰일 나요"라는 대사의 맥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으므로, 여기서는 여섯 번째 장이라는 위치 특성상 '사라'가 '애비게일'이 여왕과 가까워지는 것에 대해 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어떤 행동에 나서게 된다는 것 정도로만 언급해야겠다. 하긴, 그렇기도 하지. 몸과 마음의 상처도, 그리고 인간관계도, 정말 곪으면 큰일 나지. 상처에도 관계에도 아물 수 있으리라고 여겨질 만한, 탈 없으리라고 판단할 만한 어떤 선이 있을 텐데 그것을 지난다면 더 이상 돌아올 수 없고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어떤 상태에 취해 있을 때, 우리는 쉽게 제 위치를 잊거나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버리곤 한다.
다시 '애비게일'의 말이다. 첫 장부터 소제목/대사의 발화자의 순서를 다시 되짚으면, '애비게일(1장) - 사라 - 애비게일 - 사라 - 앤 - 메이 - 애비게일(7장)'이다. 영화에는 거울이나 장신구 및 각종 의상과 태피스트리 등 눈을 잠시도 다른 데 돌리기 어려울 만큼 수많은 시각적 정보와 소품들이 등장한다. 시각 자료도 중요하지만 '애비게일'의 "그건 놔둬, 예쁘네"라는 말과 같이 영화의 많은 대사들은 단지 대화로서만 기능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발화되는 매 순간,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과 위치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정확히 배치되어 있다.
이번엔 다시 '사라'다. 한 번 더 정리. '애비게일(1장) - 사라 - 애비게일 - 사라 - 앤 - 메이 - 애비게일 - 사라(8장)'의 순서로 작중 대사를 활용한 텍스트가 각 장의 타이틀 카드에 쓰인다. 6장에서 비록, 주변인이자 단역에 해당하는 '메이'의 말이 쓰였지만 1장부터 8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발화(發話)는 '앤'과 '애비게일', '사라' 세 사람이 하는 말이거나 세 사람에게 전해지는 말이다. 오래도록 친분을 나눴고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앤'과 '사라'는, 서로 첫 만남의 이야기나 꿈 이야기를 종종 하는데, 8장의 소제목은 그것의 일부다.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를 여왕 '앤'을 사이에 둔, '애비게일'과 '사라', '사라'와 '애비게일' 사이의 경쟁으로 본다면, 1장부터 8장까지의 '애비게일'과 '사라'를 번갈아 오가는 발화 구성 형태의 타이틀 카드는, 어쩌면 평이하게 비칠 수도 있을, 흔하게 다가올지도 모를 이야기에 긴장을 불어넣고 관객들이 계속 집중해서 다음 상황을 지켜볼 수 있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다. 여왕의 '더 페이버릿'(The Favourite)이 되기 위한 '여왕의 여자'들의 싸움이라 칭할 수 있을까.
영화의 4장 "큰 문젠 아니에요"(A minor hitch.)의 중요한 대목을, 특히 작품 전체에서 흐름상 중요한 의미를 띠는 대목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앤'과 '애비게일'이 침실을 앞에 두고 춤을 추는 신을 언급하고 싶다. 그 장면의 내용을 늘어놓고 싶은 게 아니라 해당 대목이 어떻게 영화에서 표현되고 있는지를 말이다. 통증으로 한쪽 다리가 불편한 '앤'에게 '애비게일'은 춤을 춰보자고, 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앤'이 거기에 응답하게 되는데, 이 장면은 '사라'와 '애비게일'이 후원에서 비둘기를 향해 총을 쏘는 대목의 음성과 일부 겹쳐져 있다. 품을 떠난 비둘기를 향해 사격을 하는 것과,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마주하고 춤을 추는 것.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는 관계의 행위를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춤과, 전쟁의 잔혹함과 다툼 혹은 경쟁의 속성을 상징하는 총성을 동일선상에 놓고 있는 것일까. 작중 여당과 야당이 서로를 견제하고 '사라'와 '애비게일'이 서로 경쟁하게 되듯이, 여왕이 두 사람의 상대를 향한 질투를 일부러 이용하게 되듯이. 한편으로는, 대체로 두 사람이 춤을 출 때 상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혹은 상대에게 자신의 매력을 어필하기 위해서 '몸짓'을 통해 노력하게 되듯이, 총이라는 도구는 잘 사용하면 막강한 무기가 되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한 것이기도 하듯이.
'페이버릿'이 사전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One of my favorites' 같은 표현이 영어권에서는 자주 쓰이곤 하지만),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가장 좋아한다는 것은 그것이 결국 하나를 초과할 수 없음을 내포한다. 그래서 부정관사 'A'가 아니라 정관사 'The'가 앞에 붙는 것이 아닐까. 여기까지 여덟 개로 구성된 영화의 각 장(Segment)에 대해 적고 나니 이제야, 결말을 포함한 영화 내용을 여과 없이 언급하는, 좀 더 긴 글을 적어보고 싶어 졌다. 관계의 몸짓과, 관계로부터 울려 퍼지는 총성이 이 이야기의 결말을 어떻게 끌고 가는지에 관하여. 각 장이 영화의 구조상 어떤 역할을 하고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서술하려면 영화의 상세한 내용을 반드시 다뤄야만 하겠기 때문에.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The Favourite, 2018),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
2019년 2월 21일 (국내) 개봉, 119분, 15세 관람가.
출연: 올리비아 콜먼, 엠마 스톤, 레이첼 바이스, 니콜라스 홀트, 조 알윈, 마크 게티스, 제임스 스미스 등.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 9/10점.)